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동창회는 과학과 종교가 통합된 우주진화 세계관을 인식하며,
자연과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우주적인 신학과 신앙에 따라 고대 성서를 재해석한다.]
필자는 1988년 9월에 20여년간 몸담았던 지질학분야를 떠나 신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신학교 첫 학년 첫번째 수업시간에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떤 음성을 듣고 자신의 신앙과 삶이 180도로 전환되었던 것과 같은 체험을 가졌다. 다시 말해, 강의를 시작하는 교수는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혹시 여러분들 중에 교실 밖에 보따리를 놓고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지금 곧 나가서 여러분의 과거의 패러다임의 신앙 보따리를 들고 들어와서 이 강의시간에 풀어 놓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의시간이 끝난 후에 보따리 속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과 신앙을 넣어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교수는 계속해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앵무새처럼 수동적으로 되풀이 하지 말고, 여러분들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말로 새롭게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졸업 후에 목회지에서 설교와 교육에서 다른 사람들이 출간한 성서주석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말고, 여러분들 스스로의 깨달음을 여러분들의 언어로 교인들에게 전달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들 스스로가 성서주석가가 되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소위 모태신앙을 지녔던 필자는 캐나다 멕길대학 종교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주일학교에서 전수받은 한 가닥의 믿음(belief)은 가지고 있었지만 심층적인 신앙(faith)은 별로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수학공식을 암기하듯이 예수가 나의 구세주라고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즉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받은 것으로 단순하게 믿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는 남들에게서 들은 견해, 마치 남들이 쓰던 안경처럼 낡은 중고품 견해에 매달려 살아왔다. 천만대행히도 필자의 멘토이며 예수 세미나의 창시자인 로버트 펑크 박사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배움이란 고뇌라는 것, 즉 우리들 자신과의 싸움이며, 피상적이고 요지부동인 생각들과의 싸움이며, 우리 주변의 문화로부터 흡수한 지식들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신앙이란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trust)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신앙을 신뢰로 이해하는 것과 신앙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기 때문에 신앙을 신뢰라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보따리 속에 쾌쾌묵은 신앙을 풀어 놓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이런 신앙을 보따리 신앙이라고 한다. 필자가 신학교 재학시절에 보따리 신앙을 움켜쥐고 풀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들은 수업시간에 들어오기 전 자신의 신앙보따리를 교실 밖 문간에 놓는다. 그리고 수업시간 후에 교실 밖에 놓아둔 보따리를 되찾는다. 다시 말해, 신학교에 오는 목적은 새로운 신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목사안수 자격증을 얻기 위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보수적인 교단들에 속한 신학교는 학생들에게 보따리 신앙을 권장하며, 교수가 가르치는 교단신학과 교리적인 공식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암송하도록 강요하며,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은 절대금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따리 신앙 증세는 교회 내부에서 일반 교인들에게도 보편적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에게 진리를 향한 열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교회와 신학교는 오래된 중고품 렌즈를 벗어버리지 못한체 세속적인 세상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하는 수도원이 될 수 없다.
한편 오늘날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삼층 세계관적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수용할 수 없는 신학생들과 교인들은 과감하게 자신들의 보따리를 풀어 헤치고, 우주진화 세계관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리는 신선하고 역동적인 체험이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더 이상 지루하고 진부하고 생기가 없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숨이 막히는 것과 같아 미련없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물론 제도적인 종교 밖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삶의 의미와 행복의 길을 찾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 즉 중고품 신앙에 수동적으로 억지로 끌려 가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무작정 믿어야 하고, 의문과 질문 없이 맹종해야 하고, 공식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지루하고 따분한 신앙생활을 용감하게 내려 놓고 교회를 떠난다. 이렇게 교회 밖에서 자율적인 깨달음과 영성을 탐구하는 사람들을 교회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부른다.
삼층 세계관적이고 이분법적인 교회를 졸업한 사람들은 고대 성서를 새롭게 읽고, 21세기의 현대어로 전환하는 재해석을 요청한다. 그래야 성서 이야기가 말이 되는 말이 되고, 상식적인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 동창회는 성서를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누가복음서 17장 5-10절의 전반부(5-6절)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신앙(faith)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자 참 신앙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신앙이라도 있다면. . . “(누가복음서 17장 5-6절) [한글성서 번역의 오류: 그리스어 성서와 영어 성서에는 예수가 믿음(belief)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신앙(faith)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한글 성서는 믿음(belief)으로 왜곡하여 번역했다. 따라서 필자는 믿음을 신앙으로 정정한다. 예수는 요즈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이분법적이고 교리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물론 신앙과 믿음은 동일한 말이 아니다.더욱이 신앙과 믿음은 교회가 만든 이분법적 구원론과 축복론 그리고 교리들 즉 삼위일체와 몸의 부활과 죽은 후 천국행을 입술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신앙과 믿음은 성전(교회)이 만든 교리들을 관념적으로 믿고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었다.
요즈음 캐나다와 한국과 미국의 정치계와 종교계는 보수와 진보로 양극을 달리며 경제 국방 환경 인권 등의 문제들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리고 있다. 대개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국민들에게 위험이 따르는 새로운 변화를 도전하기보다는 달콤하게 안정(comfort)과 안전(security)을 보장하겠다고 장담한다. 다시 말해, 가진 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도록 세금을 내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운다. 이것은 변화보다는 훨씬 쉬운 길이고, 흔히 보수적 성향의 정치인들이 외치는 상투적인 구호이다. 또한 종교인들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질문하고 고민하고 스스로 깨달아 알기 보다 만들어 놓은 공식(교리)을 암송하고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하다. 무작정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단순하게 머리를 끄덕이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진보적인 사람들은 변화를 요청한다. 그들은 비단 지금 불경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지만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도전한다. 물론 많은 국민들은 상황에 따라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보수 또는 진보를 선택한다. 또한 국민들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을 원한다. 많은 국민들은 한 폭의 그림을 크게 넓게 보는 장기적인 안목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의 변화를 용감하게 선택하기 보다 눈앞에 보이는 달콤한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소중한 선택을 포기한다.
마가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마치 한국과 캐나다와 미국의 보수성향의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처럼 경제적 안정과 안전을 바라면서 예수에게 ‘신앙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십시오’(Increase our faith!) 라고 간청한다. 이것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신앙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그것을 남김없이 소비하고, 활용하라’고 도전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세속적인 세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율적으로 느끼고 깨닫고 인식하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신앙의 의미에 대해 가르친 후, 이와 관련해서 주인과 노예 또는 하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는데 21세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 . . 너희 중 누구에게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 왔을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으라’하고 종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도리어 그에게 ‘너는 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들고 너는 나중에 먹도록 하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명령한 대로 종이 행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마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들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라.” (누가복음 7장 7-10절)
이 이야기는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급진적인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예수의 정신을 잃고 고대의 노예제도를 찬성하게 된다.
누가와 동시대의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이 죽은 후에 바울의 이름으로 소위 목회서신인 디모데서와 디도서를 기록했다.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이 공동으로 저술한 <첫 번째 바울의 복음>에 따르면 13개의 바울 서신들 속에는 신학적으로 서로 다른 세 사람의 바울이 있다.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급진적인 바울’(radical Paul)과 예수의 가르침을 변질시켜 교리화한 ‘보수적인 바울’ (conservative Paul)과 예수 정신에 반대되는 로마제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반동적인 바울’(anti-Paul)이 있다.
마가복음서 후반부(7-10절)의 이야기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와 가부장제도를 찬성하는 ‘반동적인 바울’이 쓴 디도서(2:9-10)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즉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디도서는 ‘진짜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가짜 바울’이 쓴 편지이다. 급진적인 ‘진짜 바울’은 예수의 정신을 충실하게 따라서 빌레몬서를 썼으며, 그는 이 편지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진짜 바울은 노예제도는 물론 가부장제도를 완강히 반대했으며, 남편과 아내, 노예와 주인, 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는 평등하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인종과 종교와 성적본능과 성을 넘어서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국과 캐나다와 미국에서 닥아올 선거에서 국민들은 특히 기독교인들은 어떤 지도자를 선출할 것인가? 무조건 기독교인 혹은 보수적인 신앙을 지지하는 후보자이면 눈감고 표를 찍을 것인가? 아니면 후보자가 기독교인은 아닐지라도 예수의 정신이 드러나는 정치강령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인가?
오늘 기독교 교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예수의 좋은 소식이 들리고 있는가? 또한 이 사회에서 반드시 성서구절은 인용하지 않더라도,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인간의 생명과 기후변화와 관련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어디에서 들리고 있는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오래된 신앙의 보따리를 부등켜 안고 동성애와 낙태와 기후변화와 최저임금과 난민문제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두려움이 많아서 생존의 안정과 안전을 찾기 위해서 생태계의 문제 보다는 경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석유와 석탄을 더 많이 파내고 있다. 앨버타 북부의 생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다. 모래에서 석유를 추출하느라 방대한 지역의 지형은 마치 지옥을 방불케하는 비참한 모습으로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강과 호수가 오염되어 이 지역에서 암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후변화로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산불과 홍수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마치 흐르는 물과도 같다. 물이 앞으로 흘러가지 않고 샘에 그대로 고여 있으면 안정되고 안전한 것같지만 썩어서 죽고 만다. 또한 물은 현재가 불안하고 두려워서 과거로 흘러 갈 수도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것도 아니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과 삶의 목적은 불안하다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앞으로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신앙은 마치 성숙한 치즈와 와인이 좋은 맛을 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되어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마치 작은 씨앗과도 같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삶의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으로써 자라가게 해야 한다. 무럭무럭 자라가도록 풀어 놓아야 한다. 신앙은 변혁해가는 생명력이 있다.
매일매일 생기가 넘치고 활발하게 그리고 두려움과 편견과 이기심 없이 행복하게 의미있게 살기를 원하는가? 교리와 전통과 형식의 쇠사슬에 묶여있는 신앙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신앙을 교리와 쾌쾌묵은 전통과 형식에서 자유하게 해방시키자. 이것이 예수가 가르쳐준 구원의 길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