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고 도기순 장로 추모예배에서 소개된 약력입니다.)
고 도기순 장로 약력
○ 1920년 음력 1월 21일 독립운동가 도인권 목사님과 최원효 사모님 사이에서 4남4녀 중 둘째 딸로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셨습니다.
○ 1921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으셨습니다.
○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시거나 만리타국에서 망명 생활하는 동포들을 위해 목회 활동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의 고난에 함께 하셨습니다.
○ 그러던 중 1940년 봄 만주 간도성 연길현의 용정시에서 명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셨고,
○ 다시 1942년 봄에는 같은 연길현의 연길시에서 연길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셔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 1942년 그 해 봄에 연길시의 명륜국민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1945년 해방 때까지 그곳에서 초임 교사로 어린이들을 가르치셨고,
○ 그 기간 중인 1944년 1월 18일, 세 살 위인 반려 최봉삼 장로님을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 해방 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1947년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의 옹진국민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1949년까지 그 학교에서 신생 조국의 건설에 힘을 보태셨습니다.
○ 1953년 5월 서울 남산 중턱에 향린교회가 설립된 직후 바로 그 달, 교회의 갱신과 민족의 구원이라는 향린의 대의에 공감하신 부군 최봉삼 장로님께서 먼저 향린의 대열에 동참하셨고,
○ 그 직후에 도기순 장로님도 향린으로 오셔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 1955년부터는 아예 향린의 창립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산의 향린교회 터전에 들어와 수도원 생활에 가까운 향린의 초기 공동체 생활에 동참하셨습니다.
○ 그때부터 최봉삼‧도기순 두 분 장로님 부부는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직접 챙기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반주, 부인회 운영 등에도 헌신적으로 힘쓰셨습니다.
○ 1960년부터 1966년까지는 여전도사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 1977년 4월 17일 공동의회에서 원금순 장로님과 함께 향린교회 최초의 두 여장로로 피택되셔서 두 분은 그해 11월 8일 역시 함께 장로로 안수 받고 임직하셨습니다.
○ 도 장로님은 향린공동체가 삼일절 또는 광복절 행사를 할 때마다 선친 도인권 목사님께서 독립운동 하면서 간직해 오신 태극기를 내걸고 그 힘들지만 의미 깊었던 삶을 회고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향린 교우들도 그때마다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 1990년 12월 30일 만 70세를 넘기시면서 시무장로에서 은퇴하면서 원로장로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렇지만 도기순 장로님은 ‘우리의 영원한 장로님’으로 남으셨습니다.
○ 그 뒤에도 향린 교우들을 어린이들로부터 장년들에 이르기까지, 예배 출석부터 집안의 대소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챙기시면서 ‘향린의 어머니’ 역할에는 쉼이 없으셨습니다.
○ 1994년에는 평생을 해로하자고 다짐하셨던 반려 최봉삼 장로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을 가지셨습니다.
○ 그럴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영육의 힘을 온전히 향린을 챙기고 섬기는 일에 모두 쏟으셨고, 2011년 11월부터는 기동이 쉽지 않아 요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렇지만 향린 교우들이 방문하면 언제나 웃음으로 맞으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 2018년 12월 23일 밤, 백수를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도기순 장로님은 이제 영원한 삶에 드셨습니다. 그렇지만 도 장로님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영원한 장로님’으로, ‘향린의 어머니’로 남으실 것입니다.
○ 도 장로님은 이 땅에 두 따님과 한 아드님, 그 각각의 배우자들, 그리고 그 세 쌍의 아름다운 가정을 통해 모두 여섯 손자녀를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 우리 향린 교우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 동시에 사람 세상에서 향기로웠던 도기순 장로님의 삶을 우리 공동체가 다하는 날까지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