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무섭고 끔찍한 말은 하늘에 그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해줄 하늘 아버지 하느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적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자의식이 성숙해가는 우주진화의 자연의 법칙을 인식해야 한다. 성장하는 청소년들은 성인으로 성숙해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더 이상 이 땅 위의 부모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자연적으로 인간의 자의식이 성숙해졌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고대인들의 자의식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유신론의 죽음은 불가피해졌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인생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내면 깊은 곳에서 발견해야 한다. 자의식을 지닌 인간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고등 생물종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인생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이 현실과 더불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일단 성숙한 단계의 성인이 되면 다시 과거의 청소년 시절의 부모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기독교인들은 이미 무용지물이 된 유신론적 하느님과 유신론적 안전체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과거로 돌아가는 문이 이미 닫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이란 만물보다 뛰어난 존재가 아니다. 참된 의미의 하느님은 삶 그 자체이다. 즉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생명 그 자체이다.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 그 자체이다. 즉 우주 전체와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하느님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의미는 존재의 근거 그 자체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개체들의 우주적인 통합, 경계 넘어 포월적인 통합, 모든 개체들이 공평하고 자유하고 해방되고 존중되는 실제(Reality)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을 불러왔다.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자신의 저서 <하느님의 역사>(The History of God)에서 밝히기를, 유신론적 하느님 개념은 인간의 안전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욕구에서 만들어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언어들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욕구와 희망을 드러낸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서와 모든 신조들, 교리들, 기도문, 찬송은 인류사의 초기에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이 생존의 두려움에서 하느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부족적 종교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대의 부족적인 산물들의 문자적 내용은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 전통적인 정의도 설득력이 없으며, 그 상징들은 더 이상 21세기의 현실에 효력이 없다. 결국 기독교인들이 과거에 수동적으로 믿었던 유신론적 하느님은 힘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인류사에서 죽어가는 하느님 개념이 다시 살아난 적이 없다. 특히 오늘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유신론은 부적합하다.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구약성서 시대의 유대인들도 기원전5세기 바빌로니아 유배기의 하느님은 유배기 이전의 하느님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었을 때, 과거의 부족신을 떠나 보내고 우주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시작했다. 만일 미래의 종교가 유신론의 정의를 되살리는 것이라면 그 종교는 오래가지 못하고 오늘처럼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자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즉 유신론적 개념으로부터 변화된 하느님 신앙을 지닌 무신론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우주진화 세계의 인간 경험에 따라서 과거의 ‘하느님은 누구인가’(who) 라는 질문을 내려놓고 이제는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이성적으로 즉 정신적으로 심층적인 차원이 있다. 우주진화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서로 분리되기 보다는 경계 넘어 모든 개체들을 포용하는 포월적인 핵심이 있다. 우주의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전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어떤 종교나 신조나 교리나 비단 하느님이라도 부인할 수 없다. 이 궁극적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포월적인 실제는 우주에 속해 있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그런 상태를 하느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외부적인 존재는 아니다. 또한 반드시 하느님이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와같은 인식은 종교사에서 과거에 항상 존재했던 소수 의견이었지만 오늘날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견해가 되었다. 사실상 성서를 신중히 읽으면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 조차도 자신들의 유신론적인 하느님 개념이 부적절하며 심지어 제한적인 한계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르아흐’라고 묘사했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바람으로서 자연적이며 비인격적인 개념이다. 그 뜻은 원초적으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생명력의 힘이었으며, 바람은 경계 넘어, 모든 것들을 포용한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르아흐가 진화되어 인격화되고 외부적인 영으로 불려졌다. 또한 르아흐는 인간의 숨과 관련되어 비인격적인 개념이다. 숨은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힘이며 목숨과 동일시된다. 성서가 밝히는 또다른 비인격적 하느님 이미지는 반석이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더 이상 주저할 필요없이 용기를 갖고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비유신론적인 새로운 의미와 표현방식을 탐구해야 한다.
모든 종교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획일적이고 구체적이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는 것에 반대했다. 서구의 신비주의자들은 인격적 하느님은 종교 발전에서 저차원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인류 정신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종교적 탐구 여정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지는 인간성을 추구했다. 유신론적 기독교는 인간의 한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사람들을 교리와 신조의 감옥 속에 감금하고, 인간을 무력하고 의존적인 어린 아이의 상태로 전락시키고, 외부적인 타자로서의 하느님에게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율적이고 창조적이고 신비적인 하느님 경험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의 모든 경계와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안전장치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미는 자연과 생명의 깊은 차원에서 깨달아 알 수 있다. 즉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자연과 다른 인간들과 생명들과의 상호의존적이고 관계론적인 삶을 통해 하느님을 경험한다.
유신론의 죽음은 1800년대 초기에 독일에서 성서 문자주의가 붕괴되면서 시작되었다. 유신론의 죽음은 성서학에서 신학으로 옮겨갔는데, 그 이유는 고대의 신학적 교리들이 더 이상 그것을 뒷받침하던 성서의 문자적 본문들에 근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1884-1976)은 신약성서 복음서의 모든 내용들이 고대의 신화 속에 뒤덥혀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는 참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으며, 따라서 성서비평연구는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적 이해는 고대 신화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적절하지 못했다. 따라서 불트만은 성서 내용들을 비신화화 (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하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직 수학자였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하느님이란 외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의 생명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신학적인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신학적 틀을 제공했다. 즉 그는 하느님은 만물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만물을 통해 느끼고 깨달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하느님은 모든 새로운 가능성의 원천이다. 과정신학이란 급진적인 사상은 화이트헤드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가 집권할 때, 히틀러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정도로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었다. 나치정권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다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이 세상에 ‘종교 없는 기독교, 하느님 없는 기독교’를 요청했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유신론적 기독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외쳤으며, 히틀러의 비인간성에 반대하여 기꺼이 죽음을 무릅쓴 순교자였다.
독재자 히틀러에 항거했던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불트만의 성서의 비신화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이해했던 이미지, 즉 세상 밖의 높은 곳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버리고, 그 대신에 이제는 내면적으로 깊은 곳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이미지 즉 만물의 존재의 근거이며 핵심이라는 이미지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틸리히의 하느님은 생명의 중심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삶의 중심이었다. 이 하느님은 인격체가 아니며, 외부적이고 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느끼고 인식하는 실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외부적인 힘에게 간청하는 일도 없다. 이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과 생명은 공평하고 소중하다. 이 하느님은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 구원받은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틸리히는 유신론적 이미지들이 죽어야만 하느님이란 말이 의미있게 다시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느님이란 말을 적어도 앞으로 100년 동안은 사용하지 말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오늘 여전히 교회 안밖에서 하느님에 관한 설교는 무성하며 그 대부분은 유신론적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들은 획일화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합의된 자료는 없으며,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다. 획일적이고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하느님은 죽었다. 이제 내면적인 하느님의 의미를 자유하게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내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 교회의 책임과 의무는 사람들을 외부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적 능력에 관한 교리로 세뇌시키고 감금하기 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내면적인 하느님의 요청을 듣고, 자율적으로 인간성을 확대시킬 수 있도록 격려하고, 마땅히 되어야 할 참된 인간의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이 살아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인류사회의 정의와 평화와 통합을 위해 무엇보다 하느님 없는 교회, 하느님 없는 종교가 필요하다. 이 말에 대해 하느님을 초인간적 유신론적 개념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분을 격하시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 기독교는 심판하고 그 심판에 근거하여 상벌을 주는 외부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얻어내던 힘을 상실했다. 교회 내부의 신자들과 교회 외부의 불신자들로 분리시키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던 과거의 패러다임은 이제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모든 신조들은 성서의 문자적 표현이며, 스스로를 모든 진리의 원천이라 주장하는 교회의 제도적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교회의 권위에 거부하거나 불복종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생 바깥에 그리고 생명 바깥에 믿을 하느님은 없다! 외부적 하느님 없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능할뿐만 아니라 절실히 필요하다. 외부적 하느님 없이 그리고 외부적 하느님을 믿는 교회 없이 안전하게 선하게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외부적 하느님의 종교 없이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과거의 신학적 장치들 없이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외부적 하느님 없이도 도덕적 행동을 지켜갈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종교 없이도 인류문명이 도덕적 공백상태로 빠지지 않으며, 무력적인 힘이 정의의 최종적 결정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부적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 자율적으로 조건없는 사랑과 경계 넘는 포월적인 사랑을 한없이 베풀며 사는 것 이외에 두려움과 공포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