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성서 구절로 둘러댄다. 특히 대답하기 곤난한 질문을 받으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방법으로 “성경책에 이렇게 기록되었다”라는 서두로 시작해서 우수꽝스러운 논리를 펼친다. 사실상 수천년 전에 기록된 고대 성서는 21세기의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따라서 구태여 억지로라도 답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의 정직하고 참된 신앙은 성서를 백과사전 또는 역사책이나 과학책으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에게 솔직해야 한다. 성서를 매일 읽고 암송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이 아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위협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성서는 믿어야 하는 교리책이 아니라, 오직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행복한 길을 탐구하는 책이다.
오늘날 교회에 습관적으로 또한 수동적으로 다니는 수많은 신자들은 문자적인 성서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맹신하고 있다. 따라서 자의반 타의반 자신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채 불쌍한 노예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다. 신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에 하느님이 천지와 만물을 말로 창조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미리 계획한대로 세계를 완성품으로 창조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또한 예수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린아이같은 생각이다. 주류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저자가 하느님이고, 예수가 스스로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지위를 주장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 성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답이 된다는 주장은 낡은 거짓말이다.
신자들은 성서에 대해 철저하게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 하느님을 맹신하게 되었다. 즉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어떤 의심과 질문은 불신앙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에 정신이상적으로 세뇌되어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음의 질문들을 엄중하게 금지시키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서의 기록은 누가 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했을까?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고대인들은 21세기의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기록했을까? 그들은 편견과 오만이 없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관찰자였을까?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19세기 이래로 신학자들은 성서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믿을 만한 문서들이 아니라는 압도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또한 이 사실을 밝히는 성서비평은 북미와 유럽의 주류 신학교들의 필수과목에 포함되었다. 특히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기록되었다. 심지어 복음서들은 예수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보다 한참 뒤에 기록되었다. 그 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사가들에 의해서 복사되고 또 복사되었다. 사실상 성서 원본은 실종되었고, 다만 무수히 많은 사본들에서 사본들로 난잡하게 복사되었고, 수많은 사본들만 남아 있으니, 성서의 원초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더욱이 성서의 원래 저자가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1000년에 걸쳐 지리멸렬하게 복사된 문서들이 혼란스럽게 엮어지고 수정되고 왜곡되고 극소수의 의도적으로 선별된 모음집이 될 수 있는가?
성서 기록자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종교적 의도가 스며든 좋은 사례로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전설과 헤롯 왕이 유아를 대량 학살할 당시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예수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에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유대인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에 따라(미가서 5:2)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며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추종자들이 놀랐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분은 그리스도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복음서 저자들인 마태와 누가는 어쨌거나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설정하고 그
문제를 다른 식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출생지를 베들레헴으로 서술하는 과정은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이 항상 베들레헴에 살다가 헤롯왕의 유아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도피했으며, 거기에서 돌아오는 길에 즉, 예수가 태어난 지 한참 뒤에야 나사렛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반면에 누가는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나사렛에 살았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예언을 충족시키려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는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아우구스트스황제가 과세 목적으로 인구 조사를 한다면서 모두 자신의 동네로 돌아가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다. 누가는 상당히 문학적인 재질이 있었으며 그것이 원만한 해결책처럼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터무니 없는 헛소리다. 다윗이 실존인물이라면 그는 마리아와 요셉보다 거의 1000년 전 인물이다. 도대체 식민지의 유대인들을 하찮은 사람들로 탄압하던 로마제국의 통치시대에 로마인이 요셉에게 1000년 전의 먼 조상이 살았던 동네로 가라고 할 필요가 없다. 로마제국이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많이 거두어 들이기 위한 것이라면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현지에서 세납자로 등록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설상가상으로 누가는 두서없이 사건들을 언급함으로써 연대를 제시한다. 실제로 구레뇨 총독 때 지역 수준의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아우구스트스 황제가 로마 제국 전체에 포고령을 내린 후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헤롯왕이 사망하고 한참 뒤인 서기 6년에 있었던 일이다. 따라서 누가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모순투성이며, 다만 미가서의 예언에 짜맟추려는 누가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서를 역사책으로 읽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일이다.
또다른 사례로 성서가 소개하는 성탄절 이야기의 모순과 함정들을 밝힌다. 예수의 탄생을 다룬 단 두 명의 복음서 저자인 마태와 누가의 말에서 모순되는 점들을 나열하자면, 동쪽의 별, 처녀 출산, 왕들의 아기 숭배, 기적, 처형, 부활과 승천 등 예수의 전설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모두 지중해와 근동 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다른 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초적으로 성서는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부족적이고 민족적인 책이다. 따라서 성서 저자들은 유대인 독자들을 위해 메시아 예언들(다윗의 자손, 베들레헴 출생)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결국 기독교를 비유대인의 그리스도교에 맞추고자 한 마태의 욕망과 그리스의 종교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교리들(처녀 출산, 왕들의 숭배 등)을 받아들이려 한 누가의 욕망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렇게 성서의 모순들은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신자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다.
성서의 문자적인 기록들은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서를 직역적으로 믿는 소박한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가르쳐 주는대로 앵무새처럼 수동적으로 되풀이하고 암송하면서 성서는 하나의 오류와 모순도 없이 절대적으로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성서가 정확한 역사 기록이라고 우겨대며, 그것을 자신의 종교 신앙을 지탱해 주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하다고 믿는 그 책을 정직하게 이성적으로 오늘의 세계관에 맞추어 이해하려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한다. 왜 그들은 뻔히 보이는 모순들을 못 보거나, 못 본체하는가? 성서에 대해 거짓된 가르침에 병적으로 세뇌었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모순과 오류와 왜곡이 가슴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 다시 성서의 모순을 밝히자면, 마태는 요셉이 다윗왕의 28대 후손이라고 말한 반면, 누가는 41대 후손이라고 말한 사실에 왜 직역주의자들은 고민하지 않는가? 게다가 두 족보에는 겹치는 이름이 거의 없다. 성서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면 불신앙이라는 비난을 받고,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하늘의 징벌이 내릴까 두려운가? 하여튼 예수가 정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그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우수꽝스러운 촌극의 대사이다.
미국의 성서학자 바트 어만은 자신의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책의 부제로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라고 붙였다. 이 책은 신약성서에 드러난 엄청난 불확실성을 밝힌다. 서문에서 어만 교수는 성서를 믿는 근본주의자에서 사려 깊은 회의주의자로 변모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여정 즉 성서에 대량의 오류가 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된 여정을 감동적으로 서술한다. 어만 교수는 무디 성경 연구소에서 출발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모교인 휘턴 대학교를 거쳐 세계 최고 수준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진보주의에 맞서 자신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 경고는 옳았다. 그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의 깨달음과 변화로 인해서 필자를 포함해서 수많은 학생들과 독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성서에 대한 편견과 오만을 떨쳐버릴 수 있었으며 성서에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경전이 된 네 편의 복음서는 도마, 베드로, 니고데모, 빌립, 바돌로매,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하여 적어도 12편 정도 되는 복음서들 중에 임의로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신학에 짜맞출 수 있는 내용의 복음서들만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네 개의 복음서 저자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역사를 정확하게 기술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약성서를 재탕한 것이다. 충실한 유대교인었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구약성서의 예언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 세계적으로 명성있는 성서학자들은 신약성서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구약성서도 마찬가지 이지만), 성서를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하기 대단히 어렵다. 예수가 처녀의 자궁에서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에 의해 신비하게 잉태되었다는 이야기는 미네르바가 주피터의 뇌에서 나왔다는 신화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와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기독교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기독교인들은 영화 상영에 반대하고 상영관 앞에서 시위를 벌렸다. 사실상 그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이다. 즉 창작된 소설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성서의 이야기들과 똑같다. <다빈치 코드>와 성서의 유일한 차이점은 성서가 오래된 고대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다.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공정한 분배의 정의와 참된 인간됨과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한 하느님 나라 건설 운동을 전개할 때에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예수를 따랐던 가장 큰 동기는 예수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상 예수는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예수가 죽은 후에도 초대 교회를 세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신뢰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변화시켰으며,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삶이 새롭게 되었다. 결국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것이 신앙과 삶의 목표였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그들이 예수를 닮았다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기록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세기 초에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인 야욕으로 교회에게 니케아 신경을 강제로 만들게 한 이후부터 예수의 신성론이 교회기독교에 잠입해 들어왔다. 21세기에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신성과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맹신하고, 그 보상으로 죽은 후에 천국 가기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핵심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 지금 여기 현세에서 모든 사람들이 우주적이고 통합적으로 온전하게 사는 것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