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따르면 딸을 노예로 파는 것은 허용이 되지만(출애굽기 21:7) 아들을 노예로 팔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또한 이웃 나라로부터 온 노예만 소유할 수 있는데(레위기 25:44) 그렇다면 캐나다인은 미국과 멕시코에서만 노예를 데려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서에서 사형집행이 가능한 죄목들은 안식일을 어기거나(출애굽기 35:2), 저주를 하거나(레위기 24:13-14), 불경스러운 경우(레위기 24:16)인데 그렇다면 교도소의 사형집행관들은 매일 초과 근무를 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에 돼지 가죽으로 만든 것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 구기 종목의 운동선수들은 사형에 해당된다. 성서에는 고집 불통이고 부모 말을 안따르는 아이들은 성문 밖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신명기 21:18-21) 이런 괴상하고 말이 되지 않는 구절의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 구절들이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나?
구약성서의 모세는 모세 5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모세 5경이 처음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모세가 죽은 후 300년이 지난 후였다. 모세 5경은 적어도 500년 동안 여러 자료를 수집해서 작성한 것이며, 특히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과 장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저자도 자신의 죽음 순간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다. 또한 다윗은 시편 저자가 아니다. 성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밝히기를, 시편의 대부분은 유대 역사상 기원전 596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시작되어 기원전 40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바빌론의 포로 기간에 작성되었다. 즉 다윗 왕이 죽은 후 400년에서 600년 사이의 기간에 해당된다.
성서에서 간질병과 정신병이 모두 귀신들림으로 생기고, 벙어리라고 부르는 심한 귀머거리는 악령이 혀를 묶어 놓아서 생긴다고 주장하는 구절들을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졌다거나 혹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은 그저 황당할 뿐이다. 다시 말해, 그런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폐기된 낡은 지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물 위를 걷거나 폭풍우를 잠재우고 물을 포도주로 변형시키는 등 기적을 행하는 초인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하느님은 기원후 1세기에 우주의 자연의 법칙들을 모두 일시 정지시켜 예수가 신적인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예수의 삶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서에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심층적인 의미는 문자적인 기록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가슴과 머리에서 깨달아 알게 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들에서 바울은 열정적인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적 갈등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성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가당치도 않다. 바울과 하느님을 혼동할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을 구별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서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가 신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예배시간에 여인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한 충고나, 아담과 하와의 고대 히브리 전설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한다는 바울의 말들이 있다(고린도전서 11:2-16). 바울이나 그의 제자가 여인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종은 그 주인에게 복종하고, 아이는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이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은 가치 없는 문화적 성차별주의, 인간에 대한 부도덕한 억압, 좋은 부모의 개념에 대한 오류만을 나타낼 뿐이다. 하느님이 이런 무가치한 개념으로 인식된다면 그런 하느님은 분명 제대로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주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복음서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 주후70년경에 마가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20-40년 후에 기록된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마가복음서를 대폭 인용한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서의 내용을 임의로 바꾸고, 확장하고, 심지어 누락시킨 후에도, 성서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억측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방식은 결코 “하느님의 말씀” 또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작성된 것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마태와 누가가 주기적으로 마가의 서술과 의견을 달리했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기술을 했다. 특히 누가는 마가의 기록을 멋대로 다루었으며 문법적 오류까지 편집할 정도였다. 예를 들자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마가 16:8)로 끝냈지만, 누가는 이를 빼버렸다(누가 24:1-12). 마가복음서 3:7-10과 누가복음서 6:17-18을 비교해보면, 누가가 마가의 본문을 마음대로 뜯어고쳤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서 저자들은 분명히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의 히브리 맥락으로부터 성경적 이야기를 엮어 내어, 예수가 예언자들의 예언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구약 성서의 원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수백년에 걸쳐 수많은 필사가들이 사본에서 사본으로 수없이 복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본들 중에 극소수를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다. 물론 복음서의 원저자가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은 원저자의 이름이 아니며 어느 필사가가 이렇게 복음서의 제목을 달았을 뿐이다. 또한 이 이름들의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이 필사가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자료를 멋대로 변개하고 삭제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삽입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사본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성서는 앞뒤가 맞지 않으며 오류와 모순 투성이기에 “하느님의 뜻” 또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없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태가 이런 짓을 제일 많이 했다. 예를 들자면,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구약성서의 이사야서(7:14)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구약 본문을 번역하면서 “동정녀가 잉태하여”(마태 1:23)라고 했는데, 이사야서에는 “동정녀”(virgin)라는 말을 쓰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젊은 여인이 아이가 있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21세기에 젊은 여인이 아이가 있으면 당연히 동정녀가 아니다. 또한 마태는 구약성서에서 한 거룩한 사람을 나실인(nazirite)이라고 지칭한 부분(사사기 13:5)이나 “가지”(branch)를 뜻하는 나시르(nasir)라는 말을 사용한 부분(사사기 11:1) 중 하나를 조작하여 히브리(구약) 성서가 수세기 전에 예수가 나사렛(Nazareth)이라는 마을에서 자라게 될 것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복음서 저자라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말장난이다.
예수가 죽은 후에 그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후대에 교부(敎父)라고 칭했다. 이들은 누구도 성서를 반박할 수 없는 가설을 창안하기를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불안한 가설의 기초 위에 기독교 신조, 교리, 도그마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신조와 교리에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승천이 포함되었는데, 오늘날 세계적인 성서학자들 중에 이 두 이야기가 글자 그대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예수가 행한 일을 예언자들이 예언했다고 믿는 학자도 없다. 이는 모두 성서에 대한 엄청난 왜곡일 뿐이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쟁은 교부들이 만든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는 예수가 죽은 후 40-70년이 지나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히브리 성서와 서로 일치하도록 기록되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함에 따라 현대 기독교 교회의 많은 교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서가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은 잘해야 문제 투성이고, 못하면 우스개 소리 밖에 안된다. 이런 주장에 의존하는 성서의 권위와 그 문자적인 기록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주장하는 한 기독교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다. 성서 비평학에 기초한 성서에 대한 분명한 진실을 신경질적으로 부정하는 복음주의 개신교와 보수 가톨릭 같은 우익 교회들은 정말로 희망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런 교회에 권위와 확신을 갈망하는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모여들어 대형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내부적 질병의 또 다른 증상일 뿐이며,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기 싫거나 도피하는 비겁함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불행하게도 2천년 전 이 땅 위에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하게 공평하게 정의롭게 조건없는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쳤던 역사적 예수가 잔혹하게 당했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면 이 메시지를 거부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성서가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에 의해 촉발된 가장 큰 비극은 교회 기독교에 임박한 몰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비참한 비극은 성서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만행에 대한 도덕적 갈등에 있다. 오늘 기독교 교회는 인류 역사에서 성서 악용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고 스스로 개혁할 때이다.
제도적인 교회 기독교는 지금까지 성서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에 근거하여 권력과 권위를 추구하느라 참된 인간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와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아 알지 못했다. 예수가 성전을 향해 도전했던 것처럼, 기독교가 지금까지 이 참된 의미들을 숨기는 데 사용해왔던 성서와 교리와 교회와 전통이라는 우상은 철저하게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이것들이 파괴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솔직할 수 있고, 참된 인간으로 모든 사람들이 더욱 공평하게 풍성하게 살고,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들을 축소시키고 제한하는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빈부차별을 철저하게 거부해야 한다.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성서의 죄악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과 인간과 자연과 세계를 보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