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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 김희헌 | 2019-01-06

by 김희헌 posted Jan 06, 2019 Views 28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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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1-06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사 60:1-6, 엡 3:1-12, 마 2:1-12) 

2019.01.06 (주현절)

 

[장자의 꿈과 믿음]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예배드리니 기쁩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로는 주현절입니다. ‘주현(主顯)’이라는 말은 ‘주님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때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주현절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서방의 가톨릭과 개신교회는 주현절의 의미를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한 이야기에서  찾았고, 동방의 정교회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그 의미를 찾았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지만, 본뜻에서는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이 어두운 세계에 하나님이 활동하는 모습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단 말입니다. 

새해에는 저마다 새로운 약속과 다짐을 하게 되지요. 우리 교회는 새해 첫 주일에 「십자가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당 앞 벽에 자기 십자가를 다는 예식을 합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키워가기보다는 민족의 수난과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동참하며, 민족과 민중 앞에 부끄럽지 않는 교회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다짐이요, 믿음의 참 된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의 고백과 다짐에 하나님의 꿈과 계획이 담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권력과 돈에 종속당하면서 하나님나라의 꿈에서 멀어져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앙 역시 변화의 힘을 갖기보다는 삶을 꾸미는 장신구처럼 되었습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로 구성된 생명의 근원적인 동력을 잃고, 사소한 것에 잡혀 살아갑니다. 

그렇게 된 것은 분명히 종교 자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세계가 몇 백 년 동안 자본주의라고 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돈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돈이 목적이 된 사회 체제를 당연시해왔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경제적 양극화가 버젓이 활보하는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밟고 살아가는 경쟁적 삶이 사회를 파괴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습니다. 돈이 사회적 신분이 된 세상에서는 가장 순수한 젊음의 열정과 삶의 가장 소중한 몸짓은 모두 맘몬의 제물이 되어 바쳐집니다.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단지 이기적인 동물일 뿐이라고 비관하고, 사회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이해되면서, 이웃과 함께 생명의 공동체를 건설해가려는 인류의 꿈은 아득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표를 잃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은 승리했든 패배했든 모두 병들고 지쳤습니다. 승리한 개인은 공동의 자산을 약탈하는 지식에 중독되어 병들었고, 패배한 개인은 공동의 꿈이 파괴된 이 세상에 지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배워가는 게 무엇인지, 그렇게 해서 획득한 지식을 과연 무얼 위해 사용하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기원전 4세기에 맹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 가운데 장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시대를 깨우치기 위해서 사용했던 표현을 아마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표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할 수 없고, 여름에만 사는 곤충에게는 얼음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없으며, 편협한 사람에게는 진리의 세계를 설명해 줄 수 없다.” (장자, 「秋水」)

장자는 ‘우물 안의 개구리’를 탓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깨우치려고 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암울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보면, 장자는 은(殷)나라 유민들의 고장 몽(蒙) 출신이었고, 약소국의 모진 현실에서 비애와 고통, 배고픔과 유랑으로 얼룩진 세상을 극복하는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어두운 시대를 헤쳐가기 위해선 제도개혁만이 아니라, 마음의 뜻과 기상을 더 높이 솟아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영복, [강의], 320)

그래서 그는 광활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갖도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 한계에 갇힌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담대한 도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가운데 장자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북쪽 바다 깊은 곳에 곤(鯤)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에 이르렀으니 한반도만한 물고기였던 것이지요. 이 곤이라는 물고기는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억 년에 한 번 올만큼 큰 홍수가 날 때는 깨어나서 물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 오릅니다. 수면을 박차고 솟구치면 지느러미는 날개로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했답니다. 그 새도 몇 천 리가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한번 하늘로 오르면 온 세상을 덮는 구름처럼 보였겠지요. 작은 바람으로는 이 새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듯한 거대한 태풍이 불 때, 이 새는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구만리장천을 등에 지고 거침없이 날아서, 하늘 못이라고 불리는 남쪽의 깊은 바다로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세상에 허풍도 이런 허풍이 없을 정도로 과장이 심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통해서 장자가 강조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대담한 생각과 드높은 이상입니다. 그런 높은 생각과 이상이 있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서 새로운 삶이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오늘 성서의 이야기는 장자보다 스케일이 크진 않지만 그 관심의 폭과 요청의 강렬함은 못지않습니다. 

 

[두 유형의 삶 / 마태 2장 1-12절]

마태복음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방박사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동방박사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들과는 대조된 모습을 가진 헤롯과 당시 사회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하늘의 징조’를 대하는 두 종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반면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 생각에 갇혀서 다가오는 시대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보게 합니다.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으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고 있음을 느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마고스(μάγος)’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magic이 생겨났는데, 근대과학의 시대를 거친 오늘날 ‘마법’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들을 ‘지혜로운 사람(wise m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지혜로운가? 그들은 별을 본 사람들입니다. 별만 본 것이 아니라, 별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의 징조를 봤습니다. 이전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음을 본 것입니다.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별을 따라나섰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새 시대를 향해 나선 그들에게는 현실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헤롯을 찾아가 물었던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위험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새 시대의 징조를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그러자 헤롯의 속임수도 그들을 해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한 후에 안전하게 돌아갑니다. 거룩한 계시가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증언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그 시대를 지배한다고 여긴 헤롯을 보십시오. 그는 시대의 징조를 느끼지 못하고, 새 시대를 여는 왕이 왔다는 소식에 당황합니다. 헤롯과 그 주변의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책을 뒤적이며 답을 구하거나, 수동적으로 ‘별이 나타난 때를’ 물을 뿐입니다. 그리고 속임수로 위기를 넘기려고 합니다. ‘가서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고, 찾거든 나에게도 알려주시오. 나도 그에게 경배하고 싶소!’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것은 경배하기보다는 미래의 싹을 제거하려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시대를 거짓과 속임수로 대처해야 했던 불운한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새 시대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새 시대를 알리는 별의 징조를 따라 자신의 몸을 움직인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가오는 시대의 싹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전진하는 우주와 맞서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갑니다.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 이사야 60장 1-6절]

장자보다 약 1세기 가량 앞서 살아간 사람 가운데 이사야라고 불린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이백 여 년 전에 살아간 한 예언자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는 바벨론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폐허가 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참혹한 포로생활의 경험이 예언활동의 배경이 되지만, 그는 버림받았다는 패배감을 떨치고 몇 백 년 후 예수에게까지 이르는 해방의 사상을 설파합니다. 

오늘 읽은 60장에서부터 62장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렀음을 노래합니다. 61장 1-2절은 예수님의 취임설교 본문으로도 사용된 위대한 노래입니다. 이사야는 크레센도의 방식으로 점점 더 크고 확연하게 다가오는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더듬어 살아가야했던 사람들입니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폐허가 된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바칠 정성과 경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예언자는 앞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이것은 형편이 좋은 사람들에게 주는 권고도 아니요, 너그러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제도가 갖추어진 때에 나온 제안도 아닙니다. 당시의 상황은 ‘정의는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아득해졌으며, 진리는 바닥에 떨어졌고, 올곧음이 발붙이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사 59:14)

모두가 어둡다 하던 때에 이사야는 다른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0장 2절을 보면, 이사야는 ‘야훼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고,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처럼 큰 별의 징조를 보고, 그것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 왜냐하면 너의 빛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Your light has come)’ 

한글성서의 번역은 좀 아쉽습니다. 1절은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고, 3절에서는 ‘이방나라’라고 번역해서, 자칫하면 이사야가 배타적인 시오니즘(zionism)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성경 원문에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없고, ‘이방 나라’로 번역된 ‘고임(gōw·yim)’이라는 단어는 ‘뭇 민족’(nations) 또는 ‘민중’(people)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외침은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자고 모두를 향해 부르는 소리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4절에서는 ‘눈을 들어라. 그리고 둘러보아라!’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장자의 언어로 말한다면, 아무리 시대가 어둡다 해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의 후손들이 환멸을 느끼면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너의 품으로 안겨 올 수 있도록 정의와 진리가 생동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삶을 가리켜 이 역사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해처럼 떠올랐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신의 영광’이라는 이 시적인 표현은 계속해서 오해를 낳았습니다. 제국의 지배논리로 해석되기도 했고, 민중 해방의 논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저의 것인지, 하나님의 것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막 12:27)

오늘날 우리 역시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도대체 어디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지, 새 시대를 알리는 별의 징조를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사도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로 대답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 하나님의 계획, 에베소서 3장 1-12절]

바울은 에베소서 3장 9절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있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비밀’(mystēriō tou Christou)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내용은 6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도 한글번역에 부적절한 의역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6절에 ‘유대사람’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gentiles)’이라고 번역된 ‘에쓰네(ἔθνη)’라는 단어는 ‘뭇 민족(nations)’으로 이해하는 것이 뜻을 더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6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뭇 민족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상속자(synklēronoma)가 되고, 한 몸(syssōma)을 이루며,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symmetoka)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자’는 문명사적 의미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폭력의 시대에 평화를 얻고 정의를 이루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소유와 정복 관념을 이겨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이 함께 나누고 서로 살리는 상생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7절), 그 복음은 10-11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제 교회(ἐκκλησίας)를 통하여, 천상생활을 하는 통치자들과 권력을 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진 영원한 뜻(eternal purpose)’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의 계획’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8절에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보게 됩니까? 그것은 단순히 ‘예수 믿어서 천국간다는 식의 대속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 믿고 부자 된다는 세속신앙’도 아닙니다. 이 역사 속으로 화육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합니다. 뭇 생명이 정의와 평화를 누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돈과 권력에 길들여져서 영적 문맹에 빠진 사회, 세속적인 욕망으로 얼룩진 신앙을 가진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종교,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만이 아닌 바울 시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대비시킵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습니다 (8-9절). 다른 한편에는 마치 천상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지가 있으며, 그것을 깨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10절).

그렇다면 길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새로운 약속을 안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다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 하나님의 뜻 찾기]

새해가 되기 전에 해결되기 원했던 절박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70여 미터 높이 굴뚝에 올라 420일을 보내고 있는 두 명의 파인텍 노동자가 요청하는 소원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바라며 시작된 동료 노동자의 단식이 오늘로서 28일차가 되었고, 함께 한 목사, 신부, 시인, 인권활동가의 동조단식이 20일째가 되었습니다. 

수백억을 가진 사장은 자기 회사 노동자의 소박한 요구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수천 가지의 법을 가진 이 사회는 그 갈등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거대한 지각변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보안법에 걸릴만한 일들이 이젠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를 신문을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가운데, 남측에 구체적으로 제안한 유일한 내용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재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논란이 된 것은 그것을 꾸미는 문구였지요.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없이” 하자는 것인데, 여기서 특히 ‘대가없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를 두고 구구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목한 해석은 북한연구 학자였고 현재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인 김진향 님의 주장입니다. 그는 개성공단을 돈줄로 보는 남한의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구라고 말합니다. 개성공단 1년간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임금과 세금의 총액이 950억 원으로 1억 달러도 채 안 되는 반면, 남측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3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두고 북한에 돈을 퍼준다 하는 비난이 남측에 있었고, 더 근원적으로는 유엔의 제재로 인해 돈이 북한에 전달되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측에서는 1억 달러도 안 되는 그 돈을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댓가 없이’ 하겠다는 말에 대한 해석인데,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세계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애초에 개성공단을 열 때 북측이 최전선의 주력부대 6만 명의 병력을 송악산 뒤로 물리고 그 자리에 공단을 설립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과 북의 평화 지대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우물에 빠진 개구리는 돈만 봤던 것입니다. 

평화가 우선인가, 돈이 우선인가 하는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이 물음은 이미 다가온 남북 화해의 시대에는 가장 진지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는 평화의 초석을 온전히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남한 사회에 북한의 존재의미는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를 익숙하게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충격이 되겠지만, 돈이 지배하지 않는 사회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세계를 사는데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은 ‘평화를 위한 꿈과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고 외치며 새로운 문명을 일구려했던 한반도 민중의 일백 년 분투의 결실이 풍성히 맺히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이 이 역사에 드러나는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모두가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삶을 벗어나서, 평화와 사랑이 삶을 이끄는  세상을 위해 부름 받은 믿음을 따라, 담대하게 한 해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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