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하려는 말은 터전위원으로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향린교회 출석 10년 갓 넘은 그냥 교인자격으로, 특히 개신교 물 먹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향린교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향린교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향린교회를 찾아 오는 이들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오는 걸까. 한국사회에 향린교회 이미지를 만들었을 장면을 생각해 본다. 홍근수 목사님의 토론회 발언과 시위하는 교인들, 미군장갑차 사건의 미국의 사과와 SOFA협정개정 시위, 평택미군기지건설 반대,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시위, 박근혜 탄핵촛불 시위, 노동사회 현안 집회. 이 모든 장면에 빠지지 않았던 '청년예수' 깃발. 나는 개신교에 좋은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이 향린교회에 갖은 이미지가 이 청년예수의 이미지라 생각한다. 이는 향린교인 스스로도 긍정하는 부분일 거 같다.
최근 바울에 대해 비판적인 공부 흐름이 있다고 듣는다. 갈릴리에서 활동한 민중운동가의 모습이 진한 마가의 예수는 바울이 보여준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에서 말해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향린교회는 바울이 펼치는 구원자 그리스도 보다 그 자신 민중 자체였던 갈릴리 예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는 민중신학을 펼친 안병무 선생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지금 향린교회가 쓰고 있는 건물의 위치는 당시에는 영세한 인쇄공장이 밀집해 있고 넝마주이가 뒹굴던 곳이다. 이 곳에 예배당을 짓는데 (당시 관념으로) 교회답지 않은 건물을 짓기로 한다. 국악찬송을 만들어 부르고, 국악기로 연주하고, 징을 친다. 설교단에 평신도가, 원불교 교무가 서기도 하고 도올 김영옥 선생이 설교시간에오르기도 한다. 장로교 임에도 당회에 버금가는 기구를 별도로 운용한다. 청년예수의 저항과 변혁을 형식과 내용, 외양과 내부에까지 이루려는 몸부림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오늘 향린교회가 맞은 교회 내 현안은 터전의 이전이다. 현재의 터전과 건물이 지닌 좋은 뜻을 잇고 발전시킬 책임을 오늘 향린에 소속된 교인들은 짊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새 터전의 건물은 현재보다 더욱 청년예수의 그 무엇을 닮아가려는 의지를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건물을 지을 때 교회답지 않게 지으려 했다는 기억을 자랑스레 말 하듯, 새 건물을 설명할 때 청년예수의 이 것을 닮으려 이렇게 했다 말할 무엇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들리는 말들에서 이런 걸 찾기 쉽지 않다. 이미 다른 교회들이 시도한 충분한 공간의 공연장식 예배당, 이러저러한 공간. 다른 교회의 예배당건물과 향린이 새로 짓고자 하는 건물에서 바울의 그리스도와 마가의 예수가 다른 것 만큼의 차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의 향린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다. 변화와 혁신은 고통스럽고 새로운 실험은 위험하여 회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향린이 청년예수 깃발을 내리지 않으려거든 좀 더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