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하느님 예수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독교 후기 시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기독교화된 시대,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던 시대의 종말을 가리킨다. 새로운 시대는 잃어버린 무신론자 예수를 탐구하는 시대이다. 왜냐하면 지난 170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온 유신론자 예수는 인류사회와 세계사의 실패자일뿐만 아니라 파괴자였기 때문에 후세대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잃어버린 무신론자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
예수는 믿어야 하는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예수는 하느님도 아니고, 하느님이 될 필요도 없다.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도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와 믿음체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과 인식을 심어주었다.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과 종교의 상징인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후 참 인간 예수와 그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던 참된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예수는 그가 철저히 반대했던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 유신론적으로 이해되는 하느님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 또한 고대인들이 만든 유신론자 예수,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 초자연적인 예수, 이분법적인 예수, 성상의 예수는 더 이상 인류의 밝은 미래에 위험할뿐만 아니라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 학회(www.westarinstitute.org)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역사적 예수, 잃어버린 무신론자 예수, 참 인간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탐구하며, 죽어가는 기독교 교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가 세계를 기독교화하고 산업화했던 시대가 끝이 나고 진정한 예수, 역사적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탐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성서적 교리적 유신론적 감옥으로부터 무신론자 예수를 해방시켜야 한다. 유신론자 예수는 교회의 한정된 영역 안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으로 몸을 다치지 않으려고 만들어진 가짜 예수이다. 갈릴리의 현자 예수, 제도적인 종교와 교리와 믿음을 거부한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나 교리들보다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삶의 가치관과 윤리관이 되어야 한다.
역사적 예수는 사회개혁가로서 세속적인 현자였다. 신약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참된 인간성의 소중함을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비유들과 짧은 말(경구- 예수는 장황하고 길게 말하는 설교가가 아니었다.)들은 성속의 경계, 종교의 경계,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적 종교와 믿음체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는 유신론적 종교의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행동들에 대해 무관심했고 심지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심하게 질책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이 땅 위에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세속적이고 비종교적 즉 무신론적으로 가르쳤다. 따라서 유신론적 종교체계는 예수를 신앙심과 믿음이 없는 무신론자로 정죄하고 처형했다. 오늘 현대 교회들도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 예수, 무신론자 예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무신론자 기독교인들을 이단자로 추방하고 있다. 유신론적 교리주의에 빠진 교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신화들을 예수 위에 더덕더덕 회칠했다. 교회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상 예수를 페기처분한 무당집이 되었다.
예수는 신앙과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보다, 예수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몸소 살았던 것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선포한 참된 인간성이 하느님과 종교와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체계가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와 교리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대개 외부의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인 예수에 대한 믿음은 부족적이고 폭력적이고 묵시종말적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더러운 죄인이고, 무기력하고, 가능성이 없고, 창조성도 없기 때문에 하늘 위에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개입해서 예수를 믿는 신자들 즉 유신론자들에게 보상과 축복을 내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 즉 무신론자들에게 징벌을 내려야 한다. 믿음체계의 교회들이 말하는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 유신론자 예수,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고 동정녀에서 탄생한 예수, 하늘 위로 승천했다 다시 땅으로 재림할 최후의 심판자 예수는 외부의 구원자이다. 따라서 인류 전체를 위해 그런 예수를 성상의 자리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
역사적 예수는 겸손하고 평범한 갈릴리의 현자였을 뿐이다. 예수는 믿어야 하는 유신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거룩한 성전에서 가르치기 보다는 냄새나는 장터와 바닷가에서 그리고 자연의 들판과 산 위에서 오직 참된 인간성에 대해 가르쳤다. 무엇보다 예수는 그의 생애 동안에 사회와 종교에서 버림받은 하층계급의 사람들, 죄인들, 세금징수원들, 창녀들, 문둥병자들, 여인들, 어린이들,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식탁에 둘러 앉아 웃고 울고 먹고 마셨다. 유신론적 종교가 무시하고 추방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정면으로 대하고, 대화를 나누고, 접촉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부족적 종교의 경계와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혁명적이며 무신론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은 유신론적인 제도적 종교에 반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신론자 예수의 정체성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숭상하는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는 삼층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원시적인 우상이다. 예수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이 그를 성상(聖上)의 자리에 앉였다. 325년에 콘스탄틴 로마황제가 정치적으로 니케아 신경을 만든 이래 예수는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되었으며, 유신론자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1700년동안 신성의 예수를 믿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약탈과 탄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오늘까지 오랜 세월동안 하느님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는 커녕 인류사회를 분단과 혼돈 속에 빠트렸다. 그 예를 들자면,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종교차별, 백인우월주의 즉 인종차별, 노예제도, 종교재판으로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대량학살, 십자군원정 이래 세계대전들과 지역 전쟁들, 이락과 아프칸 전쟁, 여성을 동물처럼 대하는 성차별, 어린이들을 업신여기는 아동학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동성애자 학대, 현대과학을 무시하는 삼층 세계관의 가치관과 윤리관, 자본주의의 부산물인 극심한 빈부차이, 과학을 무시하고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부인, 경제성장을 위한 생태계 파괴, 이 세상의 종말을 꿈꾸는 내세 신앙 등등이다. 이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는 인류 구원에 실패했을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의 의식은 진화하고 있으며, 과학과 지식의 발달로 유신론자 예수, 인간의 모습을 지닌 인격적인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죽어가고 있다.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고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하늘 위로 승천해서 떠났다는 이야기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또한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삼위일체도 오늘 과학시대에 비상적인 말이 되었으며,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으로 피를 흘리고 죽었기 때문에 단번에 인간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대속론도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오늘 우주 세계에서 어디가 하늘 위이고, 어디가 땅 아래로 구분할 수 있나? 몇 일 전에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협력해서 블랙홀을 촬영하는 데에 성공했다. 블랙홀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판명되었다. 불랙홀이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경계로써 별들과 은하계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상중하 층이 없다. 우주 세계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로 분리되지 않았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여기가 전부이다. 죽은 후 다른 세계로 갈 곳이 없다. 내세와 현세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사실로 밝혀진 불랙홀이 이 우주의 법칙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성서는 불랙홀을 모른다. 유신론적 하느님도 미래를 모른다. 그러나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한 무신론자 예수는 우리에게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참 인간으로 온전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
예수는 기독교의 믿음체계가 만든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인간의 삶 속에 새로운 의식 즉 참된 인간성이 유신론적 하느님과 이에 대한 제도적인 종교와 교리적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는 인식을 깨우쳐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 없는 종교, 하느님 없는 교회, 종교 없는 사회, 하느님 없는 사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유신론적-인격적-초자연적인 하느님과 이것을 맹신하는 종교와 제도와 전통은 더 이상 인간의 안전망이 아니다. 제도적 종교의 안전체계 즉 믿음체계는 부족적 생존의 경계였으며 예수는 경계 넘어 참된 인간성을 보여 주었다. 예수가 거부한 종교적 경계는 유신론의 부족적 생존의 부산물이다.
예수는 하느님이란 하늘 위에서 충성스러운 신자들(유신론자들)과 생존의 두려움에 벌벌떠는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 멋대로 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하느님은 무신론적 하느님으로써 인간의 내면에서 느끼고 깨달아 아는 우주적인 진리 즉 통합적인 비전이고 실제((實際 Reality)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안전과 부를 조건부적으로 제공하는 하늘 아버지 하느님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들에게 위협과 자비, 징벌과 보상을 이분법적으로 내려주고, 인간들이 수동적으로 순종하고 의존하기를 바라는 부족적이고 옹졸한 하느님을 반대했다. 예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탄압하고 박탈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필요없다고 선언했다.
하늘 너머에서 우주의 법칙을 깨트리며 기적을 일으키는 유신론적 초자연적 하느님은 없다. 그런 하느님을 맹신하는 것은 시간과 돈 낭비일뿐이다. 하느님의 의미는 역사적 예수, 무신론자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자 예수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절망에서 사랑과 희망과 용감함으로 느끼는 깨달음이다. 무신론자 예수의 하느님은 인종과 종교의 부족적 경계 넘어에서 인식할 수 있다. 무신론자 예수의 하느님은 힘없는 여인들과 어린이들의 슬픔 속에서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 무신론적 하느님은 실패자와 외로운 사람들과 왕따당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무신론적 하느님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와 죽어가는 생태계에서 인류의 희망으로 느낄 수 있다.
예수는 부족적 종교의 경계 즉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으로 생겨난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낙인찍혀 성전에서 쫓겨나고 처형되었다. 마치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고 교회에서 추방된 것과 같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믿는 유신론적 초자연적인 예수는 인류사회의 분단과 혼돈을 가증시킬뿐이다. 인류의 밝은 미래는 참된 인간 무신론자 예수의 정신에 달려있다. 무신론자 예수의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생명의 망으로 한 몸을 이루는 통합적인 비전이다. 따라서 오늘 기독교인들은 잃어버린 무신론자 예수를 되찾고,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종교와 정치와 사상으로 분단된 가정과 사회와 나라들이 용서와 화해로 하나가 되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