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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그것은 물이 없어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 김희헌 | 2019-07-21

by 김희헌 posted Jul 21, 2019 Views 60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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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7-21

그것은 물이 없어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8:1-12, 1:15-28, 10:38-42)

2019.07.21 성령강림절 일곱째 주일

 

[인간을 끌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가 묻는 커다란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라 하겠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이라는 미래학자는 10년 전에 [공감의 시대] (The Empathic Civilization, 2009)라는 책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공감능력이 고양되는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소위 자아(self)의 개발이란 공감의식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성품에 대한 그 동안의 해석과는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동안의 이론들은 종교가 되었든 과학이 되었든 간에 인간의 일차적인 성품을 탐욕이나 이기심, 또는 폭력성등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리프킨은 그것들이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것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성이라 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올바로 발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파생된 것들이 아니겠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인간이기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선택일가요?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심지어 자신을 버린다 할지라도 이타적인 요청에 부응하려는 선택이 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최소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기가 소유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공감의 시대여야 한다는 리프킨의 주장에 동의하게 됩니다.

공감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공감의 문화를 일궈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도약의 기회는 보통 선행보다는 악행이 발생했을 때 주어집니다. 누군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혼재된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에 대한 책임은 정확히 묻더라도,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공감의 시대 148-52)

(여기서 수치심이라는 말은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맹자는 인간의 네 가지 본성 가운데 두 번째 즉, ‘()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리켜 수오지심이라고 했는데, 리프킨은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표현한 듯합니다.)

리프킨에게 죄책감이란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공감에서 유발된 감정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죄책감을 느낄 때, 자신이 괴롭힌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한 책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상대방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모욕감을 주면서 내면에 있는 공감 스위치를 꺼버리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정의로운 문화는 필요하지만,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치심의 문화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사회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무고한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을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수치심의 문화는 극복되지 못하고, ‘소유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강화되기도 했습니다.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사람에게 수치심을 줘도 된다고 여기는 비인간적인 문화에 인류는 오랫동안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고통당한 사람에 대한 공감보다는, 힘을 가진 사람의 편에서 정의를 외치는 위선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이기적이고 비열한 존재로 끌어내리는 이데올로기의 노예상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인간을 저 깊은 곳에서 끌고 가는 것은 동물적인 필요와 충동만은 아닙니다. 사람을 분투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얻게 될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것이 종교가 인간의 마음에서 움트는 이유입니다. 어떤 종교가 만일 보상을 제시하는 일에 골몰한다면, 그런 종교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영혼에 더욱 깊은 공감을 불어넣음으로써만 생존하고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인간이 겪는 허기와 기갈은 밥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아모스의 외침은 생명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 믿음의 좌표를 보여줍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더 큰 목마름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구원의 날에 깨닫게 되는 것 / 아모스서 81-12]

오늘 생각해 볼 아모스서의 내용은 그가 본 네 번째 환상입니다. 먼저 주님이 아모스에게 묻습니다.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것은 종교적 물음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아갑니까?

농부 아모스의 눈에는 여름 과일 한 광주리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파국을 알리는 징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은 힙합 가수처럼 라임(rhyme)을 맞추면서 예언자를 깨우칩니다. 히브리어로 여름과일을 가리켜 카이츠’(qayits)라고 하고, 끝장났다는 말을 케츠’(qets)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카이츠가 가리키는 것은 케츠야라고 운을 맞추면서, 예언자의 상상력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의 눈에 탐스럽게 보인 여름과일이 풍요와 축복을 의미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종말을 가리킨다는 말씀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풍요와 그 풍요를 만들어낸 구조의 죄악성을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징어구 가운데 하나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바이욤 하후’(בַּיּ֣וֹם הַה֔וּא)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9절에도 나옵니다. 예언자들이 외친 이 말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예언자들의 집약적인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예언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말이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의 날로 묘사됩니다.

그 날이 오면, 궁궐에서 부르는 노래가 통곡으로 바뀔 것이다. 수많은 시체가 온 땅에 널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3)

왜 아모스가 구원의 날심판의 날로 전했는지 그 까닭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회가 가난한 사람(dal)과 궁핍한 사람(ebyon)과 고통당하는 사람(anav)을 약탈하는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고 하는구나.” (4/6)

이런 사회가 추구하는 해방의 날이란 실제로는 파멸의 날이요, 구원의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아모스가 전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런 심판이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날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11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8:11)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그것은 밥과 물이 없어서 겪는 허기와 기갈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Yahweh dabar)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성경이 전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오래전 출애굽을 통해서 해방된 사람들이 광야에서 배고픔을 겪을 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3)

오늘 우리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외환위기 때처럼 어렵다고 하는 오늘의 경제상황은 정말로 우리나라에 물과 음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입니까? 만일 더 많은 물과 음식만 있다면 이 배고픔과 목마름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마치 오늘 이 땅의 아모스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며, 스스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김용희 님입니다. 그는 해고노동자로서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삼성이라는 재벌기업을 통해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곡기를 끊은 지 오십일이 되어 30kg이나 빠진 자신의 몸뚱이로 하늘에 올라 우리 사회의 양심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방식의 삶을 추구하다가는 결국에는 파멸과 심판의 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말씀을 자신의 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 교회는 그를 만나러 강남역 사거리에 가려고 합니다. 가능하신 분들은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 누가복음 1038-42]

누가복음 본문은 두 유형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언니 마르다는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와서 대접(diakonia)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일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말씀을 들었습니다. 언니의 눈에 동생이 괘씸해보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는데, 예수님은 도리어 동생을 옹호하며 자기를 나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로 봉사부원들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원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두 유형의 삶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식의 태만의 윤리를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4:39, 8:3),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그 마지막은 가서 너도 자비를 베풀라’(go and do!)고 말하는 행동윤리를 강조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마르다의 행동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해방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리아를 옹호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말하자면, ‘스승의 발 옆에 앉아서말씀을 듣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되어서, 마르다처럼 일하는 것에서만 존재의 이유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옹호함으로써, 불평등한 당시의 관습을 깨뜨리고 여성해방을 선언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봉사하는 일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라고 오늘 본문이 격려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런 해석도 좋습니다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하나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마르다에게 한 예수님의 훈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맘이 엉켜(troubled)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르다의 현실에 주목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마르다는 일손이 부족한 마르다가 아니라, ‘염려하고 맘이 엉킨 마르다입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봉사를 하는 가운데 마음이 엉켜버린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친절을 베풀던 마음은 사라지고 원망이 남았습니다. 친절의 목적이 사라지고 원망하는 자신만 남았습니다. 그러자 마르다의 입에서는 라고 하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40절 후반절에서만 라는 표현(mou, me, moi)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반드시 필요한(χρεία, necessary) 것은 많지 않다 (ὀλίγων, few).’ 이것은 돌봄과 섬김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행위를 하느냐하는 act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집중하고 있느냐하는 focus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아모스의 말처럼, 밥과 물이 없어서 생긴 허기와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허기와 기갈에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 골로새서 115-28]

골로새서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먼저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신학적 진술이 나오고, 이 진술에 기초하여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한 권면과 바울 자신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15-20절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사색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신학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2천 년 갈릴리에서 살았던 한 사나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신앙의 좌표가 되는 우주적 그리스도입니다.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본문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겪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에 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 기초하여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에게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삶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가리켜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자기 육신에 채워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에 목마른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지 종교적 사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질곡에 빠진 이 세계의 고통과 희망에 연결된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하셨고, 그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라면, 복음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이 일에 참여할 새교우들의 가입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28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지혜를 다하여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함께 해나갈 믿음의 동지들도 그리스도 안의 친교 속에서 굳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신학적 기틀을 놓은 안병무 선생님이 1969년에 창간한 잡지의 이름이 현존(現存)입니다. 그분이 자기 시대를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를 알려주는 제목이라고 봅니다. 세계교회의 주요 문서를 보면, 1960년대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 ‘Christian presence’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고자 하는 고민을 담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대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1970년대의 한국사회는 독재정권의 폭압통치가 깊어가는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느 자리에 있어야 했을까요? 많은 교회가 침묵하거나 심지어 조찬기도회를 열어서 독재를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저항과 고난의 자리를 선택한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공표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한을 쥐고 영구집권의 길로 나아갈 때, 이에 맞서 <한국그리스도인선언>을 발표하며 (1973.05.20), 민중신학의 길을 열어간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자리를 신앙의 자리로 삼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된 자본의 지배력에 맞서 생명을 지켜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했을까요? 거의 모든 교회가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여 녹아내리고 말았습니다. 소수의 교회만이 예수를 따라 낮은 곳을 향해가며 버겁게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이들은 가난의 자리를 신앙의 자리로 삼았습니다.

이제 2020년을 향해가는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자리를 세울 수 있을까요? 인간의 존엄과 믿음의 긍지를 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을 지어낼 수 있을까요? 믿음의 방향이 곧게 서야 그 후의 삶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서지 못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고 말 뿐입니다.

아모스가 전해주는 말씀이 앞으로 우리의 삶과 교회의 좌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가 겪는 배고픔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요, 우리 시대가 겪는 목마름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이 시대가 굶주리고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진리의 실험이 우리 안에서 힘차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우리 시대가 겪는 배고픔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겪는 목마름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이 시대가 굶주리고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행진을 힘차게 벌여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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