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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성령이 이끄는 삶 | 김희헌| 2019-06-09

by 김희헌 posted Jun 09, 2019 Views 474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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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6-09

성령이 이끄는 삶 (11:1-9, 2:1-21, 14:8-17)

2019.06.09 / 성령강림주일, 6월 항쟁 기념주일

 

[성령과 역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이 역사와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을 둘러보면 성령강림절의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처럼 느껴집니다. 삶은 무겁고, 사회적 모순은 누적되어 역사의 발걸음이 더디기만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에 관한 상상력은 고갈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영적 고갈상황은 보다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근대과학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영적인 존재에 관한 믿음은 미신처럼 취급되었고, 정신적인 것들은 물질 운동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회적 관계가 물질적 이해관계 속으로 촘촘히 짜여가면서, 숭고한 정신이나 거룩한 경험에 관한 감각은 대부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돈의 영향력이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하면서 하늘에서 이는 거룩한 바람에 이끌린 삶에 관한 기대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자본의 하위 개념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성령강림의 경험을 말하는 것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십니까? 오순절 교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성령체험을 은사운동, 그 가운데 특별히 방언에서 찾습니다. 그런 생각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대부분 틀립니다. 주술시대의 종교부터 다원주의 시대의 많은 종교에 이르기까지 방언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종교현상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성령강림의 핵심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고전 13:8, 14:19)

기독교에서 오순절운동이 등장한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기성교회가 이성적 교리를 중시하는 관념 종교로 굳어가면서 메마른 심성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오순절운동은 믿음의 지성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오순절 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대해 민감했기 때문에 기독교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교회를 보수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종교가 되었든 정치가 되었든 보수적인 집단들의 문제는 허용되어진 것장려될 것을 혼동하는데 있습니다. 방언 체험을 중시하는 종교가 역사 속에서 그 기능을 다했다 할지라도 아직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미래를 위해서 장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안검사 출신의 정치인이 한 정당의 대표가 된 것은 분단국가에 누적된 여러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허용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낡은 가치관을 마치 장려되어야 할 무언가로 주장하는 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가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보수의 문제는 허용된 것을 장려될 것으로 여기는 착각에 있습니다. 그것은 누려왔던 기득권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과거의 지배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역사를 짓기 위해서는 과거가 물려준 힘을 남을 지배하는 데 쓰기보다는 새 시대를 열어가는 동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예언이요, 꿈이요, 비전이라 하겠는데, 성령강림 사건은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에 드러난 성령강림 사건 가운데 하나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십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군부독재의 시대를 종결지었습니다. 이어진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마치 민중의 시대를 예언하고 민중의 꿈을 이루어갈 하늘의 징조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사회의 <87년 체제>는 많은 것을 이루었고, 또한 많은 한계를 남기며 또 다시 들려올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했습니다. 6월 항쟁이 성령강림의 사건인 까닭은 역사변혁의 바람을 일으키는 꿈의 거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의 성경말씀은 언어와 관련된 짝을 이루는 본문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신화는 언어의 분열에 관한 이야기, 사도행전 2장은 다시 언어가 이어진 소통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새로운 삶을 짓기 위한 공동체적 실험을 하는 사람들의 등장에 주목합니다.

 

[바벨탑 신화의 가르침, 창세기 111-9]

먼저 창세기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에 이르고자 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류문화사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J. G. 프레이저, [인류민속학], 320-38) 성서에 나온 바벨탑 신화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단계로 나눠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바벨탑 신화 자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이 신화를 전해주는 성서의 의도와 가르침에 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우리는 먼저 사람들이 탑을 쌓으려 한 이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여기에는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요소인 욕망과 두려움이 서로 얽혀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탑을 세워 도시문명을 이루고자 했던 첫째 이유는 서로 흩어지지 않으려는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는 동력을 욕망에서 찾았는데, 그것은 탑을 하늘에 닿도록 쌓아서 이름을 날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되어 건설된 문명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과 두려움이 문명의 얼굴이 되고, 그 문명을 만드는 노동의 주체는 이름 없이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은 우화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이 지은 탑과 도시를 보고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며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이제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뒤섞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기서 신이 가진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서로 공모할 수 있는 근거인 단일한 언어 자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언어를 도구로 하여 실현되는 잘못된 욕망, 즉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날리려는 인간의 욕망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을 불쾌하게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유한한 존재가 하늘에 이르려고 하는 모습이 신에게는 노골적인 반역처럼 보였기 때문일까요?

신화적인 세계관에서는 그런 인간의 욕망이 신에게 불쾌했을 수도 있겠으나, 오늘날에는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성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것을 전달하는 성경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1장부터 시작된 여러 신화들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탑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여 원()역사로 불리는 신화적인 서술은 끝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믿음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 전체적인 구도가 바벨탑 이야기를 전하는 성서의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바벨탑 신화의 배경은 위대한 문명과 장엄한 신전을 가진 고대 바빌론 지역입니다. 그 문명의 긍지가 바빌론이라는 이름 즉, ‘신들의 문’(the gate of gods)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이름을 혼란과 뒤섞임이라는 뜻으로 번안하여 부름으로써 그 거대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로 그 문명권에 속한 지역을 떠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아브라함의 등장을 준비합니다.

아브라함이 새로 써갈 역사는 인류가 걸어갈 새로운 길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욕망으로 뒤섞인 문명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린 삶이 써가는 새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은 도시문명의 위용(偉容)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으며, 믿음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이 성서 이야기의 구도에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오순절 사건의 실체와 의미, 사도행전 21-21]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가 머금고 있는 비극과 파괴성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욕망이 뒤섞인 바벨탑의 문명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등장이 오늘 사도행전 본문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1-13)는 오순절 아침에 발생한 사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후반부(14-21)는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부활 이후 오십일이 지난 날 아침에 벌어진 사건에 관한 본문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제자들과 신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하늘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소리가 나며, 불길처럼 갈라진 ’(glossai)가 나타나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방언’(glossai)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지방의 ’(dialecto)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느낀 당혹감은 8절에 이렇게 표현됩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그렇다면, 오순절 사건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불의 혀와 같은 것이 각 사람에게 내리자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방언이 열다섯 지역에서 온 서로 다른 사람들의 귀에 각 지방의 말로 들린 것입니다.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헬라어 단어는 두 개입니다. 3절과 4절에서 혀와 방언으로 번역된 글롯사’(γλσσα)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6절과 8절에서 지방의 말로 번역된 디알렉토’(διάλεκτος)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글롯사가 내려와 각 사람에게 임하자 사람들이 글롯사로 말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각자의 말 디알렉토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놀란 지점은 글롯사로 말한 것이 아니라 디알렉토로 듣게 된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하는 오순절 사건의 핵심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의 발설행위에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귀에 모두 모국어로 들여오는 신묘한 의사소통 현상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어떤 사람은 놀라서 어쩔 줄 몰랐고, 어떤 사람은 술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베드로는 그 일이 아침부터 술 취해서 벌어진 해프닝이 아니라,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요엘의 예언은 두 가지입니다. (17-21) 하나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남녀노소 모두가 예언과 환상과 꿈을 말하고 보게 될 것이요, 또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어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를까요?

여기에 오순절 사건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공포와 욕망이 뒤범벅이 된 당시의 로마 식민 질서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믿음의 공동체, 예언과 환상과 꿈의 사람들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바로 이들의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 그 예언과 환상과 꿈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는 거룩한 영에 대한 체험 사건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기적에 관한 관찰이 아니라 소통과 합일의 체험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늘로부터 얻은 말씀(글롯사)을 통하여 예언과 꿈으로 서로 이어줄 말씀(디알렉토)을 얻는 소통의 사건이 오순절의 성령체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사건은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의 화산맥을 타고 흐르며 분출됩니다.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는 하늘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처럼 마치 성령이 이끄는 듯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시대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독재와 불통의 시대를 종결지은 6월 항쟁이나 촛불혁명의 때에는 마치 하늘의 글롯사’(불의 혀)가 내려와 온 거리에 일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성령체험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공포와 욕망이 난무하는 세계에 몸이 잠겨 탄식합니다. 어디에서 하늘의 말씀, 시대의 예언과 꿈을 찾을 수 있냐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요청, 요한복음 148-17]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은 빌립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빌립이 말합니다. ‘주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래야지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 이 요청은 빌립의 입을 빌어서 나온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이 요청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내적인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다르게 생각하고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어찌 같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서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요청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무슨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이 줄 수 있는 대답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는 한 때 이런 물음에 대해서 기적이라는 관념으로 대답하곤 했지만, 길게 보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다는 생각은 이미 신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여기는 생각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를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0b-11) 기독교에서 믿음은 사고와 판단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이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토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서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6-17)

그렇다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이 준 대답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내적 친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보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맺도록 이끄신다는 견해입니다. 인식과 행위의 주체는 라고 하는 단독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나라는 이해입니다. 이 관계를 이끌어주는 분이 보혜사 성령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성령의 내적 친교를 통해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서로를 아는 데에는 위력(威力)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내적 친교가 깊어질수록 힘에 관한 감각도 변화됩니다. 성령이 이끄는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두려움을 심는 공포가 아닙니다. 성령 체험은 평화를 향하도록 이끄는 아름다움입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의 내면을 비출 때 보게 되는 하나님은 천상의 폭군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이 이끄는 삶은 여린 힘으로써 강건한 모험을 펼치며, 연약한 것에서 구원을 읽어내는 지혜입니다.

오늘의 위기는 실로 힘에 관한 상상력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항쟁 이후 삼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공전을 거듭하는 이유권력에 대한 상상이 여전히 두려움과 욕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 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군림하는 지배의 힘이 아니라, 섬김의 관점에서 권력을 구성할 수 있는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아침 성령강림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공동체는 소통의 언어를 얻었습니다. 암담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예언과 비전과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이끌어주셔서, 평화를 향한 아름다운 모험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두려움과 욕망으로 얼룩진 시대에, 진리의 영이 이끄는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진리의 영이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면 예언과 비전과 꿈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진통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성령께서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에서 부드러운 힘이 지어지고, 아름다운 모험이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 ?
    백산 2019.06.11 01:54

    저의 카톡 프로필 상태메시지를 바꿨습니다.
     

    욕망과 두려움을 비벼대는

    흑역사의 공전에 들이댄다

    평화의 꿈

    "가자_아름답도록 우직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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