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인으로 맹신하는 중보교회 기독교는 매우 자기 도취적이며, 모든 에너지를 자신을 선전하고 변명하는데 쓰고 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설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설명하고 기독교 교리를 방어하며, 교회의 의식들은 죄의 회개와 용서로 가득하며, 교회 절기들은 초자연적인 예수의 신성을 세뇌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내용은 채색된 베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다. 또한 이 채색된 베일은 교회의 방패막 내지는 보호막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그 방패가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사람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위험 속에 몰아넣는다. 교회는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은폐하는 채색된 베일 즉 거짓과 은폐의 방패막과 보호막을 전체적으로 벗겨 버려야 한다. 새로운 종교개혁은 1차 종교개혁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규모로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상징물들을 철저하게 파괴해야 한다.
중보교회가 채색된 베일을 벗겨 버리고, 상징물들을 아낌없이 내려놓기를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은 살로메의 관능적인 춤 이야기가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살로메가 관능적인 춤을 추면서 그녀의 일곱 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 던지며 마지막 베일을 벗겨내어,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육체와 유혹이 단지 그 베일들이 움직임으로써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살로메의 춤을 보는 남성들은 일종의 주술적 환상에 빠지면서 자신의 윤리적인 인식과 이성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러나 이 남성들은 거기서 해방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발가벗겨진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또는 모른체하기 때문에, 그들은 채색된 베일에 집착하며. 심지어 거기에 세뇌된다.
참 사람 예수를 채색된 베일로 은폐하고,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으로 변형시킨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내세적인 교회 기독교로부터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 기독교로 개혁하기 위하여 잔인하고 추악하게 채색된 베일 모두를 벗겨낼 각오를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성서근본주의와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교리들을 파괴하고, 중보교회의 주술적 환상을 포기해야만 한다. 인생 전부를 채색된 베일에 바친 일반 교인들은 그 마음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벗어 던질 때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개혁을 원하지 않으며, 채색된 베일을 벗지 않으려는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교회 신자들은 채색된 베일의 믿음이 실재적이고, 죽음 후에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에서의 영원한 삶을 보장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무작정 믿는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믿는척이라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채색된 베일에 대해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추방하기 때문이다.
초창기부터 정통 유대인들, 가톨릭 신자들, 이슬람교도들, 개혁교인들, 복음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경전을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회의주의 또는 허무주의라는 저주와 정죄로 잔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회의주의자들이 선포하는 비판적인 의심이라는 도전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인 보수적인 신자들은 교조적인 바위를 발견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의 생존의 방법이라고 잘못 믿어왔다. 다시 말해, 회의주의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대안은 도그마를 끌어안는 것뿐이다. 교조주의적 생명줄을 움켜잡은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들이며 곧 중보종교의 채색된 베일 자체가 그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것인 것처럼 거기에 매달리는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솔직하게 이해하는 진실을 직시하기 두려워하는 광신적 교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채색된 베일 뒤에 은폐된 우주적인 사실들 즉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 우주세계의 불확실성, 자연과 생명과 인간은 초자연적인 힘이 미리 계획한대로 완성품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우연성과 자연성,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인간을 포함해서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는 한 몸이라는 우주적인 통합의 진실에 대해 직시하기를 거부한다.
(참고: 허무주의의 출발점은 18~19세기에 계속해서 좁아져가는 초자연적인 절대성과 신의 모습은 설득력과 효력을 잃었으며,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경험론을 마무리 지은 데이비드 흄이 제시한 회의주의(회의론) 사상이다. 과학적 탐구를 통한 합리주의 사조에 의해 초자연적인 신의 자리는 점차 좁아져 이신론, 무신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신, 구원, 진리로 대표되는 추구해야할 절대적 가치 및 권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교회 기독교 신자들은 죽음이 다가올 때,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믿음이 배타적이고 우월적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직면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위로한다. 그들은 내세에 대한 헛된 꿈 속에서 죽는다. 그것이 그들의 종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오직 믿는 것에 열중했기에 결코 살았던 적이 없다. 그들은 생의 진실을 결코 온전히 알지 못했고, 태양 같은 삶이 지고한 종교적 기쁨인 것을 알지도 못한다. 단지 소위 믿음 충만한 은혜의 상태에서 죽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기독교의 채색된 베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행한다. 그들은 그 모두를 믿는다. 다시 말해, 신자들은 믿는 모든 것에 대해 이성적이고 지성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치명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 위로받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들은 거룩하다는 평판 속에 죽기 원하고,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모른체 죽는다.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추모하는 사람들도 고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속임수를 쓰면서 안심한다. 또한 미래의 후세대들은 그들의 믿음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는 사람들이다. 마치 그들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자신을 이집트의 태양신으로 착각하고, 죽을 때 금박 누에고치 상자 속에서 영원히 봉안되기를 원하는 것과 흡사하다. 신자들은 살아있는 날 동안 이러한 환상을 벗겨 내어야 한다. 자신들의 삶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이성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오류 속에서 살다 죽는 것은 참된 행복이 아니다. 신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환상의 누에고치 상자에 갇혀서는 안된다.
호모싸이엔스 인간은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 마음 속에서 삶의 진실을 안다. 우리가 그것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기 전까지 우리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하며, 아울러 우리가 태양 같은 삶 즉 영원한 삶을 시도하기 전까지, 또한 우리가 태양 같은 삶을 맛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인생의 종교적 기쁨이 이떤 것인지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임종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만 할 그런 존재가 되는 데에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니다. 이 세계 이외에 댜른 세계는 없으며 또한 다른 생이란 없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이생에서 그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놓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죽어가는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라도 말해져야만 한다. 장례식에서 거짓된 위로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그토록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진실을 은폐하는 채색된 베일을 벗어버리고, 그들 자신의 신앙을 개혁하도록 설득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 기독교를 향한 고통스런 작업을 해나가도록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참 사람 예수를 채색된 베일로 은폐하고,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으로 변형시킨 교회도 마찬가지다. ... 다시 말해, 성서근본주의와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교리들을 파괴하고, 중보교회의 주술적 환상을 포기해야만 한다."
=> 교회를 유지하는 한 이게 가능할까요? 교회를 해체하지 않고 참 사람 예수를 찾는 교회개혁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