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경축하는 기록은 없다. 또한 원초적으로 성탄절은 교회의 절기가 아니었으며, 초대 교회의 절기들 중에 성탄절은 없었다. 4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세속적인 태양절을 성탄절로 전환해서 예수 탄생을 경축하는 교회절기로 지키기 시작했다. 오늘 성탄절을 축하하는 대부분의 풍습들은 태양절에서 가져왔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믿어야하는 교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성탄절은 오직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예수 탄생 이야기는 그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인의 예수상을 형성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되어왔다. 다시 말해 2천 년 전 기록된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예수의 의미는 물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달라진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를 하늘에서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신약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성탄절 이야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내용의 세 개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이 기록될 때에 이미 다양한 예수 전승들이 여기저기에 퍼져있었으며, 마태(주후 80년), 요한(주후 90년), 누가(주후 110년)는 성탄절 이야기를 각각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서로 다르고 독특하게 기록했다. 또한 최초의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주후 50년) 저자인 바울과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가(주후 70년)는 예수 탄생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비평은 복음서 저자들이 소개하는 역사적 예수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이다.
성서 전체가 그렇듯이 마태, 누가, 요한이 성탄절 이야기들을 기록한 목적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을 문자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동정녀 잉태와 이상한 별과 동방박사, 목자들, 베들레헴 말구유의 출생은 특별한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 수단들이다. 특히 동정녀 잉태와 특별한 별은 고대사회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들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적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 즉 예수의 정신을 통해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체험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을 예수 탄생 이야기로 밝히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겁함이 용감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연약함이 강인함으로, 불가능함이 가능함으로 전환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예수의 탄생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물이나 예수의 신성 보다는 예수의 정신이 훨씬 더 소중했다.
기독교 성서의 기능과 목적은 하나님이 쓴 절대적인 계시와 권위의 책이라고 주장하는데에 있지 않다. 또한 기독교 보다 500여 년 전에 탄생한 불교와 힌두교의 경전들을 무시하고 성서 만이 온 인류에게 유일한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서는 고대 히브리인들과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3천 년 전부터 1천여 년 동안 암담한 시대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려는 꿈과 비전을 내면으로부터 깨닫고,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삶의 용기와 지혜를 얻게된 이야기들이다.
성탄절 이야기가 역사적인 보고서 즉 예수의 자서전이 아닌 성서비평학적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로, 예수가 신비스럽게 탄생하였다는 전승은 기독교 교회가 탄생한지 비교적 후대의 전승이다. 성탄절 이야기들은 마태와 누가의 처음 두 장에서만 발견되는데, 이 이야기들은 예수가 죽은 후 80-110년이 지난 1세기 말엽에 기록되었다. 마태와 누가 이전의 최초의 성서 저자들은 예수의 특별한 탄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서의 최초의 저자인 바울과 최초의 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예수 탄생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요한복음서는 마태와 누가보다 더욱 후대의 것으로 성탄절의 의미를 동정녀 잉태없이 신학적으로 설명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최소한 예수의 특별한 탄생을 언급하지 않고도 신약성서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2) 둘째로, 마태와 누가의 성탄절 이야기는 예수의 족보와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과 말구유에 방문한 사람들과 헤롯왕의 음모와 히브리 성서를 인용한 것 등에 대해서 서로 모순되게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역사기록에 의하면 황제의 칙령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한 시기는 예수가 탄생했던 때가 아니라 헤롯왕이 죽은 후 10년이 지난 때였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장소와 때와 이름들이 서로 일치하고 정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성탄절 이야기의 욧점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3) 셋째로, 성탄절 이야기들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의 전주곡으로 기록된 것처럼 보인다. 즉 각각의 성탄절 이야기의 핵심적 주제는 그 복음서 전체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마태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선포했고, 누가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사회적 예언자로 선포했고, 요한은 예수의 하나님을 창조적 에너지로 선포했다. 다시 말해, 성탄절 이야기들은 각 복음서 저자들의 독특한 문학적 창작품이다.
결론적으로, 성탄절 이야기들의 핵심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탄압과 성전신학의 이분법적 차별 속에서 암담하게 살아가는 98%의 민중들이 암흑같은 절망 속에서 선명하게 보았던 희망의 빛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까지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2%의 부유층 사람들 편에 서기 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98%의 평범한 사람들 편에 섰다. 예수는 그들에게 암담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 비치는 빛이었다. 마태는 별이 어두운 밤하늘에 밝게 빛나서 동방 박사(들)을 예수가 출생한 장소까지 인도했다고 기록했다. 누가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천사가 그들에게 예수 탄생에 관해 말해 주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밤하늘을 메우고, ‘하느님께 찬양!’을 노래했다고 은유적으로 기록했다. 빛과 어두움의 상징법은 인류 역사에서 대단히 오래된 문학적인 표현방식이다. 빛과 어두움은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어두움은 두려움, 무지, 편견, 욕심, 절망, 상실, 혼돈, 죽음, 위험, 새벽을 기다림 등을 의미한다. 빛 속에서 사람은 깨어 있고, 볼 수 있으며 자신의 길을 찾는다. 빛 속에는 생명이 있다.
1세기에 기록된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의 심층적인 의미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경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 사람 예수는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의 어두움에 빠져 있을 때에 희망의 빛이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성탄절 이야기의 의미는 죽은 후에 천국가는 꿈을 버리고,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예수처럼 어두움 속에서 빛이 되어 살 수 있다는 용기와 결단과 희망을 확신하는 것이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부터 교회 기독교는 서방세계의 문화를 장악하고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의 원초적인 메시지를 숨기고,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이고 제국적이고 교리적인 성탄절 이야기로 변질시켰다. 2000년 전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은 동화처럼 읽거나 안일하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있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이야기들을 처음 기록한 사람들은 뜻깊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혹독한 로마제국의 탄압 아래에서 예수의 탄생, 즉 암흑 속에서 절망과 슬픔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성스러운 순결함의 탄생은 삶의 용기와 힘과 희망이 되었다. 오늘도 성탄절에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벌리고 그렇게도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스러운 순결함의 탄생’은 길잃고 절망 속에서 헤메는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지구촌은 전쟁과 테러와 빈곤과 질병과 생태계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하루에 수 천 명의 어린이들이 홍역과 파상풍과 디프테리아로 죽어가고 있고(www.poverty.com), 전 세계적으로 한 해에 수십만 명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www.worldhunger.org) 또한 지구 상에 약 수천만 명이 HIV/AIDS로 고통 중에 있으며 하루에도 수천명이 죽어가고 있다.(www.unaids.org)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 성탄절의 참된 의미라면, 기독교인들은 지구촌의 희망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른 종교인들과 다른 인종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AIDS 환자들과 빈곤한 어린이들을 더러운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징벌을 받았다고 배척할 것인가?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스러운 생명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전하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일 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 축하해야 한다. 성스러운 순결함의 탄생인 성탄절은 사랑과 평화와 함께 아파함이 변함없이 탄생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순결함의 탄생은 과거에 한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다.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탄생 이야기의 심층적인 의미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우선적인 임무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기독교인의 임무는 타협함이 없이 하느님의 정의를 살아내는 것이다. 참 사람 예수는 그렇게 살았다.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일년에 한번있는 축제에 있지 않다. 그의 탄생은 모든 생명과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끊임없이 축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