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황제의 정치적 야욕에 따라 예수의 신성을 강요하는 니케아 신경이 만들어진 이래 지난 1700년 동안 예수의 교회, 예수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느님 나라의 정신과 삶을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역사적 예수는 권력의 탐욕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하느님 예수로 둔갑했다. 불행하게도 예수가 얻은 것은 만인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거부한 장사꾼들의 교회뿐이었다. 지금까지 교회는 가짜 예수와 상업적인 구원을 팔아먹는 거짓과 은폐의 온상이 되었다. 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에 있다. 예수의 구원은 죽음 후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가 세계를 지배해왔던 기독교 문화의 오랜 전통에 세뇌되어 그들의 기본적 세계관과 인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교회 기독교 교리의 맞춤형으로 배워왔다. 다시 말해 창조론과 구원론과 축복론 등의 지극히 삼층 세계관적이며 이분법적인 교리들을 관념적으로 암송하고, 매우 실재론적인 방식으로 맹신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태초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을 계획한 대로 완전하게 창조했다는 망상에 빠졌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전적으로 전지전능하고 선하며, 그가 만든 우주 질서는 이상적인 가부장제였다. 다시 말해, 만물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고, 균형 잡힌 조화로운 질서 속에 배열되었다. 만물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주의 깊게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애초에 예정된 설계가 잘못되었는지, 최초의 인간 창조 직후에 인간의 죄는 만물의 완전한 조화를 어지럽히고 타락시켰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은 제한성과 노동과 죄로 인한 고통으로 파멸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처음 창조된 대로의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저주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옹졸하게도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선택한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치료책을 준비했다. 이 치료책이란 단순히 기나긴 구원사를 입술로 인정하고 암송하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의 성육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예수가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가 다시 땅으로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하는 구원사이다. 결국 교회가 이러한 구원사를 조작했고, 교회는 신조, 교리, 성례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중보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삼층 세관적이며 지극히 부족적인 천국의 구원론은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에 기초한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주류 사회의 현대인들에게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낡은 우주론에 근거한 창조론과 구원론은 근대 이전의 지극히 힘겨웠던 고대 농경사회의 관점에서 그려진 부족적인 그림일뿐이기 때문이다. 이 고대 사상은 민중들에게 지고의 권위는 항상 지혜롭고 선한 것이기에, 그들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라면 자기 자신과 조상들을 탓해야 한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권위에 순종하며, 참고, 세상 끝 날까지 견딘다면, 죽음 후 다른 세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희망할 수 있다는 망상의 노예가 되었다.
이 낡은 기독교 우주론은 크게 잘못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이 우주진화 세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세계가 그 낡은 우주론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낡은 우주론의 창조론과 구원론에서 만들어진 교리와 공식들과 전통들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 오늘날 주류 사회의 과학, 철학, 종교, 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예술의 기초가 되는 우주진화 세계관에 따르면 저 하늘 밖에 문자적으로 어떤 신(神)도 다른 세계도 없다. 물론 죽음 이후의 영생과 삶도 없다. 이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끝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냥 끝나는 것이다. 저 밖에는 그 어떤 선행하는 혹은 이미 정해진 우주적 질서라는 것은 없으며, 그 어떤 도덕적 질서도 없다. 이미 만들어진 자아라든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것도 없다.
오늘날 교회 기독교의 교리는 이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참되게 묘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줄뿐이며, 보상심리와 이기적 욕심을 조장할 뿐이다. 기독교 자체의 개혁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은유적으로 기록된 성서 즉 기독교 신화를 새롭게 다시 읽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이고 신화적으로 기록된 성서가 문자화되고 왜곡되면서 교회 전통은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내지 않고, 하느님을 우상화하기 때문이다. 교회 기독교는 성서를 폭력적인 통제 이데올로기로 투사시켰다. 다시 말해 성서는 하느님이 우주를 이미 설계된대로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와 국가에 모든 권력을 확립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삼층 세계관적 믿음은 실재론적 사고의 틀 속에서 작동해왔다. 또한 모든 것은 저 밖의 세계에 이미 정해진 것으로 여겨졌으며, 평범한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은 전적으로 거부되었다. 하느님을 모방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느님이 이미 만든 것에 적합하게 반응하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하느님이 미리 정해놓은 체계 안에서 우리의 정해진 몫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기독교 신자들의 몫이란 단지 무작정 믿고, 하느님의 법(성서)에 복종하고, 참고, 희망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처럼 기독교는 반인도주의적인 억압적 믿음체계로서 조직되었으며, 따라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교회는 종교 사상의 실체와 그 작동 방식을 완전히 망각하고, 하느님의 대행자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이 신화를 기록한 목적은 문자적으로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읽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재현되도록 의도된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성서의 창조신화는 인간이 자연세계의 경험과 정신 생활의 혼돈을 어떻게 언어로써 극복해야만 할 것인가, 그리고 점진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세계를 세워나가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원초적인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성서의 창세기 이야기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참된 창조신화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건설하고 질서를 잡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무(無)로부터 세계를 지어내는 자율적 비실재론자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 동일한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들도 하느님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의미 즉 궁극적인 진리,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내 한다.
교회 기독교의 신학에 따르면 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이 왜 세계를 창조했어야만 했으며, 무엇을 얻기 위해 세계를 창조했나? 교회 기독교는 이 질문에 답하기를,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로서 자기 표현의 순전한 기쁨과 자신을 내어주는 한없는 사랑에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동적인 이야기기로 들릴지 몰라도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유신론의 용어로 그려낸 일종의 순진하게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인 우답일뿐이다. 이 유신론적 하느님은 대단히 이기적이며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사랑을 베푼다. 인간과 세계는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 하느님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망상으로 자신의 영광을 잘 누렸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과 깨달음이 성숙해지면서 이 하느님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심층적으로 인식해야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무신론적인 하느님은 태양처럼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따라서 조건없고 사심없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쏟아부어 주고 가치를 부여하는 삶이 하느님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도덕적 행위의 역할 모델로서 하느님 개념을 말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서에서 유혹과 타락과 구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자신들이 어떻게 관대하며 밖으로 향하는 표현적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생명들과 자연을 사심없이 사랑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가치가 소중한 만큼 타자들의 가치도 동일하게 소중히 여길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어야 한다.
필자의 멘토인 영국의 신학자 돈 큐핏은 자신의 저서 <태양의 윤리학>(Solar Ethics)에서, 인간은 138억 년 우주 이야기에서 존재론적 무(無)로부터 등장했듯이, 오늘 인간의 언어와 삶은 도덕적 공허로부터 출발한다. 언어를 사용하여 상징을 만드는 존재로서 우리의 책임은 태양처럼 사심없이 우주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한껏 표현하고, 우리의 세계를 건설하고, 질서있게 만들며 우리의 세계를 서로에게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태양처럼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구원의 이야기는 충분히 태양과 같으며 우주적인 사랑은 단지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음이 없는 소위 악한 사람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한다.
교회 신학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으로의 새로운 종교개혁은 기독교인들이 물려받은 관념과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것이다. 참 사람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아람어 세계로부터 만들어진 가짜 예수의 그리스어 세계로 이동하자마자 초대 기독교는 절대군주제가 일반적인 정부형태였던 노예사회로 진입했다. 이 사태는 17세기 계몽주의 때까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서와 전통과 상징들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인식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며, 종교를 사회통제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광분했다. 성서의 신화적인 이야기들은 제도화되었고, 도그마로서 객관화되어 다양하게 다른 인종들과 종교들을 강제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이 되었다. 특히 성서는 실재론적으로 이해되었으며, 하나의 우주론으로 투사되었다. 야만적인 사회원리가 교회 기독교에 의해 합리화되었고, 구원을 위한 학습으로 재해석되었다. 신자들은 예배의식에서 죽은 후에 영원히 들어가게 될 상상 속의 거룩한 세계에 대한 망상에 심하게 중독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낡은 형태의 교회 기독교는 강력한 사회적 통제 기구들과 함께 대다수의 평범한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했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 종교에서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기독교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사용하여 사람들을 억압하는 우주론을 구축하거나, 세속적인 정치세력과 영적 권력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다만 원초적인 이야기들과 상징들을 본래의 해방적이며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방식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타자로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론적 하느님을 인간성 안에 내면화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의미는 삶의 방식과 표현이 되어야 한다.
낡은 형태의 교회 기독교는 오늘 21세기의 우주론에 적합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사무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의 무신론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예수의 기독교는 사회적 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적이며 자유케 하는 참된 종교라고 인식한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교회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며, 종교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빠져있다. 기독교인들은 종교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야 하고, 교회 밖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가 무엇이며,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해나가는 일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