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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진리의 영이 오면 | 김희헌 | 2018-05-20

by 김희헌 posted May 21, 2018 Views 105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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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20

진리의 영이 오면 (2:1-21, 8:22-27, 15:26-27, 16:4b-15)

2018.05.20. 성령강림주일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김경재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포용적인 기독교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재준 목사의 평전을 쓰면서 대승적 기독교를 추구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대승적(大乘的)’이라는 말은 부분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대승 기독교는 신앙의 진리체험을 특정한 종교경험에 국한시키지 않고 역사와 함께 하는 호흡으로 확장한 기독 정신을 의미합니다. 금년에 탄생 100주년이 되는 기독교인 세 분이 있습니다. 문익환, 장준하, 서남동입니다. 이분들이 대표적인 대승적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역사와 우주의 커다란 수레바퀴를 타고 가겠다는 대승적인 포부를 잃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왜소한 교리나 이해관계에 매달리는 종교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은 이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체험을 한 신앙인이란 개인적인 거룩 체험에 도취해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체험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교회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짜낸 영성을 모아 뭉친 집단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인 변혁 체험을 통해서 서로 갱신되는 기쁨 속에 세워지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경험한 최초의 성령강림의 사건, 그 첫날 아침의 사건 역시 공동체가 함께 변화되는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나가는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그 사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갈릴리 사람의 하늘 소리를 서로 들음 / 사도행전 21-21]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었던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 아침에 제자들은 놀랍고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본문 2-3절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다음으로는 불길이 일 때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나타나서 각 사람들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이 시키는 대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성령강림의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아도 그 장면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성령체험에 대한 언어의 묘사로서는 이것이 최선일지도 모릅니다. 이 묘사에는 신비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장면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무엇이 핵심 사안이었을 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연결고리가 두 번 반복되고 있는 헬라어 글롯사’(γλσσα)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방언이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진 글롯사가 각 사람들에게 내려앉자, 사람들이 모두 글롯사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받아서 자기 것(방언)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성령과 사람(역사)이 이어진 사건이 바로 성령강림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결합되자,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글롯사로 말하기 시작하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지방의 로 듣게 된 것입니다 (8). 본문 9-11절에는 15개의 나라가 거명되어 있습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한 방언(글롯사)’최소한 15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 모두가 알아듣게 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이 체험은 놀라운 것이었고, 따라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널리 퍼져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주로 오순절’(Pentecostal)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인데, 이들은 소위 방언이라고 불리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떠드는 입신상태를 가리켜서 성령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하는 입신 현상은 기독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일상적인 종교경험 자체를 기독교적 의미의 성령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파의 주장이 방언체험의 겉모습에 주목하고 그 체험의 본래적 의미를 뒤집어버림으로써, 성령강림 사건의 뜻을 곡해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멀쩡하던 사람이 기도만 하면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그 진기한 모습에 주목 함으로써,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보다 핵심적인 의미 즉,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까지도 서로 알아듣게 된 소통의 사건에 대해서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에 주목했다면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개의 헬라어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의 말인 글롯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들은 귀에 전달되는 각 지방의 말인 디알렉토’(διάλεκτος)입니다.

7-8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여기서,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이란 디알렉토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강림사건이란 하늘에서 온 글롯사를 말할 때, 사람들은 각자의 디알렉토로 듣게 되는 놀라운 소통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해석이 생깁니다. 그것은 성령강림의 사건이 그 옛날 바벨탑 신화에 담겨 있는 언어분열사건 즉, 소통이 단절되어 반목과 전쟁이 시작된 그 비극적인 사건본래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던 상태로 되돌리는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올바른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성령강림 사건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하늘 체험을 한 사람들이 하늘 말(글롯사)을 하자, 세계만방의 사람들에게 각각 자기들의 모국어(디알렉토)로 또렷하게 들린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다락방에 모인 소수의 사람들이 글롯사를 말했던 사실’(4)이 아니라, ‘디알렉토를 듣는 것’(8)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이 들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지금 누구의 말이 들린다고 놀라워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면, 최초에 터진 놀라움의 표현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식민지 변방 수탈의 땅 갈릴리, 보잘 것 없어 무시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당대의 대표적인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남의 말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말(디알렉토)로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성령강림사건의 참 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최초의 성령강림절 아침에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말하는 행위’(lalein)에 있지 않고 듣는 행위’(akouomen) 있음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면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방언(glossa)을 말했지만, 거기에 놀라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8절을 보면,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dialecto)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놀랍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들이 방언(glossa)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놀랍니다.

그렇다면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하늘의 언어라고 여기며 떠들어대는 자기 유희에 있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에 갇혀서 알아듣지 못했던 저 고통의 사람들 갈릴리의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언어가 되어 들려오는 놀라운 사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만물의 본질이 참된 만남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 인간은 일그러짐 없는 만남 속에서 존재의 완전성을 경험한다는 진실과 연결됩니다.

 

[역사를 조롱하는 자들 vs. 하늘을 부르는 사람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이런 관계들,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일그러지는 데서 비롯됩니다. 관계가 망가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모종의 야비함과 비열함이 숨어있는데, 그것은 상대를 향한 직접적인 파괴행위에 있지 않고, 상대방의 가슴에 담긴 진리에 대한 조롱에 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기독교가 믿어온 힘과 번영의 신을 인류의 정신세계에서 제거해버린 철학자 니체가, 아무리 신은 죽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할지라도, 그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거나, 사람들이 그를 비열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5.18민중항쟁으로 사망한 시신을 빗대어 홍어택배를 운운하거나, 곡기를 끊고 진실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보란 듯이 폭식투쟁을 벌인 자들의 조롱은 잊기 힘든 비열함의 극치입니다. 그런 비열함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말을 나누고, 사람과 사람이 가슴을 열고 만나 갈릴리의 말을 듣게 된 그 성령강림의 새 아침에도 조롱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만남과 소통의 광장에서 그 무리들은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을 향해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하며 모욕합니다 (13). 오순절 아침 베드로의 첫 설교는 바로 이 조롱의 무리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읽은 본문은 예언자 요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의 영이 부어질 때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비전을 보고, 꿈을 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언과 비전과 꿈은 내일의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내일을 심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의 약속을 안고 오늘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정신적 알맹이가 예언이요, 비전이요,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인데, 아들만이 아니라 너희 딸들도 예언을 할 것이라는 약속, 하나님의 영을 자유민들만이 아니라 종들에게도, 심지어 여종들에게도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하늘 말이 되어 역사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안고 살아가는 현실은 그 진리가 진실할수록 혹독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네가 거기서 뛰어내림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보라조롱하는 무리에게 예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으로 답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존재의 고통역사의 비극이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욕당함으로써 밖에 자신의 진리를 입증할 길이 없는 존재와 역사의 비극적 숙명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에 담긴 고통을 함께 품고, 인류의 운명을 해방과 구원의 길로 향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는데, 성경을 그를 가리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눈을 조금만 높이 뜨면, 그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생생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가 변해서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해서 피가 될 것이라고 했던 요엘의 예언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낮의 진리가 조롱당하고, 밤의 진리가 살육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epikaleo)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구원이 비칩니다. (2:20-21)

그것이 베드로가 자신의 첫 번째 설교에서 말하고자 했던 하늘의 뜻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한 성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 / 로마서 822~27]

오늘 로마서 본문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가진 독특한 세계관을 증언합니다. 이들이 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첫 번째 특징은 고통의 연대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계현실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통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8:22-23)

그렇다면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선한 삶이란 고통을 함께 지는 삶이요, 악한 삶은 자기 고통마저도 남에게 전가하는 삶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현실세계에 죄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세계의 질서를 형성하는 방식이 자기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남에게 자기 고통을 전가시킨다는 말입니다. 인류가 원죄를 안고 있다는 말은 아담의 피가 유전된다는 생물학적인 요인에 관한 말이 아니라, 아무리 자기 혼자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남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그 죄악의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탄식했지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7:24)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몸이 구원(apolutrosis, redemption)을 얻기를 바라며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선한 삶을 살려고 하여도, 우리의 도덕적인 선택이 죽음의 몸이라는 존재의 운명에 갇혀 있고, 남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죄악의 시스템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사실 대부분의 현실윤리가 좌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음하는 현실에서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elpis)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믿음의 끈질김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묶인 현실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지치지 않게 끌고 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시대의 율법이 만들어놓은 체제 속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속에서 무언가를 획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빤한 길은 믿음 없이도 가고, 영이 없어도 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기보다는 욕망이요, 성령이기보다는 잡령입니다.

바울이 본문 24절에서,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하고 말하고 있는 데, 이 말은 신앙의 긍지를 표현합니다. 이 표현에는 역사 속에서 절대자의 숨결을 느끼려는 긍지의 정신이 벌이는 몸부림이 담겨있습니다. 그 몸부림을 얽어매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동행하는 소망의 사람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와야만 할 것을 끈질기게 추구합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가리켜, 참으면서 기다릴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늘이 손을 내밀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 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실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맹목적인 피조물 의식이 아니라, 지극한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긍지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이 위대한 신앙의 역사에 빚진 것이요, 바울의 위대한 믿음 역시 예수가 보여준 위대한 삶에 빚진 것입니다. 삶이 위대하지 않다면 정신이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갖게 되는 위대한 정신은 모두 위대한 역사에 빚진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 요한복음 15:26-27, 16:4b~15]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불가(佛家)의 선문답 같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에게 갈 것이고, 자신을 대신하여 보혜사 즉, 진리의 영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만 유일하게 성령을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표현하는데, 한글성경은 그것을 음역(音譯)하여 보혜사(保惠師)’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협조자(Helper), 조언자(Counselor), 지지자(Advocate)로 해석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음서 기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보혜사가 오심으로써 벌어질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본문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이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합니다.

먼저 1526절에서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16:8절에서는,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요, 13절에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 증언을 통해서 이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도록 이끄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준 충격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그 삶에서 비롯된 두 가르침에 사이에서 동요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세상을 이겼다는 믿음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랑으로 인해 미움과 고통을 당했다는 패배감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 둘 사이에서 늘 불안하게 동요했습니다. 그 동요를 극복하지 못할 때 기독교는 영광의 종교가 되기를 갈망했고, 그 동요를 이겨낼 때 기독교는 기꺼이 십자가의 종교의 길을 걸었습니다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 맘에 일어나는 동요를 걷어내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강림절 기간을 지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모두 예수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민중들의 목소리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게 하는 분이 성령이요

진실을 조롱하는 풍조와 세태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부르짖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도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 속으로 인도받을 것입니다.

그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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