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는 교회기독교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현실을 거부하거나 또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 나가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는 물론 가족들 사이에서도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과 또는 비기독교인들과 상종하기를 꺼린다. 심지어는 한 교회와 교단 내부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르면 하루 아침에 쉽사리 원수지간이 된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들은 주류 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성서직역주의의 맞춤형으로 변질시키고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하려고 한다. 거기에다 이 세계(현세)를 버리고 죽은 후 다른 세계(내세)로 이주할 망상에 빠져있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기 때문에 138억 년 전 우주의 출현, 45억 년 전 지구의 등장, 35억 년 전 지구상에 첫 생명체의 등장, 600백만 년 전 인간의 조상의 등장, 지난 35억 년 동안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명체들의 진화과정, 현재 발생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위기를 부인하고,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인 계시들을 성서문자주의에 따라 멋대로 조작하고 이것을 정당화한다. 그 결과로 종교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황금만능주의와 성공주의에 따른 빈부차별, 기독교인만 구원받는다는 차별주의와 우월주의 등의 비상식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렇게 무지와 망상에서 비롯된 만행들의 원인과 이유를 종합적으로 지적한다면 오늘 하느님의 징벌과 죽은 후 지옥에 대한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개인적인 구원과 축복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때문이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복음 15:1-8) 예수의 뜻은 온 인류가 자신의 제자가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소위 기독교의 이분법적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체계의 차별주의와 로마제국의 우월주의를 반대하고, 우주적인 통합의 비전으로 종교와 정치의 경계 넘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해야 한다는 자신의 정신을 따르라고 요청했다.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 건설이였는데, 예수가 얻은 것은 교회이다. 이 말은 필자의 멘토인 영국의 신학자 돈 큐핏 (Don Cupitt)이 자신의 저서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에서 밝혔다. 오늘 기독교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에 대해 정직하게 심사숙고해야 한다. 예수는 전폭적인 포용(Radical inclusion)의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왜 교회는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가? 또한 예수의 정신대로 지금 여기에 전폭적인 포용의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한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전폭적인 포용이란 이원론의 신앙으로 사람들을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사람으로 분리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신학과 제국신학에 항거하여 조건없는 우주적인 통합의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했다고 선포했다. 또한 이것을 입술로만 외치지 않고 스스로 살아냈다.
인류역사 초기에 고대인들이 세계를 포용하는 능력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지구와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 수 없었다. 중세기까지도 지구는 그저 평평하고 자신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했다. 또한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모든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나 강이나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넓은 대양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너머로 가보고 싶었지만 알지 못하는 곳에 가기가 몹시 두려웠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만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을 알고 있었다. 한 종류는 자신들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같은 부족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한 종류는 자신들과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되는 이방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뭔가 다르다는 것은 악마 또는 적어도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다르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가까이 하기가 두려웠고, 따라서 다르다는 것들을 항상 멀리하고 경계해야만 했다.
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익히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낮과 밤 즉, 어두움과 빛이 바뀌는 변화에 대해 두려움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그 리듬에 적응했다. 그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시냇물, 나무, 숲 풀,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신앙의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들이 여기저기에 숨어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항상 긴장하며 살았으며 편집병에 이를 정도로 방어의식이 마치 그들의 본능의 일부처럼 되었다. 사실상 이 점에 있어서는 21 세기의 현대인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고대인들은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특히 죽음 이후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안감과 두려움을 크게 불러 일으키고, 반드시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 결과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협조도 생존을 위한 것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처신할 수 있는 만큼의 현실만을 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인류가 이해할 수 있었던 세계는 대단히 협소하고 제한적인 세계였다.
오늘 많은 현대인들은 마치 고대인들처럼 작은 세계 속에서 생존의 두려움을 안고 부족적인 삶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넘어섬으로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현실을 포용하고,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성장하며, 새로운 자아의식의 단계를 향해 자신을 개발한다는 것은 필연코 인간의 운명이다. 따라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듯 하다. 하나의 작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방대한 우주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자아의식의 발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기독교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과 행성, 별 등의 모든 천체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지구 중심 우주론 즉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모든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따라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발표함으로써 교회의 우주론을 뒤집어 엎었다. 이 이론은 현대천문학으로 발전하면서 태양 또한 우주의 중심이 아닌 태양계의 중심이며,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항성계와 은하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갈릴레오(1564-1642)는 지구는 평평하다는 삼층 세계관의 노예가 된 교회에 도전하여 지구는 둥글고 회전한다는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와 갈릴레오의 새로운 통찰력이 들려지기까지 인류 진화 역사에 수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생각들을 발표했을 때에 주위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깔렸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에 사회를 통제하고 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던 기독교 교회는 갈릴레오의 새로운 통찰력에 부정적이었고, 그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비전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발표는 교회를 두렵게 만들었다.
챨스 다윈(1809-82)이 인간도 다른 생물들처럼 똑같이 진화한다고 발표했을 때,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다"는 인간의 특별한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주장이 도전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고, 그를 배척하고 적대시했다. 인간은 지구 위의 많은 생명체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 다윈의 진화론은 사람들의 안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와 사람들이 불안했던 동기는 생존의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생존의 두려움이란 동물이나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사람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쳐온 잘못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서 그들을 통제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토론토의 어느 한인교회 목사가 일간신문에 "교인들에게 종말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 그 목사의 말은 교인들이 두려움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욱 열심히 예수를 믿고, 하느님을 믿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충성할 것이라는 발상이다. 사실상 적어도 1700 년 동안 기독교 교회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이기심을 주입시켜 왔기 때문에 토론토의 어느 목사 한 사람을 비판하기가 어렵다. 그 목사도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의 수많은 희생자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1700 년 동안 사람들의 가슴 속에 주입해온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는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비상식적이고 이분법적인 교리와 전통에 타율적으로 복종하고 탄압받던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인식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마가복음서(15:39)의 기록에 보면, 예수가 처형당하던 때에 십자가 밑에 서있던 이방인 백부장이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가 숨을 거두시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그가 생존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이방인은 예수는 마치 하느님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왜나하면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을 살았고, 끝없이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예수의 온 생애는 적을 만드는 일에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생존의 두려움에 매달려 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일에 제한이 없었다. 전폭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했다. 생존을 위해 따로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는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교리적 정통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참 뜻은, 깨끗한 사람(the cleaned)과 더러운 사람 (the uncleaned)으로 분리하고 소위 깨끗한 사람들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이원론의 신앙체계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인간의 비전을 위하여 소위 더러운 사람들 편에 섰던 예수를 체험한 고백이다.
예수는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섬으로 생존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백부장의 예수 체험 은 인간의 생명은 속박할 수 없으며, 하느님이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느끼고 깨닫는 현실적인 실제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믿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느끼고 외부적으로 드러내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과 생명과 자연이 온전해지는 궁극적인 요청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참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의 표현이다. 예수가 말한대로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인간 안에 있는 세상이 하늘나라이다. 예수는 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건설하여 모든 사람들이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넘어서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화와 종교에서도 계시되는 우주적인 실제 즉 통합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종교와 인종이 독점할 수 없다. 만일에 다른 종교와 인종과 사상을 배척한다면 나의 하느님은 이미 가짜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
예수는 하느님에게로 들어가는 첫 발걸음에 대해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마태 5:44) 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누가 6:27-28)라고 강조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해방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인 욕심과 사심과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고 전폭적인 포용을 실천함으로서 생존의 두려움을 넘어선 심층의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려움과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이 곧 부활의 체험이고 구원의 길이다. 두려움과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은 새로운 의식을 갖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살아내는 것이며, 참 인간이 되는 길이며, 오늘 인류의 구원의 길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