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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생명의 샘물 | 김희헌 | 2019-05-12

by 김희헌 posted May 12, 2019 Views 29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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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5-12

생명의 샘물 (9:36-43, 7:9-17, 10:22-30)

2019.05.12 / 부활절 4, 어버이주일, 교회창립66주년기념주일,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포용력 있는 종교정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생명을 전해주시고,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부모님들의 헌신으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지어졌고, 베푸신 사랑에 힘입어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창립 66주년을 맞아, 신앙의 어버이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나라의 운동에 합당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바치신 노고와 정성으로 인해 올곧고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6년 전,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발표한 문서, 교회갱신과 사회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은 모두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예배문화와 교회개혁으로서, 모두 1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항목은 다원적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루고 있는데, 그 일부를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이 이웃 종교와 대화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은 세상의 다양한 삶과 신앙, 가치들을 포용할 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포용과 연대의 정신을 담아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현수막을 교회 마당과 조계사 입구에 걸었습니다. 배타적 정신에 잠긴 기독교인들은 이단이라고 호들갑을 떨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예수의 뜻을 이어가는지는 깨인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종교는 과거의 교리를 반복하는 종교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껍질을 깨뜨리며 자라나는 종교입니다. 새롭게 지어지는 세계를 자기 안에 담아가는 포용성을 갖추고,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이웃과 연대하는 개방적인 종교만이 자긍심을 가진 굳건한 믿음의 전통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드넓은 포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독선적인 태도로 갖거나, 타자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소극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자기 믿음의 논리’(logic of faith)가 유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강건한 종교는 자기 종교에 대해서 헌신적일수록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과 개방성을 갖도록 이끕니다.

만일 우리가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발전시켜온 성서의 정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웃 종교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포용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믿음은 남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정신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믿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종교만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성의 표현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품에 담겨있고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증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편할 대로 성서구절을 취사선택하거나, 편협한 자신의 생각으로 성서를 끌어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정신을 올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성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신앙공동체가 갈수록 크게 외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침내 예수에 이르러서 증언되는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만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민족을 적으로 여기는 편협한 신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자신의 품에 안고 기르시는 분입니다. (4: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포용성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를 향한 믿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고 여기는 생각은 아직 부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자체가 이웃종교를 포용하고 연대하도록 만드는 믿음의 논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적인 변화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보는 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공동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분을 증언할 수 있는 종교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용과 포용의 정신이 오늘 우리 사회에도 필요합니다. 지금의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으로 빚어진 갈등과 대결의 시대를 끝맺으려는 역사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촛불혁명의 위대한 경험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시대에 이권을 누린 세력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 와중에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가 일어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항쟁을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역사를 기억하고, 그 뜻을 잇는 노래를 불러야 할 과제를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역사의 방향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그 뜻을 구현할 제도적 장치나 사회적 감각이 아직 부족한 상황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역사의 모험은 계속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교회의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회선교와 교회개혁에 뜻을 둔 진보적 교회로서의 전통과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방향을 따라 살아갈 지혜와 힘과 감각을 갖추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창립정신에 담긴 신학적 이상과 공동체적 헌신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도 생동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봉헌절에 있었던 논쟁의 의미, 요한복음 1022-30]

오늘 성서본문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수전절(修殿節), 즉 성전봉헌절(the feast of dedication)에 있었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재건’(再建) 또는 봉헌’(奉獻)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엔카이니아’(ἐνκαίνια)로 불리는 이 절기는 오늘날 하누카로 알려진 유대인들의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보다 약 이백년 전에 있었던 유대독립운동인 마카비 혁명의 결과로 생겼는데,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에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지중해 동부지역을 통일시키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작은 나라의 도시 예루살렘에 대한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 번은 안티오쿠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에서 열병식을 하고, 성전에서 제우스 신을 위한 제사를 드리며 유대인을 모욕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의 누적된 반감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3년간의 항쟁 끝에 유대지역은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교의 제단으로 변한 성전을 정화하여 새로 봉헌하는 예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누카, 즉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성전봉헌절입니다.

본문을 보면, 성전에 관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 절기에 긴장감을 가진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발단은 예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의 회랑을 걸으면서부터입니다.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라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해주시오.’ 이것은 위험한 요청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정치범으로도, 신성모독의 죄인으로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았다. 그것은 너희들이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나를 알고 따른다. 나는 내 양들에게 영생을 주고,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크시니, 아무도 내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유대인들을 격분시켰습니다. 뒤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솔직한 답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는 예수의 답변을 듣고 생긴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옹졸한 생각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전봉헌절이라는 배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logos)이요, 생명(zōē)이요, (phōs)입니다. (1:1-5)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설정한 상황은 성전봉헌절에 솔로몬 회랑을 걷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성전종교를 향한 심각한 물음이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성전에 있어 할 참된 말씀인지, 무엇이 생명을 밝힐 빛인지를 묻는 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힌 예수님의 대답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훗날 삼위일체 교리가 될 하나님과 예수의 동일 본질’(homoousia)에 관한 주장도 아닙니다. 만일 그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본문에 사용된 단어가 남성형이어야 한다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Gail R. O’Day, The Gospel of John, vol. 9 of New Interpreter’s Bible, 667)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를 뜻하는 말로 ‘hen’(ἕν)이라는 중성형 단어가 쓰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상태를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온전히 하나가 된 삶과 믿음,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여기서 혁명적이라 함은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 솟구치고 자라나는 생명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이 혁명성이 성전종교와 갈등을 빚고, 심지어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전봉헌절에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산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 살림운동의 확장, 사도행전 936-43]

사도행전의 본문은 예수공동체가 벌이는 생명운동에 관한 증언입니다. 다비다를 되살린 이 이야기는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운동이 성장해가면서 그 생명살림 활동이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살렘에서 성령 체험을 한 신앙공동체는 어려움 속에서도 점차 확장되어갑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먼저 빌립 집사를 통하여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고,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도 전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을 하여, 거꾸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살려냅니다. 마침내 로마제국의 군인과 그의 가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합니다. 이로써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위한 모든 여건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운동이 점차 확장되는 맥락 가운데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이야기는 예수공동체가 예언 전통을 완전히 계승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왕상 17:17-24), 그의 제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냈던 것처럼 (왕하 4:19-37), 베드로는 이 위대한 예언자들의 능력을 계승합니다. 이로써 성서는 성전종교로 인해 막혔던 예언전통이 예수운동 안에서 회복되어 다시 이어지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다비다가 되살아난 이 이야기는 예수공동체가 가진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다비다에 대한 묘사는 독특합니다. 본문은 성서에서는 유일하게 제자’(mathẽtria)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이 여성의 그리스식 이름만이 아니라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했다는 이력까지 소개합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녀가 생전에 만들었다는 겉옷과 속옷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일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베드로가 올린 기도만이 그녀를 되살려냅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사건 이후에 취한 베드로의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다비다의 집에 머물지 않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무두장이(βυρσεύς, tanner)율법이 불결한 일로 취급한 죽은 짐승의 가죽을 가공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 집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율법의 틀을 깨뜨리고, 그 경계 너머의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옛 경계를 넘어설수록 신앙공동체는 더욱 확장되어 갔습니다.

지중해의 항구도시 욥바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운동을 더 넓게 펼치기 위해서 더 낮은 곳을 향해 갔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은 그들의 삶에서 생동하였고, 그들이 삶을 낮출수록 복음의 힘이 미치는 영역은 넓어졌습니다.

 

[생명의 샘물에 이른 사람, 요한계시록 79-17]

지난 삼 주 동안 마지막 본문으로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을 올바로 얻기 위해서는 먼저 널리 퍼져있는 오염된 해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교회는 극단적인 관념 신학에 아직도 빠져있는 곳이 많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실제로 나오지도 않는 적그리스도휴거와 같은 이야기에 정신이 나가버린 경우입니다.

이러한 성서해석이 가진 가장 해악적인 측면은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을 거꾸로 뒤집는데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문화에 대한 저항과 대안적인 삶을 촉구하는 계시록의 근본 가르침을 말살하고, 그 자리에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를 옹호하며 기독교 신앙을 공포로 채색하는 기만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계시록이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개의 개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린양증인입니다. 이 둘은 로마제국이라는 사탄의 체제에 순응하거나 동화되지 않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죽음의 체제 속에서 생명의 샘물을 찾는 이, 생명의 샘이 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계시록 7장은 지난주의 본문인 계시록 511-14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이 경배 받을 대상인 어린양에 주목했다면, 오늘 본문은 어린양을 경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정체성에 주목합니다.

어린양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두 집단입니다. 한 집단은 오늘 본문 직전에 나옵니다. 4~8절을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이천 명씩 선택된 십사만사천 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른 한 집단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 민족주의적 경계를 벗어나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에서 나온 셀 수도 없을 만큼 큰 무리입니다. 이 무리는 고난당한 약자들, ‘오클로스’(ὄχλος)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힘과 어린 양 사이의 갈림길에서 어린양을 경배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집단 가운데 누가 새로운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십사만사천의 유대인이 아니라, 뭇 민족에 속한 고난당한 오클로스들이 바로 그 주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고 이마에 도장이 받기보다는, 어린 양의 고난에 참여하여 어린양이 흘린 피에 자신의 옷을 빤 사람들입니다.

욕망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통과하며 큰 고통당했지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 시대를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어린양이 목자가 되어서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의 인도를 받은 그들은 생명의 샘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시고, 마침내 그들이 일구는 공동체 자체가 생명의 샘이 되게 할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의 창립 66주년을 기념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도 어린양의 길을 따르며 생명 샘물이 흘러넘치는 공동체를 일구어갈 것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향린답다는 말이 단지 진보적 교회로서의 방향만 잡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샘물을 서로에게 먹여주는 살림의 능력을 갖춘 삶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목마른 시대를 해갈하는 샘물이 되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 삶에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낡은 율법에 갇히지 않고 어린양 예수의 길을 걷는 삶에는 생명의 샘물이 흘러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의 어버이들이 물려준 신앙의 전통을 따르며, 목마른 시대에 샘물이 되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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