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우연히 대학교 대자보 게시판에서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월요신학서당’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앙의 여정은 이 순간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민중’과 ‘신학’이란 단어가 함께 병립되어 존재 할 수 있었던가? " 사회운동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될 수 없다고 여겼던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나로서는 신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 충분하였습다.
저는 동지들과 명동에 위치한 향린교회에 월요일 밤마다 신학서당에 참석하러 갔지만, 이후 교회 주일 예배에 어느새 발걸음을 향하기 시작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던 저에게 대학부에서 만난 신앙의 동지들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김진호, 이혜원, 황선영, 선배들이 김광열, 채운석, 강은성 장로 였죠. 담임목사이셨던 홍근수 목사님은 당시 교회가 “쉽게 천국열쇠를 얻는 방법이 있는데 예수만 믿으면 천국간다” 전도방식과 “값싼 은총의 권면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기존 목회방식과는 전혀 다른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는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굶어가는 민중의 삶과 함께하는 것’에 있고, 의업을 가진 자의 예배처는 ‘고통하고 신음하는 환자 옆을 지키는 것’ 이라고 나에게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추상적인 천국의 모습이 현재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구체화가 되어 갔습니다. 나의 일터에서 입체적 선교의 미션을 알게 하셨을 뿐 아니라, 나의 영적인 면을 성숙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홍목사님 이셨습니다. 윤똑똑이로 살아가고, 먹물자존심으로 소심하고 컴플렉스 덩어리인 나에게 신앙의 재발견의 출발점이셨고, 신앙의 푯대로서 주와 같이 길가는 행로의 등불이 되셨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계획대로 안되게 해 주시니 '반성의 힘'을 주시는 주님은 저에게 지치고 힘든 일에 부딪쳐 계획대로 안 되게 해주시었습니다. 그래서 자만을 되돌아 보아 반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걱정 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준비하는 믿음의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진실의 힘'을 주시는 주님, 불의가 득세하고 공정함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고. 남 탓으로 , 세상 탓으로 원망하지 않고 저를 온전하고 분명히 드러낼 수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개신교의 큰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실현되는 4가지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바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심없는 맘으로 눈과 눈을 정답게 마주 치면서 서로 두려움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둘째, 맘 문을 열고 진정으로 말하고 듣는 대화의 사건이 일어날 것. 뒤틀리고 은폐된 위장된 언어생활이 없을 것.
셋째, 서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상부상조 사건이 일어날 것,
넷째, 그러한 일들이 정치사회적 강제성이거나 도덕적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발성과 기쁨 속에서 이뤄지게 할 것이라고 갈파한바 있습니다.
사심없는 맘으로 장로들끼리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한지 어언 6개월이상이 지났습니다. 코로나 비대면 시대 탓이기도 하고 제가 부족하서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이 없어서 이기도 합니다. 맘문이 열리지 않으니 대화도 없고, 온통 사건으로 인헤 언어가 뒤틀리고 숨기고 은폐된 모습만 보게 되었습니다. 헌금도 교회보다는 시민단체나 외부에 내는 것이 더 보람되게 느껴졌습니다. 자발성과 기쁨을 모교회에서보다는 느끼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생각해 볼 거리들입니다. "보편적 행복과 기독인으로서의 자기실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대안적 삶이란 각자에게 무엇이며, 인간과 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누가 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입니다.
중년의 위기 생산 대 정체(Generativity vs. Stagnation)
중년기에 큰 스트레스나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정상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잘 지내갈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사별이나, 실직, 질병등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너무나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하여 중년위기로 불리울만한 심각한 정서장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Erikson 이라는 심라학자는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은 생산 대 정체(Generativity vs. Stagnation)중 택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산이란 단순히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음세대를 지도하고 이들을 위해 뭔가를 마련하며 좀 더 낳은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깊은 관심을 갖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자신의 자녀를 갖지 못한 사람들 일지라도 소위 애타심(altruism)과 창조성을 잘 발전시키면 매우 생산적(generative)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여력과 능력을 가정에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지속 확장시켜 가고자하며 소위 만인의 자녀(common offsprings)인 후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바치고 이루어 보자는 근본적 욕구가 있습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마지막 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는 누구나 추구하는 바일 것입니다. 본문의 30배, 60배,100배의 결실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누구는 좋은 땅에 떨어지나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하는 결단의 계기를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매순간 마다 나 자신의 최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적 상황의 하나로 역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자율적 판단을 통해 뜻에 부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번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을 하느님의 뜻을 어긴 선택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세계는 다시 그자신이 선택한 결단으로 인해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상황을 돌출 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율적인 의지로 인해 빚어진 이 새로운 상황은 다시 하나님의 계획에도 영향을 주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수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부지불식중에 그렇게 빚어진 여건 하에서 다시 또 우리가 최선의 방법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적 상황의 하나를 ‘또’ 제시하시면서 우리에게 계속 설득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사야 6:9-10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마 13:14-15 )
하느님은 우리들의 자유를 존중해 주시지만 다시금 그 안에서 가능한 가장 최적의 선택을 계속 제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인간의 결단’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 운동,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마 13:19 )
악한 자 ! 악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란 상호간의 목적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사태입니다. 진선진미에서 뜻하는 바는 목표가 올바를 때 선하며,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아름다울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합니다. 알아 나가는 과정에서 알음이 ‘알읆’다울때 ‘아름답다’라는 말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들을 더 빨리 도달하기위해 또 치열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삶을 의미 있게 하기위해 더 주름지게 하면서 느리게 살 것입니까?
살아온 지난 생의 과정을 좀더 의미 있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고, 선한 목적을 우리 모두 합하여 이루는 것이 생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가 와서 착함과 아름다움을 다하려고 하는 그 ‘진선진미’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 본문에서도 악의 존재는 우발성과 돌발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 부지불식중에, 다시 모두에서 이야기한 표현대로 하면 ‘개념이 없는’ 가운데 악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 선의 방향이 아닌 악의 방향으로 역사가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협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악의 존재는 지난 역사 속에서 톨스토이와 간디가 온몸으로 느껴왔던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귀족으로 태어나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고 장교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지만 인생의 후반기에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권력의 모든 도구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 교회와 국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국가, 법, 특히 당대의 재산법을 비판하며 국가를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지배 체계로 묘사하였습니다. 톨스토이가 국가권력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제안한 방법은 오늘날 시민 불복종과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톨스토이는 자신의 전략을 “비저항”이라고 불렀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비저항의 원칙과 모든 전쟁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폭력이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억압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폭력 혁명을 통하여 반권위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결국 독재를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간디가 무저항 불복종 운동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비순응, 납세 거부, 권력 기관에 대한 비폭력 저항으로 이루어진 톨스토이의 사상에서였습니다. 하동기군의 집총거부로 인한 법정 구속 사건은 우리에게 극한 절망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악의 장벽들이 굳건하게 쌓아 감으로써 소중한 생명들을 자꾸만 벼랑 끝으로 내몰고 선택의 영역이 갈수록 좁아지게 되면 하느님도 아픔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고통의 정도가 심하고 큰 곳일수록 우선적으로 치유가 될 것입니다. 그 치유는 반드시 깨달은 자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안의 온갖 참담한 비극과 체제의 구조악에 대한 주도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깨달음은 깨어짐에서 나온다.
길바닥에 떨어지게 하는 악의 존재는 환난과 박해를 하며 우리를 또 넘어지게 하여 돌밭으로 향하게 합니다.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가시덤불에 떨어지게도 합니다. 중년위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뭔가 그들이 지금까지 갖추고 있는 모든 능력과 실력들을 다 동원한다해도 그들에게 닥쳐온 생의 고뇌들(스트레스)을 결코 해결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죽음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자신이 늙어가고 있으며 이제 곧 노인이 된다는 것 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며 이 문제를 좀 더 신중히 다루어야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대한 자각이 공포나 우울감의 감정을 유발하게 되면 악순환(Vicious Cycle) 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더욱 자책감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실의에 빠져 부정적으로 사물과 인간을 바라본다면 이것이 악순환의 늪에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생각의 되새김질, 이것은 과거 지향적, 추상적 사고입니다. 따라서 우울증에 빠진 개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오류와 비극에 대해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과정자체에 '깨달음‘의 본질적인 핵심이 있습니다. 오류 속에는 진리에로의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 들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톨스토이는 정부의 폭력과 분노한 사람의 폭력을 구분합니다. 정부(기득권)의 폭력은 의도적이며 이성의 왜곡을 통해 작용하기 때문에 완전히 사악하고, 분노한 개인의 폭력은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악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현이 자기원형임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생을 모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을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우리의 두뇌로는 알기 힘든 비합리적인 세계의 의도를 ‘주의 깊고 성실하게 관조하는’ religio의 정신적 태도를 견지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자기의 취할 바 태도인가를 살펴본 뒤에 내리는 결단일 경우에만 그 행위는 성숙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바로 이 미지의 의도-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의 의도라고도 할 수 있는-를 알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며, 그 목적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기도는 ‘그의 뜻’을 듣고 ‘ 당신의 뜻’에 맞추기 위함입니다.
Religio의 정신으로 자신을 관조하는 기도의 과정에는 온갖 번뇌와 회의가 뒤따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갈등이 고통의 도가니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아무런 깨달음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바로 각자의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고, 깨달음을 위한 ‘깨어짐’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안의 부조리함과 개인의 정신적 고통 이 모두 하느님 자신의 처절한 부르짖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면서 하느님이 나를 버렸다고 소리쳤을까? 생각하여 보면 답이 나옵니다. 신마저도 버린 무신론적 현장에서 처절한 고통마저 그 극한에서 경험함으로써 하느님 자신의 해체와 죽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현장은 부조리한 현장입니다.
악이 기고만장하여 승리한 것으로 보이는 현장이고 인간이 신을 죽이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처절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껴안고 있는 것입니다.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은 이제 산상수훈을 뒤로하고 십자가의 길로 가십니다.
글을 마치며 ; 기독인으로서의 자기실현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는 지금 조건에서도 최선의 대안적 삶(겨자씨와 누룩 같은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후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당위가 아닌 인간적인 눈맞춤이 필요한 때입니다.
민중해방은 여전히 파쇼적인 압박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이며 세계와 나와 하느님은 어떠한 상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를 본문처럼 깨닫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는 요원한 일입니다.
설득을 하기 보다는 타자와 동등하게 기초적인 보편적이고도 기초적인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힘으로 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