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입은 그리스도 (미 5:2-5a, 히 10:5-10, 눅 1:39-45)
2018.12.23 (대림절 넷째 주일)
[몸을 입은 신이 태어나는 장소]
티벳 불교의 지도자로서 환생한 생불(生佛)로 여겨지며 존경받는 승려를 가리켜 ‘린포체’(rinpoche)라고 부르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지난주에 한국을 방문하여 설법을 했습니다. 티벳 망명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던 삼동(Samdhong) 린포체인데, 이분이 한국 불자들에게 했던 말씀은 ‘성불이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12월 19일, 「한겨레신문」, 23)
일반적으로, 불교의 종교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성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대신 그는 ‘고통당하는 중생의 아픔에 참여하며 타인을 돕는 이타행(利他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가르침은 마치 불교의 민중신학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는 고통당하는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몸을 입고 온 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의 엄밀한 신학적 의미는 ‘화육한 신, 몸을 입은 신’(incarnated God)이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그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기를 마쳐가며, 두 가지 신학적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왜 신은 기어코 몸을 입고서 이 세계에 오는가’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몸을 입은 신이 등장하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진술을 하고 있지만, 상당히 분명한 답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신이 몸을 입는다’는 성육신 사상이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지만, 로마가 지배하는 헬레니즘 시대에 태동한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은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sarx)를 천한 것으로 여기는 지배철학에 대한 항거의 요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지배사상은 육체를 천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육체를 구성하는 인민들을 지배하기 용이한 관념철학을 배포합니다. 그러나 육을 천시하는 사상은 결국 몰락합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철학은 존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철학은 ‘몸을 입고 온 신’에 대한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성육신 신학의 진정한 의미는 ‘신이 몸을 입고 왔다는 주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두 번째 질문, ‘몸을 입은 신이 등장하는 곳에 대한 질문에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는 동정녀를 통한 신의 탄생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근대과학의 시대를 거친 오늘날에는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습니다. 영웅들의 탄생은 대부분 아버지 신과 어머니 인간 사이에서 벌어진 일로 그려졌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은 인간의 숙명을 신적인 능력으로 극복해간다는 서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로마황제의 탄생설화에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처녀가 신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1세기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이야기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믿기지 않았던 것은 ‘동정녀를 통해서 신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리아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영웅적인 인물이 출생했다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낮고 가난하고 천한 곳으로 신이 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는 누구인가, 55)
몸을 입고 온 신이 하려는 일은 그가 등장한 장소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성육신 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사항은 몸을 입고 온 신이 ‘등장한 지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디에서 신이 등장하는가?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설화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묻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는 황제인가, 예수인가? 구원의 힘은 영광에 있는가, 고통에 있는가?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에 따라, 이런 질문에 대한 히브리서와 미가서와 누가복음의 성육신 신학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의 성육신 신학, 히브리서 10장 5-10절]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 10장 5-10절에서 자신의 성육신 신학을 설명합니다. 그는 신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세상 올 때 하나님과 이런 대화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편 40편 6-8절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보는 시편과 그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은, 그가 인용한 시편은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LXX)」을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치 자기가 들었던 것처럼 시편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입술에 담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한 것은 ‘몸’(soma)이었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몸’이었을까요? 그 대답이 7절에 나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몸을 입은 까닭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theos thelēma)을 ‘행하기’(poiēsai)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몸을 입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준비한 것은 ‘몸’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성육신 신학을 통해서 두 가지를 주장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율법의 시대를 ‘폐하려는’(anaireó, abolish)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희생 제사의 시대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여 바치는 시대입니다. 위선의 시대요, 폭력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오는 것은 그런 시대를 폐지하는 것입니다.
둘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몸을 준비해서 그리스도에게 입히자,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쳐서 피조물을 거룩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는 ‘율법(nomos)을 따라 드리는 것들’은 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합니다. 율법을 따라 하는 것은 ‘자기 죄를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여 바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자신의 성육신 신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국의 폭력과 종교적 위선이 한통속이 된 질곡의 시대를 폐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 죄를 씻어버리는 시대를 접고, 자신을 바쳐서 남을 거룩하게 하는 시대를 여는 것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몸을 입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설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 13:12-13)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에게 성육신 신학은 신에 관한 관념철학이 아니라, 억압과 위선의 시대를 종결짓는 길에 관한 추구(longing)이자 부름(calling)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대 베들레헴 / 미가 5:2-5a]
예언자 미가의 평화사상은 강렬합니다. 그의 시대가 불운했고, 그가 선 자리가 고통스러운 장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의 북쪽이 먼저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남쪽은 속국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불안의 시대에 사람들은 희망의 거처를 잃고, 무엇을 위해서 자신들의 용기를 바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사야와 미가는 동일한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시대’에 관한 것입니다. (사 2:3-4, 미 4:2-3)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방식에 관해서 두 예언자는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예언자가 활동한 장소와 연관됩니다.
이사야가 귀족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미가는 블레셋 접경지역 모레셋이라는 지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미가의 직업은 아마 농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땅을 빼앗긴 가난한 농민들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약자를 짓누르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사람들의 악행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가의 눈에는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약자들에게 불법을 저지르는 권력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곱게 보일 리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사야는 여러 민족들이 유다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8~10) 그러나 미가는 자신의 죄로 인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흔들어버립니다. (미 3:12) 그것은 예언자 미가가 착취당하는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읽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올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은 고장에 불과한 베들레헴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은 기발한 상상력입니다.
베들레헴은 에브라다(Ephrathah)라고도 불리는 곳으로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해산하는 과정에 죽어 묻힌 무덤이 있는 곳이요, (창 35:19) 고향을 떠난 룻이 정착하여 계보를 이어간 곳입니다 (룻 4:11). 그곳은 작은 고장이기는 하지만, 잊힐 수 없는 기억이 담겨있는 장소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수천 개의 고장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은 미가의 이 예언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식의 영웅출현에 대한 극적인 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씻기지 않은 정신은 미가의 민중 중심적 구원사상과 종교영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0년 정도가 지나서, 포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는 권력자가 아니라 ‘고난 받는 어린 양’과 같은 존재라는 사상이 도입되었습니다 (이사야 52장).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불온한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서, 시대를 구원할 메시아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모습으로 온다는 민중 중심적 역사해석입니다.
미가가 예언한 장소인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이지만, 그 이름의 뜻은 모든 사람을 먹이는 ‘떡집’(place of bread)입니다. 메시아가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예언이 있어도, 시대의 어둠은 쉬이 걷히지 않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시대는 진통을 거듭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평화’는 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언자 미가에게 베들레헴은 정의가 거꾸러진 위기의 시대에 평화를 가져올 장소입니다. 그곳은 구원이 시작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는 곳입니다. 낮고 작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몸이 뛰논 해방의 사건 / 누가복음 1:39-45]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기가 막힌 일을 당한 마리아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는 죽음과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를 만나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태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 후에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39절을 보면,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갔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일어났다’고 한 표현, ‘아나스타사’(anastasa)는 죽은 상태에서 소생했다는 의미를 가진 낱말입니다. 소생한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기이한 경험을 한 것처럼, 이들 부부 역시 비상한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은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의 남편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를 맞은 엘리사벳은 그녀를 축복합니다. 경황이 없었을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어떠해야 성령이 충만해지게 되는 걸까요?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것은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자신의 뱃속에서 아이가 뛰노는 것을 느꼈을 때입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닌 체험이고, 이해가 아닌 사건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이 뛰는 사건을 엘리사벳이 체험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체험한 태동의 사건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영감어린 소통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예언과 축복을 말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축복은 이렇습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의 아이에게 임한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에 관한 사건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축복은 해방의 경험이요, 그녀의 아이가 누릴 축복은 해방을 몰고 오는 축복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마리아의 찬가’(46-55절)를 통해서 들려오는 해방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의 사건 전에 일어난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전해진 때는 로마의 식민지라는 참혹한 상황입니다. 지배자와 약탈자가 신이 되어버린 희망 없는 시대요, 구원과 해방의 소식은 요원한 신이 죽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믿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비전의 깊이입니다. 구원과 해방의 소식은 몸이 뛰는 사건이어야만 하고, 몸을 뛰게 하는 체험의 사건으로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필요한 믿음]
오늘날 한국사회와 교회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믿음이 아니라, 다가올 해방의 시대를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지 단지 비판하고 저항하기보다는 대안을 모색하여 실험하고, 의무와 속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보살피는 관계, 동경(憧憬)으로 이끌림을 받는 관계를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반도에 탈냉전의 흐름이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카이로스의 상황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여전히 냉전시대의 구습을 따라 행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촛불정부를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종하고 기득권 세력의 구태의연한 처신을 용납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민중들의 고통스런 외침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성주 소성리에 배치된 싸드는 시절을 모르는 듯 자기자리를 굳혀가고 있고, 자기 집과 땅을 빼앗긴 채 목숨을 위협당하는 사람들, 밀려나고 구속된 노동자들, 비정규직으로 삶이 고통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두 명의 노동자가 70미터 굴뚝에 올라 400일이 넘도록 ‘약속이행’을 외쳐도 외면당하고 있는 이 살벌한 시대에 우리는 묻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몸을 입고 오는가?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생명의 떡을 줄 오늘의 베들레헴은 어디인가?
이 질문은 제국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를 뚫고 간 믿음의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성경말씀에서 들었습니다. 낮아져서 서로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아픔 속에서도 우뚝 서 시대의 길을 밝히는 삶에 있습니다.
한 해를 지나온 지난 1년의 삶에 회한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부족하였던 것은 오시는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시고, 힘겨운 분투 속에 흘린 눈물은 주님의 위로를 통해 씻겨지기를 바랍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은 또 새로운 해에 얻을 은총을 위해 기대하며 남겨두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삶에 하늘의 위로와 희망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입힐 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낮은 자리에 몸을 입고 태어나 자신을 바쳐 하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위로와 희망이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