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유신론적으로 믿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오늘 하느님 개념이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으며, 유신론적 하느님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비상식적인 징표는 교회의 안밖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이 죽어가는 원인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난 1세기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지구가 평평하다는 삼층 세계관이 가치관과 세계관과 윤리관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탐구가 오랜 세월 과거의 패러다임에 젖어있던 인습적인 기독교인들의 눈과 귀를 열었다.
원초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배척하고, 무신론적 하느님을 선포했다. 물론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1세기에 살았던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성전종교에 의해 무신론자로 정죄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됬다.
유신론적 하느님과 무신론적 하느님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면, 무신론적 하느님은 관계론적인 삶의 비전이다. 즉 무신론적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상호의존관계이며, 삶 속에서 느끼고 인식하는 궁극적인 진리이며 실제(Reality)이다. 고대 전통적인 종교가 맹신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과 이 세계와 분리되어 외부 즉 다른 세계(하늘 위)에 타자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의 특징은 부족적이며 자신의 부족만을 보호하며, 비단 자신의 부족 내에서도 복종하지 않으면 징벌이 따르고, 순종하면 축복을 내리는 이분법적인 심판자이다. 반면에 역사적 예수가 깨닫고 인식한 무신론적 하느님은 생존과 종교의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이며, 참된 인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예수는 부족적이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을 인간 보다 더 소중하게 숭상하는 제도적인 종교를 거부한 무신론자였다.
예수는 제자들과 종교체계가 죄인으로 정죄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것을 목격한 소위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항의하고 비난하자,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재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마태복음서 9:9-13, 20-22a, 10:1, 5-8)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이다. 다시 말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이다. 예수가 거부한 유신론적이고 초자연적이고 부족적인 하느님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우주진화 역사와 함께 인간 생물종이 등장하고 진화한 과정을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필수적이다.
하느님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이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체험 밖의 실제(Reality)를 서술하지 못한다. 서술한다고 해도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고 상상에 불과하다. 하느님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즉 뇌의 작용에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우리의 의식과 인식 속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21세기에 기독교 성서만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과 과학, 문화, 철학, 인류사를 통해 하느님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지식의 발달은 전통적인 하느님 개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시켰다. 즉 하느님은 하늘 위에 또는 하늘 밖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멋대로 인간 세계에 개입하고, 사람들에 기도에 응답하고 보상하고, 징벌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주과학과 뇌과학과 컴퓨터공학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유신론적 종교를 거부하고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떳떳하게 천명하는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더 이상 무신론자라는 말이 두렵거나 부끄러운 말이 아니다. 무신론자(atheist)라는 말은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신론자는 부족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들이 맹신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 즉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하느님이란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유신론을 부정하면서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는 무신론자 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하느님 체험은 종교체계 내지는 믿음체계에서 주장하는 유신론적 정의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설득력도 없다.
138억 년 우주진화 이야기를 인식한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태초에 인간은 21세기의 현대 인간처럼 완성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에 삼층 세계관의 창조론 즉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인간과 생명체들과 자연을 완성품으로 창조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인간과 생명체들과 자연과 하느님이 등장하기 훨씬 전,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 세계가 자율적으로 출현했으며, 45억 년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탄생했다.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인 원핵세포가 생겼을 때 지구에는 아직 마른 땅이 없이 전체가 바닷물로 덮혀 있었으며, 비로서 25억 년 전, 대륙이 생겼다. 진화과정은 계속되어 20억 년 전, 진핵세포가 등장했고, 7억 년 전, 최초의 다세포가 등장했고, 5억1천만 년 전, 척추동물이 등장했다. 긴 세월이 흘러간 후, 3천만 년 전, 유인원이 등장했고, 2백60만 년 전, 최초의 인간, 즉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했고, 20-30만 년 전, 태초의 이성적인 인간, 원시 호모 싸피엔스가 출현했다. 4만 년 전, 현대의 호모 싸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만8천 년 전 그림으로 자신들의 상상을 표현했다. 우주 역사의 가장 최근에 약 6천 년 전, 인간은 신(god)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3500 년에 설형문자를 발명하고, 기원전 1700년에 초기 알파벳을 발명하면서, 신/하느님/브라만에 대해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초자연적인 창조주가 단번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며, 반대로 하느님(god)은 인간이 만든 말이다.
인류사에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해온 말들 중에 신 또는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창작한 은유적인 표현이며 궁극적인 실제(Reality)를 뜻한다. 즉 장구한 우주 역사에서 인간이 하느님보다 먼저 출현했고, 하느님은 현대 인간이 출현한지 수십만 년이 지난 후, 약 6천 년 전, 인간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신체적 부위들도 진화하고 있다. 특히 뇌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과거 어느 시점에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초자연적인 신이 변하지 않는 영구한 뇌를 창조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는 인간이 출현한 이래 수억 년 전부터 끊임없이 진화해왔으며, 미래에도 인간 생물종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인간 생물종이 살아있는 한 인간과 생명의 의미, 하느님의 의미 그리고 세계의 의미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의 자의식의 부산물이다. 인류사에서 유신론이 인간 정신을 철저히 장악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욕구에 기인한다. 그러나 지난 여러 세기 동안의 근대 문명과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인해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은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설득력과 효력을 잃어 죽어가고 있다. 오늘 유신론은 인류사회를 혼돈과 분단의 늪으로 빠트리고 있으며 인류의 밝은 미래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많은 종교인들이 여전히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고집으로 유신론에 계속 집착하는 기이한 현상을 연출하는 그 원인은 인간 생물종의 출현과 진화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적 정의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고, 욕심을 보호하고 안정을 찾으려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상상하고,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을 보장하는 종교체계와 이에 따른 믿음체계를 창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진화 세계에서 하느님은 죽지 않고도 초자연적인 유신론은 죽어가는 현상이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수백만 년 전부터 생명체의 진화과정은 계속되어 왔으며, 원초적인 인간 생물종은 21세기 현대 인간같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흡사한 존재들이 등장했다. 다시 말해, 수백만 년 전, 최초의 인간 생물종은 현대 인간처럼 완성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들이 창조한 유신론적 하느님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를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20만 년 전, 의식이 자의식으로 그리고 인식이 자아 인식으로 진화했다. 인간 생물종이 의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회고하며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위해 계획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원시적인 음성과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문자적인 언어를 발명하고 발전시켰다. 인간의 언어는 추상적인 사고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성적인 인간이 등장했다. 이제 지구상에 자의식을 갖고 시간을 인식하며 언어로 소통할 능력을 갖춘 생물종이 살게 되었다. 이것은 138억 년의 진화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자연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로 변화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의식에 이르게 되었으며,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충격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 시작과 종말의 사이에 놓여있는 덧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국 인간들은 생존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언어의 힘으로 자신들의 한계성과 무력함과 허무함을 허물어뜨릴 대안을 모색했다. 다시 말해, 인간들과 무수한 생명체들이 매일매일 죽는 것을 목격하고 죽음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하나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그 현실과 투쟁한다는 것을 별개의 문제다. 또한 인간이 자연 세계 속에서 살면서 삶과 죽음의 일상적인 순환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하나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인식하고 스스로 의식적으로 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아의식적인 인간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소멸될 것을 자각한다. 이런 인식 때문에 인간은 인생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을 이성적인 호모 사피엔스라고 칭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의식의 고통과 공포를 감수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만성적으로 불안한 생물종이다. 결국 인간은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창조할 수밖에 없는 영특한 생물종이다.
인간 조상들이 죽음과 한계성과 무의미을 인식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자의식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의식을 지탱할 수 있는 정신기제 이상의 무엇이 절실히 필요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유신론적 하느님의 개념을 창조했다.
인간들은 직면하고 있는 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처럼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어 인간을 불안에서 보호해 주고 축복해 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으며, 그 초자연적인 존재를 인간과 분리하여 하늘 위에 타자로 설정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사고 과정이 대단히 초보적인 형태였으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인간들은 이런 힘들을 영(spirit)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세계와 영의 세계로 분리했다. 영들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며,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이 탄생했다. 이것이 유신론의 출현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는 교회기독교는 타락-죄-회개-구원의 공식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으며, 이것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보상관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들이 만든 종교제도들은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서 안전과 보호를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신론으로 하느님을 개념화해서 자신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망상의 노예가 되었다. 1세기에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등장했을 때에 성전종교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이분법적 통제와 착취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민중들은 가난과 질병과 절망 속에서 마치 죽음의 골짜기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과는 180도로 다른 새로운 하느님을 만났다. 다시 말해,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무신론적 하느님이었다. 예수에게서 발견한 무신론적 하느님은 불치병자들, 가난한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여인들과 아이들, 이방인들과 소위 죄인들 등 종교와 사회에서 버림받고 쫓겨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조건없이 사랑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이다. 유신론자들은 이런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린다.
안타깝게도 고대 인간들의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에서 생겨난 유신론적 하느님은 현대 기독교에서 계속해서 숭상되고 있다. 그러나 유신론적 하느님은 실재가 아니며, 망상이다. 유신론은 하느님에 대해 인간들이 만든 관념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하느님 이해에서 유신론적 하느님을 내려놓아도 종교적일 수 있다. 무신론이 유신론의 반대이듯이, 유신론적 하느님의 반대는 무신론적 하느님이고,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무신론자이다. 예수는 고대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자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기 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무신론자들이 인류의 밝은 미래의 희망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