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죽은 후, 기독교는 “예수의 기독교”(Jesus Christianity)가 되었어야 하는데, 권력과 부의 유혹에 빠져 원래의 역사적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의 정신과는 정반대로 부족적이고 상업적이고 이분법적인 “교회의 기독교”(church Christianity)로 변질했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예수의 초상화와 십자가만 벽에 걸어놓고 있을뿐, 세상에서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세상을 분단과 혼돈에 빠트렸다. 특히 교회는 현세적인 인간 예수를 성상의 자리에 앉은 내세적인 하느님으로 둔갑시켰다. 결국 오늘의 교회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팔아먹는 장사꾼 집단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세적 교회 기독교가 유일한 기독교 형태일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오늘 기독교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참된 교회의 길을 걷지 않고, 멋대로 예수를 변형하여 만든 가짜 예수 즉 하느님 예수를 숭상하는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만이 정통이고 나와 다른 모든 것은 이단이라는 비교회적 논쟁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오늘 교회 기독교는 뒤늦게나마 원래대로 교회적이어야 하며, 과거의 패러다임의 신앙을 개혁하고 갱신해야 한다. 지금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단지 교회의 제도만이 아니고, 기독교 신학과 신앙 그 자체이다. 기독교가 탄생한 후 지금까지 발전해온 역사는 오류와 왜곡과 폭력투성이다. 즉 초기의 기독교는 서로 다른 사상과 학파들의 난장판이었다. 결국 어떤 지배적인 믿음이 등장하면, 스스로를 정통 또는 적법으로 선언하고, 다른 입장들은 이단으로 단정했다. 흔히 지배적인 믿음은 자신을 원형(original)이라고 주장하지만, 유일한 원형(원본) 혹은 진정한 신앙은 성서에도 원래부터 없었다.
2세기 후반부터 역사적 예수를 외면하고 발전하기 시작한 교회 기독교는 그 자체를 오류가 없는 영구적인 조직체로 생각했다. 기독교 교리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개별 입장권이 되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다만 죽음을 대비하는 일에 소모되었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의식은 엄한 규정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매우 교리적이고 관료적인 구원의 장치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최대관심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어야만 했으며, 그 구원의 열쇠는 교회가 갖고 있었다. 지금 여기의 세계는 그와 같은 구원을 입증하는 터전 이외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따라서 자연환경과 생태계와 기후변화의 문제들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윤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 되었고, 오직 죄를 피하고 은총 아래서 죽는 것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중보(mediated) 형태의 종교로부터, 직접적(immediate) 형태의 종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초적으로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인(mediator)이 없다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들은 중개인 없이 자율적으로 직접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다. 예수와 교회와 성직자와 성례전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인이라는 발상은 교회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천박한 술책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자신이 중개인이 아니라고 천명했으며, 모든 사람은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을 느끼고 살아낼 수 있다고 거듭해서 강조했으며, 중보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도전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here and now) 현실적인 세상에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불행하게도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된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더욱 슬픈 일은 예수를 따른다는 교회는 중개인이 없는 직접적 형태의 종교를 살아내야 할텐데 오히려 정반대로 예수가 거부했던 중개인 종교로 전락했다. 교회는 참된 예수의 비전을 버리고, 만들어진 예수의 천박한 믿음체계를 세웠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폄하하는 중보된 종교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거대하고 전체적인 제도이며 괴상한 우상이 되었다. 거대한 구원 장치인 중보종교의 믿음체계는 자신 너머를 제시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교회의 교리는 보증된 형이상학적 도그마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중보체계는 그 자체가 종교적 대상,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즉 신자들은 성직자와 신조, 그리고 교회와 예배의식을 믿었다. 즉 믿음(belief)이란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교리를 암송하고, 교회에 다니고, 헌금을 바치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등의 관념적인 행위일뿐이며,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것처럼 내면적으로 스스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세속적인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life)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신자들은 교회를 통한 기계적 구원에 대한 도덕적 노예생활을 신앙이라고 착각했으며, 믿음체계가 제공하는 거짓된 안전장치에 세뇌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부족적이며 특정한 교리체계를 믿으며, 특정한 순종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지성과 이성의 눈이 뜨여진 사람들은, 왜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참된 행복은 죽음 저 너머에서 시작될 뿐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갔으며, 자신의 참된 삶에 대한 양심과 의식이 독살되도록 방치했는가?라는 솔직한 질문과 함께 하느님 죽음의 문제를 제기했다. 따라서 저 세상적인 중보종교의 거대한 안전장치는 갑자기 공허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 니체의 하느님 죽음의 선포는 서구 문화가 그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순간을 암시한다.
기독교의 발전 과정은 아마도 다른 길을 걸어왔을 수도 있으며, 그랬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죽은 후, 거의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마치 단추를 끼울 때 처음부터 잘못된 구멍으로부터 시작한 것과 같다. 그런데 왜 현대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인 문화적 대격변 속에서도 또 다른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고려하지 않는가? 최소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새로운 종교개혁의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그러한 생각을 다시 하지 않는가?
오늘 급변하는 미래의 물결에서 문화적 변화는 너무 크기 때문에 종교적 사고에 있어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종교적 및 철학적 사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오래 전에 이미 깨어진 골동품이 되었으며, 이제는 과감하게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부족적인 ‘교회 신학’으로부터 우주적인 ‘하느님 나라 신학’으로 진화해야 한다. 예수가 가르치고 살아냈던 하느님 나라 신학은 순전히 이 세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윤리이며, 우리 자신을 삶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것은 교회 시대 이후의 것이며, 탈도그마적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중개인 없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순수한 종교적 직접성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가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또는 ‘안에’ 있다고 가르친 진리이다. 하느님은 신자들 옆에 타자로서 존재하는 외부적인 신이 아니다. 하느님은 마치 우리의 호흡처럼 내재화 또는 보이지 않는 깨달음과 인식이다. 하느님 나라 종교의 세계는 이 세상의 삶과 일치하며, 모든 인간들과 생명들과 자연은 깨끗하고 성스럽다.
오늘날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개입과 조정을 기대하는 삼층 세계관은 죽었다. 그 대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비실재론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여,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삶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의 도덕적 분투, 즉 우리에게 달려 있다. 신학적 실재론(하느님이 저 하늘 밖에 객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주장)과 중개인 예수에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초월적 영역에서 인간을 좌지우지하며 조정하는 엄격한 주권적 타자로 믿는다. 따라서 교회 기독교는 거대한 형태의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은 이 우상숭배를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오늘날 쇠퇴기에 놓인 교회 기독교는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안에 원래의 역사적 예수, 즉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로서 우리에게 종교적 직접성을 주저하지 말고 선택하고 살아내라고 촉구하는 그의 거친 음성을 아직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또한 매우 다른 신학을 가르치는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다른 신학은 만들어진 예수를 기초로 하여 거대한 종교적 중보체제를 만들어낸 신학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종교적 중보체제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다 죽어갔지만, 그의 비판과 반대는 이제 새로운 종교적 중보체계에 의해 묵살되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교회 기독교가 얼마나 뿌리깊게 예수를 오해하고, 잘못 표현해왔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만약 요한복음서가 신약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가르친 현세적 하느님 나라 종교와, 예수를 변형해서 만든 내세적 종교 사이의 모순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의 엄청난 간격이 밝혀짐으로써 기독교가 그 초기 발전단계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의 인간 교사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그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땅에 온 성육신화된 신적 존재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교회가 예배해왔던 예수는 바로 이 요한복음의 예수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볼 때에, 기독교인들은 원래의 역사적 예수가 선포했던 훨씬 더 심층적인 단계의 종교로 되돌아갈 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마침내 중개인 없는 직접적 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죽은 후,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교회 기독교의 거짓과 은폐로 인해 허송세월을 보냈다. 기독교인들의 후손들이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과거에 교회 기독교가 인류사회에 분단과 혼돈과 불안을 야기시킨 만행이 재현되지 않도록 이제 기독교는 새로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