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시대에나 오늘 21세기에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특히 고통과 절망 속에 빠지면 행복에 대한 염원이 더욱 커진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의 물질적인 축복론에 세뇌된 종교와 사회는 착각과 망상에 빠져 잘못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며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맹신하는 이분법적인 성전종교의 착취와 군사독재적인 로마제국의 악독한 탄압으로 대다수의 민중들은 하루에 한끼도 먹기 힘든 빈곤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이 민중들에게 예수는 참 행복의 의미를 선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의 말은 믿어지지 않지만 대단히 설득력이 있고, 생기와 힘이 넘치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성전(교회)에 십일조 바치면 행복해진다는 상업적인 꼼수도 부리지 않았다. 더욱이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히 부유하게 산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도 않았다.
그대신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복음서 5:1-12) 오늘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참 행복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나?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말이 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민중들에게 종교체계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이분법적 교리들을 억지로 무작정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종교와 군사독재정치에 목숨을 내걸고 항거하면서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회복하는 대안으로 심층의 신앙을 가르쳤다.
심층의 신앙이란 무엇이며, 특히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왜 심층의 신앙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타율적으로 교리적인 공식을 암송하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권위에 절대복종하면 만사형통한다는 표층의 신앙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표층의 신앙은 자율적이고 내면적인 깨달음과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삶이 없는 관념적인 겉치레의 신앙이다. 역사적 예수는 처음부터 불편한 진리를 선포하고 심층의 신앙을 가르쳤으며, 이것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가 죽은 후에 교회기독교는 제도화-교리화-상업화 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인 심층의 신앙을 숨기고 사람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하여 표피층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박탈하고, 수동적으로 맹종하도록 탄압했다.
심층의 신앙과 삶은 전문가들이나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심층의 신앙이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스스로 깨닫고, 깨달은 것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이다. 따라서 심층의 신앙은 신앙인의 선택이 아니라 이성적인 호모 싸피엔스 인간의 본능이고,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의 책임이다.
따라서 종교와 교회의 기능은 숨겨진 진리를 찾아내고, 사람들이 스스스로 인식하고 깨달아 자유하게 살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교회 목사의 책임과 임무는 표피층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심층의 신앙으로 성숙해 지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심층의 신앙을 탐구하는 사람들 마다 서로 다르며 다양할 수 있다. 내면으로부터 참나를 깨달아 알게 되는 길은 각 사람마다 독특하며,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복잡한 쇼핑몰에서 소위 세속적으로, 어떤 사람은 조용한 숲 속에서 소위 거룩하게 참나를 깨닫는 순간을 체험한다. 어느 한 가지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심층의 신앙인의 다양한 길들에 대단히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심없는 신앙과 삶의 길이다. 다시 말해 어떤 보상을 전제로 하거나 징벌이 두려워서 교리적으로 억지로 믿는다면 이것은 사심있는 신앙이며, 예를 들자면, 산타 할아버지가 실제 인물이라고 믿고 내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고 믿는 표층의 신앙이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사랑은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 또한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의 의미는 조건없는 사랑과 공정한 분배의 정의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깨달은 사랑과 정의 즉 하느님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니 정의니 평화니 하는 좋은 말들을 하거나 실천을 하면서도 어떤 보상을 전제로 하거나, 하느님의 징벌이 두렵워서 즉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단지 구원과 축복의 조건에 불과하다면 이것이 사심있는 신앙이며 표층의 신앙에 불과하다. 예수가 세상의 좋은 말들은 모조리 골라서 자랑스럽게 말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심하게 질책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신앙이 사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보상심리의 사심있는 신앙은 예수의 정신이 아니다. 많은 교회들이 상업적으로 떠들어 대는 필수조건과 보상에 대한 교리는 예수의 메세지가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조건없이 용서하고, 조건없이 사랑하는 현실적인 실제(實際 Reality)이다.
심층의 신앙과 삶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그리고 심층의 신앙인이 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산상수훈이라고 불리우는 마태복음서 5:1-12은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많이 읽고 생각하고 들어 본 구절이다.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유명하고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물론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정말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통해서 복음서 저자 마태가 체험한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길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는지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마태의 예수는 철학적이거나 세련된 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더없이 쉽고 단순했다. 예수는 마치 시골 농부나 어부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확실하고 구체적이었다. 예수는 막연하게 무턱대고 믿으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예수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이야기를 말했다. 예수의 말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믿는다는 말을 이제 그만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지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과 목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일학교에서부터 새로운 세대들에게 산타 할아버지는 실제 인물이 아니며,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교인들이 스스로 내면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을 갖도록 격려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처음부터 심층의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예수의 메세지는 이론적이거나 교리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의 메세지는 때로 매우 고차원적인듯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나의 이기적인 사심과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놓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심층적인 메세지는 세속적이고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의 심층의 메세지의 향기는 마치 비가 내린 후 흙에서 나는 냄새와 같아서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그 향기는 장터나 바닷가나 빈민굴이나 논밭이나 성전이나 어디에서나 맡을 수 있다. 예수의 메세지는 하늘의 허공을 떠도는 관념적이고 교리적이고 문자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현장 한복판에 살아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의 메세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의 언어가 아닌,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언어이다. 예수는 성전이나 신학교나 교회나 소위 거룩한 곳에서 가르치지 않았고, 그대신 시장터나 바닷가나 들판이나 산 위에서 가르쳤다. 예수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복잡하고 힘든 언어로 왜곡해서 말하지 않고, 삶의 현장 속에서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 슬퍼하고 / 온유하고 /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고 / 자비를 베풀고 / 마음이 깨끗하고 /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는 성서구절들에서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어떻게 사느냐 에 관한 가르침들뿐이다. 예수는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딸] 즉 참 인간이 된다는 희망의 메세지를 선포했다. 이것이 예수의 좋은 소식(복음)이다.
예수는 어떻게 심층의 신앙과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나의 깊은 내면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느끼고 깨닫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심층의 신앙이다. 또한 하느님을 내면적으로 인식하는 체험은 하늘나라가 나의 것이 되는 체험이다. 하늘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내면적으로 만나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하늘나라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심층의 신앙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 슬퍼하고 / 온유하고 /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고 / 자비를 베풀고 / 마음이 깨끗하고 /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고, 하늘나라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심층의 신앙인이 되는 길이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고,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것이다. 하늘나라는 먼 미래에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가 나의 것이 되는 심층의 신앙의 체험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하늘나라의 체험 즉 심층의 신앙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막연하게 한없이 기다릴 일이 아니다. 지금이 심층의 신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단할 때다. 물론 큰 두려움과 불편함이 따른다. 그러나 두려움의 원인은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때문이며,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열등감 때문이다. 심층의 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징벌은 없다. 더욱이 죽은 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다. 생존의 두려움과 사심과 이기심과 비교함을 내려 놓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자유롭고 심층적인 신앙을 살아 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종교인들은 심층을 가로 막고 있는 표피층을 걷어 내고, 심층의 신앙인이 되자! 그리고 무엇보다 성숙한 참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자! 우리는 할 수 있다. 지금 이것을 시작할 때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