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사회를 "헬 조선"이라고 하죠.
자살율 세계 1위 지속
출산율 거의 세계 꼴찌
살인적 노동시간 최장 시간
죽음몰이 연쇄사슬의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 구조
등등등
이들의 결정적 계기가 1997년 발생한,
IMF 경제신탁통치란 사실을 우리 모두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바로 그 뒤에 미국이라는 괴물이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셨나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군요.
이와 관련 당시에 썼던 논문의 일부를 되새겨 보게 되는군요.
강정구
다음 글은 강정구, "한미관계사: 38선에서 IMF까지" 논문의 6절과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강치원 엮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미관계의 역사와 우리 안의 미국주의> 백의, 2000년)
6. IMF경제신탁통치와 미국
탈냉전이 시작되는 1990년, 미국이 21세기 세계지배전략의 하나로 구상하였다는 ‘워싱턴합의(Washington Consensus)'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신기할 정도로” 한국의 1997년 말의 상황에서 재연되고, 김대중정권의 과잉세계화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시사저녈」의 이교관 기자를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합의’는 한국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조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로서 “정부 예산의 삭감, 자본시장의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산업의 민영화,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 기업들의 인수․합병 허용, 정부 규제 축소, 그리고 재산권 보호”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강요는 으레 반발을 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술까지 고안해 두었다. 첫째,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다. 둘째, 현 정권의 핵심 세력이 연루된 부패 고리를 폭로하여 현 정권을 무력화시킨다. 셋째, 재벌이나 노조의 저항에 부딪혀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좌절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서로 다른 지지 계층과 기반을 갖춘 중도 성향의 정당 두개를 결합시킨 연립 정권을 새로이 창출시킨다(이교관, 1998: 79-81).
우리는 5.18항쟁이나 6월항쟁 등의 역사적 계기나 역대정권의 등장과정을 미루어 보아, 미국이- 음밀한 개입이기에 실증적인 증거에 의해 입증하기는 힘들겠지만-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번 한국의 IMF경제신탁통치체제에 개입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76년 자메이카 회의에서 고정환율제와 브레튼우즈체제가 법적으로 종결된 이후, 군산복합체 중심의 축적구조의 한계를 월가의 금융투기산업으로 극복하려는 축적체제의 변화를 겪었다.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미국은 21세기에도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세웠는데 바로 그것은 금융투기산업과 실리콘 벨리에 바탕을 둔 정보지식산업의 결합에 의한 ‘부드러운’ 세계지배이다. 물론 이 부드러운 세계지배는 여전히 핵무기나 ‘별들의 전쟁’과 같은 ‘무시무시한’ 세계지배를 동반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세계지배 전략은 구체적으로 1995년에 새로 창립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은행, 외환, 채권, 주식, 보험 등의 금융자율화를 추진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국가의 자본통제 체제를 제거하고 외환거래를 자유화시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통하여 다자간투자협정(Multilateral Agreement on Investment)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전략의 행위주체가 미국의 재무부-IMF-월가의 초국적투기자본(금)의 3자복합체(Triple Complex)이다 (Wade & Veneroso, 1998: 19).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제거되기 마련이고, 단지 유럽통합이나 중국과 같은 강력한 자족력을 가진 국가 군이나 지역은 1차 표적에서 벗어나고,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지역은 그 공략강도를 낮추게 된다.
80년대까지 냉전구도 하에서 미국의 철저한 보호막을 받아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발전국가 군은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한 시점에서 더 이상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1993년부터 클린턴 독트린의 표적이 되었다. 커밍스는 클린턴 독트린을 “수출을 장려하고, 특정 지역을 개방시켜 미국의 상품과 투자를 허용하도록 하는 공격적인 대외 경제정책으로” 정의한다. 이 “미국의 상품은 주로 미국 GDP의 85%를 차지하고 세계적으로 경쟁상대가 없을 정도로 경쟁력이 절대적인 서비스산업, 곧 금융산업이나 정보지식산업이다. 또 경쟁상대국인 일본이나 독일에게는 냉전구도에서 확보한 영향력으로, 잠재적인 적대국인 중국의 경우에는 면밀하고도 명백한 위협을 구사하여 이 정책을 관철시키며, 이를 뒷받침하는 이념은 바로 신자유주의와 로크의 민주주의”라고 보고 있다(Cumings, 1998).
1980년 초반의 경제위기와는 달리 탈냉전 하에서는 이미 미국의 안전보호막이 거둬진 상태이기 때문에 한국 역시 무방비 상태에 들어갔다. 하루에 1조 4천억에 가까운 투기(도박)자금이 미국과 IMF 등 ‘국제(준 미국)기구’의 보호를 받고 협조를 하면서 국경을 무너뜨린 세계화의 초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하는 마당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미국 못지 않게 외치는 김영삼 정권 하의 한국이 이에 포획되는 것은 쉽게 예측되는 것이다. 97년 7월부터 아시아외환위기가 시작되고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인 97년 11월 7일 김영삼 정부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단기자금에 대한 회수를 자제하여 달라고 엄낙용 차관보를 특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한 시점에서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 정도로 월가의 투기자금이 일본 증시에서 대 탈주극을 벌였다. 이 여파로 일본 증시가 폭락하여 일본 금웅권이 한국의 연기 요청에 대하여 비록 연기를 해주고 싶어도 연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미 일본수상은 클린턴으로부터 “한국정부에 협조융자를 해주지 말라”라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이교관, 1998: 48-51).
이러한 미국의 소름끼치는 음모혐의가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IMF프로그램과 현 김대중정권의 위기극복 경제정책이 위의 위싱턴 합의가 제시한 8개항의 필요조치를 전적으로 수용할 뿐 아니라 자발적인 과잉세계화와 종속적 신자유주의를 추진하여 IMF의 요구를 능가하여 대외개방을 급진적으로 또 광범위하게 진행시키는 IMF 특별 장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김대중정권의 논거는 민족주의를 폐쇄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세계적 보편주의를 내세우면서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경제위기를 전적으로 내인구조론과 내인정책부재론으로 설명하는 데 있다(이병천, 1998; 김균․박순성, 1998). 곧, 비효율적인 박정희식 발전국가의 모순인 재벌경제, 정경유착, 불공정거래, 지나친 정부의 시장개입 등을 극복 및 전화하여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 조절되도록 하는 시장근본주의로 변신하지 못하였고, 또 한보 및 기아사태와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나타나는 시점에서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정책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우리의 IMF신탁통치는 위의 내인구조론이라는 요인 외에도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의해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이미 금융투기자금이 판치는 '도박판자본주의'로 변신되어 어느 누구도 제물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다는 외인구조론, 또 1993년의 클린턴 독트린과 1995년의 WTO출범 등 외인국면적 요인, 김영삼 정권의 OECD가입의 대가로 경제기획원의 폐지와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개방으로 우리의 경제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 내인국면적 요인, 위의 미국음모론 등 외인사건사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김균․박순성, 1998; 김동원, 1998).
더욱더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외인론과 내인론의 기원에는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행위주체로 개입하였다는 점이다. 남한은 발전국가 모순이 누적된 상황에서 미국의 세계자본주의질서 재편 전략에 휘말린 것이다. 남한이 가장 많이 빚진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과 유럽연합인데도, IMF신탁통치에 대한 모든 조치와 처방은 주로 미국 재무부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곧, 동남아 외환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의 아시아투자기금(Asian Monetary Fund) 시도를 저지시켰고, 한국은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떠벌려 외화유출을 부채질하였다. IMF와 협약을 체결하는 시점에서는 미국재무장관인 루빈은 그의 추수감사절 휴가까지 취소하고 긴급히 제2의 맥아더라고 불리는 섬머스(Summers) 등 고위관리를 파견시키고, 이들이 미국의 대리인에 불과한 IMF당국자를 제끼고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은 단지 IMF 프로그램을 준수하는 조건하에서만 제공될 수 있다”고 선언하여 그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였다(Cumings, 1998). 이로써 미국은 남한에 ‘병주고 약주는’ 척하면서 한국을 경제식민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 대외개방은 IMF의 요구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거의 전면적 대외개방이 되었다. IMF가 제시한 일정보다 앞당겨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대폭 확대하고 적대적 인수합병을 허용하였으며, 채권 및 단기금융상품 시장을 완전 개방하고 외국은행과 증권회사의 국내 현지법인 설립을 허용하였다. 또한 부동산 시장을 열었는가 하면, 한미투자자유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환시장을 완전 자유화하였으며 외환관리법도 2000년부터는 전면 폐지된다. 이로써 남한은 국민국가의 경제정책 자율성 내지 주권은 근본적으로 제약되어 국민경제라는 개념 자체가 무색해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김균․박순성, 1998: 385-386).
7. 맺음말
한반도 속 미국의 실체를 해방공간의 분단에서부터 IMF지배체제까지 살펴보았다. 냉전기의 세 가지 큰 역사적 계기인 해방공간의 분단과 전쟁, 5.18항쟁, 6월항쟁에서 미국은 어김없이 냉전전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의 세계사는 동구사회주의체제의 몰락이라는 대전환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동서냉전의 결정적 강제력에 의해 분단과 대결의 역사를 강요당하였던 이 곳 한반도에도 탈냉전기인 90년대 이후에는 응당 탈냉전의 역사구도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되어졌다. 특히 한반도 냉전의 주범이었던 미국의 행위가 탈냉전으로 나아가기를 말이다.
그러나 탈냉전의 시점에서도 한반도 속의 미국은 오히려 더 냉전전사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변핵위기에서 우리 민족은 민족공멸로 이어질 엄청난 전쟁위기를 마지막 순간에야 넘기게 되었다. 그러다 또 다시 이러한 위기의 불이 금창리핵위기에서 재생되었다. 이는 세계적 수준에서 탈냉전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진정한 탈냉전은 도래하지 않고 있다. 지구촌 전반이 이러한 형편이니 한반도야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탈냉전은 두 대립 물인 소련주도의 사회주의체제와 미국주도의 자본주의체제가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냉전의 극복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다. 단지 한 대립물만의 몰락으로 다른 한 쪽의 냉전체제는 건재한 채로 아직도 남아있다. 오히려 기존 대립물의 견제기능 상실로 이 잔존한 외팔이 냉전전사는 더욱 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 이 ‘탈냉전’의 시대에 무려 280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쓰면서, 이 곳 한반도에다 윈-윈 전략으로 93-94년과 98-99년에 두 차례 전쟁놀음을 벌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자본주의를 이제 천민성을 넘어 라스베가스도박판 자본주의로 변모시키고는 조그만 판돈을 소유한 아시아의 작은 용들을 이 도박장으로 몰아 부쳤다. 이 과정에서 남한은 냉전의 열전화였던 6.25전쟁에 버금가는 참화를 입었다. IMF경제신탁통치라는 전혀 새로운 냉전전사의 모습으로 미국은 남한 땅에 다가왔다. 순진한 남한사람들은 완연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우리의 당면과제의 하나는 바로 한반도 속의 미국을 탈냉전적 순응물로 만드는 것이다. 냉전전사 미국의 철옹성 같은 모습도 영변핵위기에서 북한의 민족자주적 대응으로 수모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금창리 핵위기에도 김대중정권의 포용정책은 미국의 허를 찔러 민족안보를 도모하였다. 미국이라는 세계화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우리가 우리일 것을 거부하는 자아 소멸과 자아해체’를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기 긍정, 곧 탈미자존(脫美 自存)으로 나아갈 때 한반도 속의 미국은 역사를 거역하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