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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믿음이 나타날 때 | 김희헌 | 2019-06-23

by 김희헌 posted Jun 23, 2019 Views 26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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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6-23

믿음이 나타날 때 (왕상 19:1-4,8-15a, 3:23-29, 8:26-39)

2019.06.23 성령강림절 셋째 주일, 남북화해주일

 

[전쟁과 트라우마]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9년이 다가오는 오늘 남북화해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고난과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고통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상처와 고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거기에도 구원의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구원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쓴 가시 면류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류가 살아가는 길의 실마리를 고난에서 찾았고, 고난을 크게 당한 우리 민족이 인류의 구원에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두운 모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에는 어둡고 파괴적인 얼굴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경험 자체가 곧장 해방의 동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극심한 고통의 경험은 삶을 왜곡시키고, 트라우마가 되어 영혼에 깊이 자리 잡습니다.

한국사회는 놀라운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사회적 병리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상당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생존을 위한 극한 경쟁이 여전하고, 소통의 단절로 인한 세대 갈등이 존재하며, 이기적인 탐욕과 상호불신 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사회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있는 물질적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경쟁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나타난 병리현상의 뿌리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체험이 자리 잡고 있다는 답변이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이야기를 연구하는 분야가 구비문학(口碑文學)인데, 이 분야의 연구자인 건국대 신동흔 교수는 한국전쟁에 관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모아서 [한국전쟁이야기집성]이라는 10권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는 238명의 이야기를 분석한 결과, 한국전쟁은 단지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기억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되어 마치 시대정신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의 뿌리에는 전쟁의 비극을 겪은 세대의 트라우마가 자라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쟁체험 세대가 가진 집단적 세계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빽(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 유독 두드러지는 이라는 관념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를 통해서 사회에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이 세대의 경험적 신념 중에는, ‘전쟁을 겪어야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생각, ‘먹고사는 문제도 전쟁이라는 생각,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는 판단, ‘가까운 사람이 더 무섭다는 불신 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젊은 세대가 세상을 똑바로 보고 각성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갈등과 혼란으로 몰고 가는 대결의식과 혐오와 적대감의 대부분이 전쟁을 체험한 세대의 트라우마를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질서와 제도로 뿌리내렸습니다. 사회제도만이 아니라 문화와 종교의 영역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일 저녁에 우리 교회에서 <평화와 신학>이라는 연구단체가 발족합니다. 작년부터 한반도에서 일어난 평화의 흐름을 교회가 능동적으로 맞이하자는 취지를 갖고,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 만드는 단체입니다.

지금부터 삼십 년 전인 1989년에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을 결행하셨고, 또한 그 해에 홍근수 목사님을 비롯한 기독교 선구자들이 <통일신학동지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발족하는 <평화와 신학><통일신학동지회>의 차세대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앙적 파산상태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참여와 사회선교, 교회갱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일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관심을 갖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창립포럼에서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한국전쟁과 트라우마입니다. 그것은 분단체제에서 생긴 상처와 죄악이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식 반공국가가 완성되어가는 동안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고, 이 과정에서 생긴 개인적/집단적 트라우마는 군부독재와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더욱 깊이 내면화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가 시달리고 있는 트라우마나 터부를 밝혀 말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상상력이 올바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극한적 대결구도로 몰고 가는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것이 밝혀지고 치유되어야지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를 국가나 자본에 맡기지 않고 국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 여건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거라사 광인과 주민들의 트라우마 / 누가복음 826-39]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는 미치광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서 이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옷을 벗고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두었지만, 이 사람은 그것을 부수고 무덤과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돌로 찢으며 상처를 내는 자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5:4-5)

그가 예수를 보고 엎드려 말합니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이것은 트라우마로 찢긴 영혼의 목소리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군대입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 이름 없는 사람을 대신하여 그를 지배하고 있던 귀신이 대답합니다.

군대를 뜻하는 레기온’(Λεγιν),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6천명으로 구성된 로마군 부대를 가리키는 레기온은 죽음의 정치를 펼치는 국가 폭력의 상징입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레기온의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옷과 집을 빼앗긴 채 떠돌이로 살게 된 사람도 있었는데,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쇠사슬에 묶이기도 했으니 그 얼마나 한 맺힌 삶이었겠습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악을 쓰고 돌아다니며, 제 몸에 상처를 내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정치를 펼치는 것이 군대입니다. 죽음의 정치,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짐으로서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를 의미합니다. 전쟁과 군대를 통한 정치가 바로 그것인데, 우리 역사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죽음의 정치에 시달렸습니까?

한국사회는 지금까지도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빨갱이를 소탕하는 목적이었다면 범죄로 여기지 않았던 죽음의 정치가 남아 있습니다. 간첩이 제조될 때까지 자행되는 고문 역시 허용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귀신의 목소리가 여전히 횡횡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당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죽임의 질서에서 간과되기 쉬운 것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그저 귀신들린 사람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삶이 파괴된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로 여겨지기보다는 회피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입니다. 무덤을 배회하는 미치광이가 되어 파괴된 그 삶은 더럽게 보이고, 군대귀신에게 장악된 그 사람 자체가 귀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민초들이 당한 이 비극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이들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의 고통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미치광이의 참혹한 삶을 보았습니다. 군대귀신을 지고 사는 그 삶의 비참함을 보았고,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굴레를 씌운 사람들의 폭력으로 인해 스스로를 저주하며 자기 파괴의 삶을 사는 그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줍니다. 그가 가진 트라우마에서 풀려나 자신의 본 모습을 갖게 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주민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미치광이가 제정신을 갖게 된 것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예수님보고 자기네 지역을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 역시 동일한 군대귀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죽음의 질서를 더 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언자의 트라우마 / 열왕기상 191-4, 8-15a]

열왕기상의 본문은 또 다른 죽음의 체제 속에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더 이상 영웅적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좌절한 사람으로 등장하고, 본문은 그의 좌절을 통해서 두려움과 공포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예언자의 역할은 가면을 벗기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도 두려움과 공포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예언자가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좌절하고 있는지 믿기지 않습니다. 바로 앞 18장에서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8501의 대결에서 승리한 영웅이었고, 메마른 죽음의 땅에 단비를 내리게 한 생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가 좌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왕비 이세벨의 입술을 통해 표현된 그 시대 죽음의 정치는 엘리야를 정면으로 조준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탈출하여, 남왕국 유다로 넘어갑니다. 그것도 남쪽 끝 브엘세바까지 도망칩니다. 그리고도 광야로 더 깊이 들어가서 홀로 앉아 죽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 예언자를 절망에 빠뜨린 트라우마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호렙산 동굴 안에서 하나님과 나눈 두 번의 대화입니다. 엘리야는 40일을 걸어서 모세가 소명을 받았던 그 약속의 산에 도착했지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 낙심에 잠깁니다.

동굴 속으로 피신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묻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낙심한 예언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는 엘리야가 좌절하게 된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게 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겨온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제단을 헐고, 심지어 다른 예언자들을 죽이는 현실에 실망하고 회의를 느끼는 것이요, 마지막은 자기 혼자 남았다는 절망감입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이 그를 좌절시킨 트라우마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이 말씀은 홀로 남았다는 절망감에 시달리고 있는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동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산 위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안에 있는 동안, 동굴 밖에서는 온갖 모양의 기상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거기에 하나님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엘리야의 심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이 다 지나가고 다시 두 번째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는 앞에서 나눈 첫 번째 대화 내용과 동일합니다. 엘리야는 여전히 좌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를 거꾸러뜨린 트라우마는 홀로 남았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은 열정의 사람에게 주어진 형벌과도 같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열정이 없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주어진 책임도, 미래를 향한 약속도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과거의 짐을 어깨에 메고, 미래를 향한 약속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열정의 사람입니다. 그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길게 보면, 역사는 과거의 야만스러움마저도 너그럽게 껴안고 녹여내지만,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역사의 단면은 마치 욕망의 사슬로 맺어진 암투처럼 보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열정의 사람들은 낙심하고 비관합니다.

낙심한 예언자를 회복시킬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알에서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이 끝나고 나서 엘리야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9:18) 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마지막 과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다마스쿠스는 이스라엘 북쪽 끝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절망하여 남쪽 끝 브엘세바까지 내려온 엘리야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돌이켜서 광야 길로 나가 북쪽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하는 예언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레크 쉬브 (lêḵ šūḇ)’ Go and return!

다시 광야 길을 되돌아 앞으로 나아갈 힘은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열왕기상의 본문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만 남긴 채 끝납니다.

 

[트라우마와 믿음의 감각 / 갈라디아서 323-29]

우리는 마지막 본문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봅니다. 함께 읽은 323절은 바울의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에 갇혀 있지만, 믿음이 나타나면 율법의 지배를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믿음이 환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내용을 보면, ‘그 믿음이 이미 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라는 개인교사의 가르침 아래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믿음이 나타나서,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28절에 나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은 로마제국의 시대의 율법(norm)을 따르면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담한 사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나타날 때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차별, 신분차별, 성차별이 없다는 이 바울의 믿음은 일체감(unity)의 표현일까요, 아니면 평등(equality)에 관한 주장일까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의 의미, 실제로는 차별이 존재하지만 단지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을 갖자는 말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평등의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바울이 말한 믿음의 공동체, 율법의 지배를 이겨낸 새로운 공동체를 말해주는 지표는 바로 평등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보그 & 크로산, 바울의 첫 번째 복음, 269)

왜냐하면 믿음과 대립되는 율법의 특징은 불평등과 차별이기 때문입니다. 분단 시대의 율법은 극한적 대립을 부추기며 서로 죽여도 좋다는 적개심을 불어넣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율법은 노동을 무시하고 모욕하며, 특히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불평등한 임금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추깁니다. 율법은 평등의 감각을 말살합니다.

율법으로 짜인 이 세상에 철들면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도리어 보지 못합니다. 분단의 율법, 자본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면 해방의 정신도 평등의 감각도 잃게 됩니다. 남북이 서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한국사람도 예멘사람도 모두 평등하며,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모두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먹습니다. 남성도 여성도 성소수자도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존엄한 생명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나타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대담한 상상이 우리에게 차오릅니다. 율법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트라우마와 상처는 오직 이러한 믿음이 나타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가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역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남북화해주일에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 맘에 새로운 믿음을 하나 점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남북의 적대적 관계를 치유하는 보다 직접적인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고 추진하는 화해의 공동체로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며 갇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마음에 믿음이 나타났으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분단과 전쟁과 군대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고, 화해의 사도가 되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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