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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나님의 평화 | 김희헌 | 2018-12-16

by 김희헌 posted Dec 16, 2018 Views 22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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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12-16

하나님의 평화 (3:14-20, 4:4-7, 3:7-18)

2018.12.16 (대림절 셋째 주일)

 

[현대문명과 평화]

대림절 셋째 주일에는 분홍색 촛불을 켭니다. 분홍색 촛불은 기쁨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기쁨의 촛불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혼돈의 시대를 무겁게 통과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평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래된 사회적 적폐가 강고하게 작동하면서 민중들의 삶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신문 1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를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한 장은 남과 북의 군인들이 얼마 전 시범 철수한 감시초소(GP)를 서로 검증하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9.19 군사분야 합의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오솔길을 따라 남북을 오가는 그 모습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평화의 바람이 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진은 이 평화의 바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엄연한 고통의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청년 노동자가 밤샘 순찰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촛불정부 하에서도 경제 민주화는 물 건너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점차적으로 커지는 와중에 발생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24살의 청년이 반년이 넘는 구직활동 끝에 입사한 곳은 화력발전소의 설비 하청업체였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지 석 달 만에 석탄을 운반하는 컨베이어벨트에 휘말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아갈수록 안타까움이 커집니다. 혼자 일하지 않고 단 한 사람만 더 있었어도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기계를 정지시키는 장치를 당겨줄 동료가 없었다고 하지요. 현장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그의 어머니가 했던 말은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세계에 평화가 있을 리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기 위해 활용되는 지혜에 기쁨이 깃들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잃고, 지혜로워졌는데도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국정감사 자료 중에 차마 밝히지 못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지난 10년 동안 50대 대기업이 구입한 부동산이 자그마치 십억 평에 이른다는 사실을 최근에 들었습니다. 강남향린교회 사태 이후에 우리는 토지 강제수용으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노태우 정권 때까지만 해도 기업의 편익을 위해서 정부가 땅을 빼앗곤 했는데, 이제는 힘 있는 기업이 힘없는 사람들의 땅을 합법적으로 뺏을 수 있도록 만든 장치가 1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습니다.

2주전 재개발이 진행되는 아현2구역에서 강제집행을 당해 갈 곳을 잃은 철거민이 한강에 투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내쫓기고 자기 땅을 빼앗기며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사회는 이런 제도를 용인하며, 이런 삶의 방식에 익숙하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경제의 성장을 문명의 진보와 동일시해온 자본주의의 병리적 습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누릴 공공선을 세우고 넓히기보다는, 힘 있는 개인의 특권적 이익을 보장하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생겨난 병폐입니다. 사회적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가진 자들의 생활수준을 더욱 높이는 것에 둘 뿐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곤경은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병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은 사라지고, 막연히 성공을 추구하는 경쟁구도에서 모두가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사회적 약속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 스바냐서 314-20]

오늘 읽은 제1성서의 본문은 스바냐 예언자의 마지막 신탁입니다. 그는 요시아 왕이 사회개혁을 단행하는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당시는 예언자들의 활동이 뜸하던 때였습니다. 남 유다에서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가 활동한 지 거의 백 년이 지나도록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외부적으로는 앗시리아 제국이 몰락하면서 국제정세에 변화가 생겨나고, 내부적으로는 개혁의 요구가 커져가면서 다시 예언활동이 가동되었습니다. 나훔, 하박국, 스바냐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예언자 스바냐의 눈에 비친 세계는 암울했습니다. 우상숭배와 불의와 부패가 번성한 세계였습니다. 무도한 태도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주변 세계를 어둡게 물들이기 마련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불의한 사람들의 행위가 도리어 추앙을 받고, 진실과 거짓이 뒤섞일 때 영혼의 긍지를 가진 사람들은 절름거리다가(lame) 결국 자기 세계에서 쫓겨납니다(outcast). 스바냐의 시대가 그랬던 것입니다. (19)

그렇기 때문에 스바냐서에 기록된 총 9개의 신탁 가운데 8개는 혹독한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2-3:8) 마지막 한 개만이 구원과 회복에 관한 신탁인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둔 시대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회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고 약속합니다. (17) 그가 이런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외쳤던 그날이 오면’(바이욤 하후)이라는 약속의 언어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 ‘그날이 오면이라면 표현에는 예언자의 꿈이 담겨 있는데, 스바냐가 다시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에 나오는 여덟 개의 심판의 신탁이 마지막에는 구원의 신탁으로 바뀔 수 있게 된 것은 오늘 본문 바로 앞 13절에 나온 사람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둡다하여 거짓을 말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으며, 평화를 꿈꾸며 죽음의 시대를 견디어낸 살아남은 자’(sheerith)입니다. (13)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모욕당하기도했습니다. (18) 죽음의 질서에서 고통당하며 여위고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주의 이름을 의지했던 온유와 겸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12)

바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 날은 심판과 보복의 날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날로 변합니다. 죽음의 시간을 견뎌낸 이 남은 자들이 진실과 평화를 세우는 그루터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향해 외치는 스바냐의 마지막 신탁은 어쩌면 어두운 시대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바친 예언자의 찬양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시온의 딸(bath)들아, 노래하여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네 안에 계실 것이니, 이제는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14)

두려워하지 말라! 성경이 계속해서 들려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두려워 말라입니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에게 들려진 천사의 소리두려워 말라이고 (1:30), 아내 될 사람의 임신으로 인해 고민하는 요셉이 들은 소리두려워 말라입니다. (1:20) 어두운 바다 풍랑 위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예수의 말(6:50),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고통스러워하는 회당장에게 들려준 말(8:50), 참새보다 못한 삶이 아닌가 하고 번민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예수의 말(12:7), ‘두려워 말라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 빈 무덤을 서성이던 사람들에게 들린 말도 두려워 말라입니다. (28:5)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두려워 말라는 말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에 의존해서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지는 것은 우리들의 소유와 지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kereb, midst) 하나님이 계신다는 약속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진정한 구원과 회복은 어둠이 지배할 때 추구되던 것을 뒤늦게 얻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17절에서 나오듯이,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대림절에 읽었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이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를 바라는 시간이요, 어둔 밤에 빛이 비치듯 이 역사에 참된 생명이 화육하기를 염원하는 시간입니다. 역사를 새롭게 할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배우는 기간입니다.

 

[새 시대를 여는 요한의 권면 / 누가복음 37-18]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는 겸손과 담대함을 겸비한 혁명가 요한을 봅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올 예수의 시대를 준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요한이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시대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6:16) 그러나 요한을 단지 예수님을 보조하는 부속적인 존재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요한과 예수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계기는 요한의 투옥 때문이라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1:14) 요한은 광야에서 금욕적인 종교생활만 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민중봉기와 깊은 연관을 갖고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구속하였고 (3:18-20), 나중에 요한이 죽은 후에 예수의 활동소식을 들은 헤롯은 요한이 환생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했습니다. (6:16) 요한과 예수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요한이 한 일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요, 예수의 일은 새로운 시대를 ‘짓는 것이었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수의 첫 번째 외침이 회개하라는 말이었듯이,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무리들(오클로스)에게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그는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며 삶의 방식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룬 마태복음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 한정하여 회개를 촉구하지만,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오는 모든 무리들, 마가가 예수와 동행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던 오클로스를 향해서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며 회개를 권고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지배질서에 속한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옳습니다. 새로운 삶이 요청될 때 사람들은 잘못된 반문을 하기 쉽습니다. 거래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럼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되물을 것이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말합니다.

요한의 대답은 4가지입니다. 두 개는 민중들인 오클로스에게 주었고, 다른 두 개는 권력을 가진 세리와 군인들, 식민지 시대의 경제 권력과 군사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두 그룹에게 준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진실과 정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요한의 말은 힘이 있고 진리가 빛났습니다. 그래서 백성들(laos)은 요한을 가리켜 간절히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말했습니다. (15) 요한은 자신을 낮추며 예수를 높입니다. 세례를 베푼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가리켜 자기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낮춥니다. 이 말에는 겸손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새 시대를 지어갈 존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요한이 말한 물세례와 예수의 불세례의 차이 역시, 예수를 높이려는 겸손의 표현만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요한이 꾸었던 꿈, 즉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여, ‘쭉정이는 불태우는역사의 심판에 관한 기대를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요한의 말에 대해서 18절은 권면’(parakalon)이라고 표현합니다. 권면이란 그것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깊은 교감을 전제합니다. 그들의 교감은 새 시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폭력 위에 세워진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자비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평화를 향한 그리움 말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신학 / 빌립보서 44-7]

오늘 빌립보서의 본문은 바울과 빌립보 교우들의 깊은 신뢰관계를 보여줍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케도니아 지역에 세운 유럽 최초의 교회로서 (16:12), 이곳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1:3-5) 이 편지를 우정의 편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며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 그것을 받아 읽었을 사람들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시련과 시험 가운데에서 이런 편지를 받은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의 권면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대담한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과 빌립보 교우들 사이에서 교감되고 있는 기쁨의 신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하나님의 평화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이 촉구한 기쁨은 이 세상에서 추구된 행복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이룬 다음에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바울이 요청하는 기쁨은 하나님이 주실 평화에 대한 예견 속에서 미리 획득된 기쁨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심을 알고 먼저 누리는 기쁨이요, 그 기쁨 속에서 사람들은 관용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림절의 믿음입니다.

대림절의 기쁨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평화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의 평화는 사람의 헤아림(nous)을 뛰어넘는것이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평화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혹한 세계를 어루만지며 일으켜 세우는 자비로운 숨결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억압과 교만을 녹여내는 급진적인 분노이며, 한계와 굴곡을 치유하는 깨어난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기대 속에서 바울은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본문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우리들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화를 잇는 내용을 6절에서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 비범한 믿음이 펼쳐내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각성된 마음만이 염려를 이겨낸 기도를 드리며, ‘삶의 처지를 극복한 감사를 품을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거래관계의 부산물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물질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며,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거래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문명을 살아가다 지친 영혼의 왜곡된 습관일 뿐입니다. 감사는 깨어있는 마음에 찾아온 하늘의 선물에 가깝습니다. 생명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영혼의 신비 가운데 하나가 불안과 위기를 뚫고 갑자기 솟아오른 감사입니다. 우주의 적막이나 소란을 뚫고 드리는 기도 속에서 맺힌 감사의 마음, 거기에 이성의 헤아림 너머에서 밀려오는 하나님의 평화와 이어진 파동이 있습니다.

대림절은 우리 맘에 하늘의 평화가 임하는 믿음의 계절입니다. 이 평화는 개인적 만족에 머물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 대림절의 축복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지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불안과 혼돈의 시대를 지날 때,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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