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날지 모르게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지구적 위기에서 이기적인 불량 종교와 불량 언론과 불량 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코로나와 함께) 단계에 들어가면서 모든 국민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위험한 장애물은 이기주의이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종교와 표현에 대한 개인의 자유에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국민의 기본권이란 국가에 대하여 요청할 수 있는 개인의 주관적 공권(公權)이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법률은 사회적 내지는 국가적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의 인간의 생명권, 평등권, 명예, 인격권,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자유롭게 살 권리와 명예와 인격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의 침해는 금지된다. 진리를 추구하며 사람 답게 살려는 개인의 권리는 개인적 영역을 넘어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가 수반된다.
최근에 코로나19 팬데믹의 국가적 위기에서 온 국민이 협력하여 공동체적으로 바이러스 감염 확산을 방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보수성향의 종교인들과 이것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은 개인의 종교 자유와 표현 자유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를 혼돈과 불안 속에 빠트리고 있다. 이렇게 개인적이고 부족적인 자유의 권리를 주장하는 불량 믿음과 불량 정치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이기적인 자유의 권리 주장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이분법적이고 파렴치한 믿음의 종교인들은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감염 예방 수칙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를 거부하고, 군중집회와 예배모임을 감행하는 몰상식한 행위로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자유와 믿음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은 커녕 저주가 될 뿐이다. 하느님의 진리 또는 하느님의 말씀이란 말의 의미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정의로운 우주적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분열과 혼돈의 원인이 되면서 사회 전체에 차별적이고 부족적인 폭력과 저주가 되고 있다. 교회 예배에 충성하는 신자들이 인식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리지 않아도 하느님의 징벌과 심판은 없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 감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집단예배를 자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하느님은 바이러스 팬데믹에 대해서 무식하고 무지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바이러스 팬데믹 따위의 재앙을 계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감염확산에 속수무책이고, 내일 바이러스 팬데믹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하느님은 바이러스 팬데믹과 천연재해와 불치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하느님의 진리는 참 사람 예수가 깨닫고,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진리인 데, 진리를 추구하는 심층적인 삶의 방식은 자신의 두려움과 이기심을 담대하게 내려놓고, 사심없이 조건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진리에 대한 짧은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한다: (1) 첫번째 이야기는 여섯 명의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고대 인도의 이야기다. 여섯 명의 장님이 코끼리에 다가갔다. 첫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몸을 더듬더니 큰 소리로, “신께서 나를 축복해 주신다. 코끼리는 벽처럼 생겼다” 두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뿔을 만지더니, “나는 확신한다. 코끼리는 창처럼 생겼다.” 세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는, “내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코끼리는 부채를 닯았다.” 코끼리의 코를 잡고 있는 네번째 사람은, “너희들은 모두 바보야! 코끼리는 길고 굵은 뱀과도 같다.” 다섯번째 사람이 코끼리 다리를 붙잡고는, “너희들 모두 미쳤어. 내가 잡고 있는 견고한 코끼리는 나무기둥 모양이다.” 코끼리 뒤에서 꼬리를 잡고 있던 여섯번째 사람은 큰소리로 “코끼리는 그렇게 큰 동물이 아니다. 코끼리는 가느다란 밧줄과 같다.” 이 여섯 사람은 서로 자신의 진리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장시간을 소리소리 지르면서 입씨름을 벌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2) 두번째 이야기는 어느 날 악마가 자신의 부하와 함께 구름 위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길을 걸어 가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땅에서 무엇인가를 줍더니 주머니에 집어 넣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악마가 부하에게 이 사람이 무엇을 주웠는지 물었다. “작은 진리 하나를 주웠나 봅니다”하고 대답했다. “진리라고? 그 사람을 멈추게 할 수 없을까?. .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고 악마가 말했다. “기껏해야 한 가지 작은 진리일 뿐이야. 오래지 않아 이 사람은 그 진리를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내가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 할거야.”
신약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로마제국의 잔인한 통치와 탄압에서 하루도 생존하기 힘들었던 초대 교회 공동체 내부에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예수의 정신을 담대하게 살아내려는 그룹과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그룹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서 기록의 배경이 되었던 초기 교회는 개방적인 진보 그룹과 반면에 폐쇄적인 보수 그룹이 생존의 문제로 심각하게 충돌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 그룹은 포용적이었는데 반해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또다른 그룹은 강박 관념적이었다. 한 그룹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서 보다 우주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했는데 또다른 그룹은 진리에 대해서 대단히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편협적이고 차별적으로 이해했다.
약 1세기 말까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조상의 전통을 지키면서 유대교 회당에 소속했고 종교의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유신론적인 유대교 신앙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따르는 신앙이 회당 안에서 공존하기가 어려웠다. 자연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분리되었다. 일부 비열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원흉은 로마제국이었지 유대교가 아니었다. 참 사람 예수는 충실한 유대교인이었다. 다만 예수는 자신의 유대교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로마제국의 폭력적인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 위에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종교개혁가 내지는 사회개혁가였다. 초기의 예수 공동체들은 예수의 현세적인 비전을 완성하려고 “예수 살아 내기 운동” 곧 하느님 나라 건설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함께 삶을 공유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초대 교회는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유신론적 교리를 수동적으로 맹신하는 믿음의 집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곧 완전한 인간성을 폄하하고 탄압하는 유신론적 종교제도와 로마제국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생명과 삶의 공동체”였다.
성서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킨다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는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심층적인 의미에 대한 것이다. 성서의 많은 기적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밝히기를, 인간은 고통과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우주적인 궁극적 진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고 자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와 지혜를 선포하고 있다. 조건 없는 사랑 곧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심 없는 사랑과 공정한 분배의 정의와 폭력 없는 평화라는 하느님의 의미는 이기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민족적인 편협한 경계를 넘어선다. 하느님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면 축복이 되지만, 경계 안에 갇히면 저주가 된다. 예수는 이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냈다.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하느님의 의미” 즉 부족적 경계들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깨닫고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믿는다(believing)는 말의 어원이 사랑한다(beloving)는 의미이듯이, 믿음은 우주적인 진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가득한 삶의 방식이다. 믿음은 보상심리의 필수조건들에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참 믿음은 자율성과 창조성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고, 나의 믿음만이 옳고 정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 작은 진리를 깨달을 뿐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다짐해야 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진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인지 저주가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추구하는 진리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과 포용과 이해를 넓힐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진리를 편견으로 좁힐 것인지를 솔직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서는 많은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부정적인 해석과 긍정적인 해석들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논쟁을 벌려 왔으며 따라서 기독교 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크게 분단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는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의 진리는 이분법적 심판이나 정죄나 징벌이 아니라 경계 넘어 우주적인 축복과 사랑과 구원을 뜻한다. 하느님의 진리는 믿어야만 하는 유신론적 교리도 아니고, 기독교의 어느 종파의 독점물도 아니며, 인간이면 누구나 눈을 뜨고, 온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보는 자율적인 깨달음이다.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에 “하느님”이란 말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없는 종교” “하느님 없는 기독교” “하느님 없는 사회” 라는 말의 의미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하느님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선한 사람, 경건한 사람,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에서 “하느님”이란 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는 상호복합문화의 다원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바울의 말이 우리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된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 3:28). 모든 인류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다.
하느님에 대한 진리와 신앙을 추구하는 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자신이 찾은 진리와 믿음이 이분법적으로 누구에게는 축복이 되고 누구에게는 저주가 되고 있지 않은 지 양심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타종교인들을 폄하하고 그들을 개종하거나 추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차별과 우월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을 존중하고, 다양한 종교인들을 환영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이다. 하느님의 의미는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우주적으로 축복이 되는 것이다. 나만 구원받고, 나만 행복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진리도 아니고 더욱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다. 믿는다(believing)는 말의 어원은 사랑한다(beloving)는 뜻이다. 참된 믿음은 이기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망상이 될 수 없다. 오늘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상황은 물론 미래에 이보다 더 심각한 지구적 재앙에 직면할 때에 기독교인의 신앙은 과학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의학자들이 공개적으로 계시하는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집 지구의 기후변화는 못 본 채 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인데, 이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 바이러스와 가뭄과 산불과 홍수에 대한 과학자들의 예언자적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인위적인 재해를 공동체적으로 예방하는 것이 종교인의 참된 신앙이다. 오늘 참 사람 예수가 살아 있다면 그는 수동적으로 억지로 믿는 유신론적인 교리적 믿음을 폐기 처분하고 그대신 가장 우선적으로 과학을 신뢰하고, 종교와 인종과 정치의 경계 넘어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축복과 사랑을 공유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지혜를 역설할 것이 분명하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