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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渡河法(물을 건너는 방법)에 관한 두 가지 오래 된 기억
출애굽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두 번 건넌다. 하나는 출애굽의 시작을 알리는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의 마침표라 할 수 있는 요단강을 건너는 대목이다. 양자 사이 차이점은 뭘까? 전자는 모세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진 후에 물을 건넜다는 것이고, 후자는 아직 요단강이 마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본인들의 발을 물로 내밀었다는 점이다.
종교적 아이콘(Icon)들, 이미지(Image)들은 구도자와 절대자 사이 공간을 메우는 부피를 지닌 덩어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표징들을 바라보면서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확인한다. 종교성의 발전과정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래서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눈(目)의 종교’라 정의했다. 모세가 손을 벌리자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났고, 그 땅을 밟고 사람들이 건너갔다는 스펙타클한 광경(view)에 대한 묘사는 야훼종교가 지니는 ‘눈(目)의 종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 대목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호수아서>에 가서는 야훼종교 내에서 반동이 일어난다. 시각적 종교에서 감각적, 촉각적 종교체험으로 그 자리가 옮겨진 것이다. 대부분의 고등종교가 ‘눈(目)의 종교’로 발전되고 있는 가운데 야훼종교는 ‘촉(觸)의 종교’로, 혹은 ‘귀(耳)의 종교’로 퇴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은 시대를 거스르면서, 시대에 반하는 종교적 회귀를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영화 <기생충>과 엮어서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 읽기의 전복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지각의 현상학’으로 <기생충> 읽기
영화 <기생충> 전체를 끌고 나가는 동력은 냄새, 후각이다. 이 영화는 냄새를 통한 상상으로 시작해서 냄새로 인한 파국으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가 쓴 <지각의 현상학>을 생각했다. 퐁티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정신이 아니라 감각이다. 이 말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야기란 이성의 힘으로 흩어진 기억과 서사를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으로 엮어낼 때 탄생한다. 흩어진 산만한 질료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로고스와 코기토, 즉 이성이었다.
이러한 전제에서 전통적으로 인식이란 참된 본질에 대한 인식이고,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어 칸트로 이어지는 근대적 주체는 참된 본질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으로 가득 찬 주체였다. 그런데,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동안의 합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명확한 이성이 아닌 불확실한 감각을 사건의 근거로 소환하면서 그는 말한다. 본질은 이데아로서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 위치한 개별자가 느끼는 어떤 있음에 대한 이해라고 말이다.
<기생충>을 보면서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생각난 것은 그래서였다. 영화는 주체가 합리와 이성에 의해 사고하고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후각에 의해 충동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극에서 사건을 만들고 사건들의 연쇄가 현실에 절단선을 그어 숨겨진 실재(the Real)를 드러나게 한다. 그 절단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냄새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이 영화에서는 냄새와 관련된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박사장(이선균)과 연교(조여정)사이 어린 아들(다송)이 극 초반에서 냄새와 관련된 복선과도 같은 말을 던지면서 영화가 감춰놓은 파국의 지점을 미리 암시한다. “저 아줌마(가정부, 충숙), 아저씨(운전기사, 기택), 선생님(미술선생, 기정) 모두 같은 냄새 나.” 이후 기택 가정은 반지하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냄새를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 서로 다른 세탁비누로 빨래를 해야 한다는 둥. 이때 기정이 그건 지워질 냄새가 아니라고 한다. 반지하에 살면서 나는 냄새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계속 그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박사장이 연교와 이야기할 때 기택에 대한 평을 하다가 기택이 선을 넘을락 말락 하지만 결국 안 넘는다고 만족을 표시한 후에, ‘다 좋은데 그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꼬집는다. 이 말을 기택은 거실 식탁 밑에 숨어서 직접 듣는다. 본격적으로 기택에게서 냄새에 대한 콤플렉스가 발동하는 지점이다.
21세기 자본에서 새어나오는 가난의 냄새를 그리다
영화에서 냄새라는 말 대신 가난, 빈곤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보면 어떨까. 뜻이 완벽히 통한다. 앞서 기정이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반지하방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반지하에서 벗어나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이 냄새는 어쩔 수 없다고 했는데 가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까. 예전 가난했던 우리는 그 가난에서, 아니 그 냄새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폭력과 부자유와 부정의가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체취를 지우려고 뒤도 안돌아보고 달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쩌면 가난을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던 시절은 좋았던 때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1세기 자본은 내가(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사회는 그나마 소망이 있는 사회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절대 용이 나지 않는다. 가난은 유전되는 질병으로 세습되면서 절대 어떤 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운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세상 모든 ‘을’들의 삶을 <기생충>의 그것으로 묘사하였고, 그들에게서 풍겨나는 냄새의 현상학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이러한 메시지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촌의 모든 인민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보편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칸느영화제 심사위원들은 판단하였다.
기택은 결국 냄새 콤플렉스 때문에 박사장을 찔러 죽인다.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 가난에 대한 한과 설움 때문에 찔러 죽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냄새였을까. 냄새의 고고학, 혹은 감각의 지형학 같은 것을 동원하면 좀 더 <기생충>을 분명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스쳐지나 갔다.
포스트모던적 독법: 감각의 계보학과 봉준호의 장르파괴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촉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보지 못하는 동물, 맛을 못 느끼는 동물, 냄새를 못 맡는 동물, 듣지 못하는 동물은 있어도 촉각이 없는 동물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해석한다면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촉각으로 야훼종교가 회귀했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문명이전 인간의 생명활동은 주로 감각 능력에 의존하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감각의 능력 대신 추상적 이성의 능력이 득세를 한다. 추상작업은 어떤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고 그것을 바라보는(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때, 시각은 감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감각은 욕망과 감성의 영역이었고, 추상은 이성적, 윤리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이러한 정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19세기에 등장한 니체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의 정신사를 이성과 의지에 의한 감성과 욕망에 대한 억압과 배제의 역사라 비판한다. ‘아폴론적인 것’에 의해 ‘디오니소스 것’이 배제되고 가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 자행된 인류문명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욕망과 감성, 즉 감각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 는 것이 니체와 니체에게서 영향받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장면과 영화 <기생충>은 포스트모던적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 그리고 냄새의 현상학으로 21세기 자본을 그리는 <기생충>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를 드러내고 진술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후각으로 현실을 인지하고 행위를 한다는 설정은 위태로운 서사의 문법이고 불안한 상황인식 일는지 모르겠다.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간의 시선인데, <기생충>을 보는 내내 카메라가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나는 빠졌었다. 아마도 그런 시도가 관객들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에 빠지게 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봉준호 감독의 장르적 특징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영화적 문법을 파괴하면서 형성되는 <기생충>의 장르파괴에 대한 내용이다. 그래서였을까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황금종려상으로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영화를 본 후 모두 이 영화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여러 장르를 혼합하여 우리를 이끈 미스터리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르 영화도 정치 영화도 아니면서 사회적인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전개하는 능력, 관객들의 감정선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의 결과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만장일치의 결정을 내렸다."
<기생충>은 봉준호식 장르파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로 등장하는 것이 시각이 아니라 냄새, 즉 후각이다. 후각의, 후각에 의한 전복성! 그것으로 봉준호는 관객을 다른 인식의 세계로 인도하였고, 그래서 똑같이 지루하게 펼쳐지는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였다.
에필로그: 다시, 텍스트와 종교를 묻다
나는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도 당시 지배종교들이 지니 있었던 종교적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향한 장르 파괴적 효과로 보고 싶다. 요단강을 도하하는 과정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는 장면은 발이 물에 닿는 촉각의 현상학으로 신적 사건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당시 전개되던 맘몬(우상)을 향한 시각 종교, 지배 종교를 향한 대항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장식을 제거하고 거품을 빼고 원초적 종교심으로 돌아가라는 경고 말이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이제는 신의 표상(상징) 따위는, 신의 아이콘 따위는, 아니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보여지는 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신적 위계와 권위와 질서 따위는 필요없다,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눈앞에서 우리를 현혹하는 퍼포먼스가 없어도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신을 향한 확신은 변함이 없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집단적 확신이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것이 아닐는지.
그런 이유로 아직 마른 땅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퍼런 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실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무런 눈에 보이는 싸인(sign)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흐르는 물을 향해 몸을 맡길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새 역사를 스스로 창조해 갔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신을 마침내 쟁취해냈다, 고 말한다면 너무 불손한 발언이 되는 것일까.
영화 <기생충>은 전형적인 영화문법에 대한 불손함의 실험이고, 시퍼런 물이 흐르던 요단강에 발을 먼저 내 딛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기존의 틀에 박힌 신앙을 거역하는 불손한 사람들이었다. 관습을 벗어나고, 장르를 뒤집고,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어쩌면 신앙이란 그것을 감행하는 용기이고, 그 과정에서 혹 발생한 상처를 향한 위로와 애도이며, 꿈꾸었던 성숙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잠시 쉬고 다시 어디론가 길을 떠날 것을 다짐하는 마음 아닐는지.
결론적으로 <기생충>은 전복적 텍스트 읽기에 대한 상상과 쾌락으로 나를 인도했던 유쾌하고도 위험한 영화였고, 나로 하여금 종교를 사유하는 방법에 관하여, 관성화 된 믿음에 대해서 삐닥하게 바라보게끔 하는 단서를 제공한, ‘종교적인 것’에 관한 영화다.
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1145?fbclid=IwAR2z5BuLEgY7rvRu_ORGb4oH0oSN1gnY-LQsplhnI3rn0glC5SWIe7UJQ0g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