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상사디야~”
사무엘기상 2:18-20,26; 골로새서 3:12-17; 누가복음 2:41-52
오늘은 2018년의 마지막주일로 지키는 송년주일이며 마음 아프게도 우리 곁을 떠난 교우들과 가족들을 추모하는 성도추모주일로 드립니다.
마지막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생의 마지막의 자리에 희망을 보았던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오릅니다. 뉴욕의 예술가 거리에서 어느 겨울날 폐렴에 걸린 존시, 창밖의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져가는 것을 보며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삶 속에서, 그에게 희망을 준 마지막 남은 잎새. 존시는 몇일이 지나도 버티고 있는 잎새를 보며 강한 생명력의 희망을 보며 회복합니다. 그 이후 알게 되지요. 그 잎새는 늙은 주정뱅이처럼 보이던 무명 화가 베어만이 존시를 살리기 위해 혼신을 다하여 그린 생명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마음 아프게도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베어만은 폐렴에 걸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단편소설은 사람 사이의 인정과 애환, 시련에 맞서는 굳센 의지 등을 통해 삶에 대한 희망을 다루고 있기에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살면서 희망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고통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주간 20일에 유성기업의 오동환 조합원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먹먹한 삶에 대해서 함께 하지 못함과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유서의 내용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섰다고 하지요. 죽음이 바로 알려지지 못한 것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연락할 수가 없어 장례를 가족끼리 치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측의 노조파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희생자들 앞에 그저 빚진 자처럼 살아간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로 지난 11일 새벽에 안전 규정이 지켜지지 않은 채 홀로 투입돼 밤샘 근무를 하다가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채 발견된 김용균 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지난 27일에는 위험의 외주화를 막자는 이른바 ‘김용균법’이 국회에서 처리됐습니다. 이 법은 원청업체에 무거운 법적 책임을 부여해 ‘죽음의 외주화’를 막고자 위험한 작업의 사내 도급이나 하도급을 금지하고, 산업 재해로 근로자가 숨지면 사업주 처벌 수위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故 김용균 씨 어머니가 남긴 이야기가 마음에 남습니다. “용균아, 다음에 엄마가 너한테 갈 때는 조금 너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 엄마 잘한다고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바쁘다고 놓쳐버린 삶에 한순간 순간에 대해 곱씹어 봅니다. 마지막은 언제나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 친구, 교우 등 만났던 인연과의 마지막, 시간의 마지막에 우리는 늘 아쉬움과 미안함과 그리움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만날걸, 더 열심히 이야기할 걸, 더 많이 사랑할 걸...
2018년의 한 해 어디에 집중하고 살아가셨습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지쳐서, 혹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마음으로 흘려보내지는 않으셨는지요? 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중한 순간 순간을 알아차리며 지냈던건 얼마만큼 이었을까요? 이제 내년이면 한 살 더 먹는구나하고 한숨을 푹 쉬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어떤 분들은 2018년 남은 날이 더없이 느리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습니다만, 어찌보면 숫자로 나눠진 것에 불과한 2018과 2019라는 시간의 경계선에서 아쉬움으로 시간을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겠지요.
[현존하기]
올 하반기에는 청년신도회에서 몇몇의 교우들과 ‘현존수업’ 책을 읽으며 현존수련을 함께 해보았습니다. 10주 동안 우리 안의 억압된 차단된 생각과 힘들을 통합할 책임으로서 자신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현존수업의 핵심은 의식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가에 혼탁하게 빠지지 않고 온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가장 우리다운 날 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현존의 날을 매일 느껴봤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사무엘과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삶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의 본문은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엘리의 아들들은 큰 죄를 짓고 살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나의 간절히 염원으로 선물처럼 태어난 사무엘, 그는 하나님이 주셨기에 주를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어릴 때부터 엘리의 문하생으로 제사장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 중에 엘리의 아들들에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제사 규정을 위반하고 불법과 부패함을 저지르며 그들의 직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패역한 이들이었음을 폭로합니다.
반면 사무엘은 제사장이 되는 훈련을 차근차근 밟아갑니다. 어머니 한나는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 때마다 사무엘을 위해 그가 자라는 몸에 맞춰 사랑가득 담긴 작은 겉옷을 지어다 줍니다. 여기에서 이 작은 겉옷에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겉옷은 제사장이 의무를 수행할 때 입는 예복일 것인데, 사무엘은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으면서 스스로 탐욕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할 길과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받는 존재로 가장 자기다운 존재로 말이지요.
[선택과 집중]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으로 네 복음서중 루가의 자료로만 나와 있는 어린 시절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었을 때 유월절을 맞이해서 가족과 친지들 모두 예루살렘에 가서 있다가 부모는 예수가 친지들과 같이 오겠거니 하다가 오는 길에 확인해 보니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부모는 허겁지겁 걱정근심으로 예루살렘을 다시 돌아가서 결국 삼일만에 예수님를 성전에서 발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근심담은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어찌 성전에서 이러고 있는가? 그런 중에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를 찾고 계셨던 것입니까?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예수의 대답은 당황스럽고 섭섭하기 그지없는 답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연상을 해보았습니다. 성실하고 착한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이 늘 궁금하고 생각하고 몰두하는 힘이 강해서 부모와 예루살렘을 가면서도 여기저기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할때에는 골똘히 고심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도 하면서 친척들과 지인들 사이를 잠시 멈췄다가 따라오면서 집중력을 보인 예수님.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힘 예수의 독특한 매력이 증폭된 곳이 성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곳에서 스승들에게 자신이 궁금했던 것들을 묻고 하늘의 뜻을 찾는 매력에 빠진 선택과 집중의 힘을 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승들 옆에 붙어 있으니 그들에게는 예수가 신통방통하여 밥을 사주기도 하고 잠을 재워주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원래부터 완벽한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뜻을 쫓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과정이 결국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한 길로 안내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2018년을 보내고 2019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삶으로 가고자 하십니까? 오늘 주어진 골로새서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평화의 존재]
골로새 공동체는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이 서로 뒤섞여 있었는데, 이단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단 추종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을 매우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결국 인간들을 지배하는 황홀하고 신비스런 세계를 따르게 하고 공동체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서로간의 불화와 싸움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때에 공동체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갈 것인가를 확연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평화를 누리도록 한 몸이 되었던 이 공동체. 그 평화란 그리스도와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답게 겸손함, 동정심, 친절함, 온유함,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납해주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평화의 존재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를 용서하고 평화를 누린다? 이것은 단지 좋은게 좋은거지 하고 과거를 덮어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내가 과거에 매여 살면서 부정적인 힘을 가지고 답답하게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화하여 새로운 눈으로 삶을 새롭게 보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골로새공동체에게 보내어진 편지의 내용처럼 우리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인도 뭄바이 관구의 예수회 신부인 앤서니 드 멜로 신부가 지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실례합니다.”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 이제 그만 멈추어라, 어린 물고기야. 네가 찾으러 다닐 데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네가 할 일은 그저 눈뜨고 바라보는 일 뿐이리니...
우리가 가야할 바가 어디인가? 좀 더 좋은 공동체가 되고 싶다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어디서부터 바로잡고 시작해야 할지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정화: 호오포노포노]
올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제가 마음정리를 위해 실행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호오포노포노’입니다. ‘호오포노포노’는 ‘바로잡다.’, ‘오류를 수정하다.’를 뜻합니다. ‘호오’는 하와이 말로 ‘원인’을, ‘포노포노’는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고대 하와이인들에 의하면 오류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얼룩진 생각들에서 비롯된다고 보기에, 이 정화의 과정으로 우리 내부에 유독한 에너지로 인해 불균형과 질병을 유발하는 오류의 에너지들을 방출해서 신성한 생각과 말, 업적, 행동이 효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치유와 정화를 가져오는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네 가지 말의 힘을 믿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새겨 봅니다. 호오포노포노의 핵심은 ‘온전한 책임’과 ‘자신의 내면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기억들을 먼저 온전한 나의 마음으로 수용할 때 정화와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정화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간 교회 갈등으로 많은 분들이 힘들고 하고 상처를 받고 지쳐있기도 했습니다. 어느 것이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체이기에 아팠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의 아픔이 있습니다. 성도 추모주일을 함께 드립리는 이곳에 보낸이의 아픔 남아있는 이의 아쉬움과 다짐을 하게 되는 유가족들. 올해 떠나신 분들 그리고 사회적 불의에 의해 희생당하신 분들을 위해 함께 추모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토닥토닥 상사디야~]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는 우리 여기에 있기를 바라며 오늘 ‘토닥토닥 상사디야’로 정했습니다. ‘상사디야’는 농부가에 후렵구로 나오는 것인데요, 모여서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일하여, 결실을 맺으라는 주문이 담긴 말입니다. 농경문화 속에 두레, 품앗이처럼 노동의 힘겨움을 노래로 승화해 공동체성을 이루어가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노동요에서 창의된 상사디야는 배바지를 입고 허리 굽혀 일하는 사람들이 소리를 받아주고 넘기면서 힘든 노동을 인간미 넘치게 승화했던 상사디야를 오늘 외쳐봅니다. 이는 오늘 오후에 얼쑤주관으로 열리는 얼쏭굿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송년주일을 맞아 1부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2부는 함께 나눔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같이하였습니다.
2018년 한 해, 많은 일들이 오갔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귀한 길 가는 여정에 우리가 향린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알차게 결실 맺어갈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오늘을 그리고 2019년을 맞이해 가셨으면 합니다.
하늘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해 고생하신 모든 마음을 담아서 함께 평화의 길을 가자는 의미로 옆에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상사디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아침에 아름다운 태양이 떠오른다 해도
그대가 잠들어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아름다운 장미꽃이 바람에 춤을 춘다해도 그대가 잠들어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집중을 하든 안하든 그대는 잠들어 있다.
그대가 완전히 깨어나면 잠은 사라진다.
그대가 마음을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크나큰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가 그대의 집이다! 여기에 영원한 그대의 존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