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은 전통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부활절 이야기는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에 대해 반복해서 들어오던 진부한 이야기보다는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롭게 인식하는 부활절 이야기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질문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느냐?가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심층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고백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가?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하늘 위로 승천한 것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몸의 부활을 믿어야 죽은 후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이분법적인 구원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에 대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종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예수에게 솔직하고 그를 따른다면 기독교는 유신론적인 초자연적 하느님에 대한 종교가 될 수 없으며, 예수가 깨닫고 가르치고 구체적으로 살아낸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참된 인간성을 예수처럼 살아내는 종교이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초자연적인 하느님 예수를 믿어야 하는 유신론적 절기가 아니라, 참된 인간성을 살아 내는 무신론적 절기이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76억 인류에게 기독교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 부활 이야기는 문자적으로는 비상식적이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예수 부활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깨달은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천사들이 예수의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을 선포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다. 몸이 다시 살아난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지 않았다. 살아난 예수가 마음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벽을 통과하고 의심하는 사람에게 그의 상처를 만지게 하지 않았다. 또한 살아난 예수가 바닷가에 나타나 기적적인 어획을 행했거나, 중력의 법칙을 깨트리고 삼층 세계관의 우주의 상층 하늘로 올라간 인간일 수 없다. 이 모든 문자적인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신화이다.
예수는 유신론적 종교체계와 군사적인 로마제국주의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은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로마서 6:9)고 고백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죽음이 예수를 삼킬 수 없다는 놀라운 깨달음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을 회상할 때에 놀랍게도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내면으로부터 되살아났다. 어떤 사람은 “나는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린도전서 15:4)고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예수의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사람들의 가슴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통찰력의 깨달음이 있었다. 다시 말해, 물리적 시각이나 문자적 역사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카메라로 찍을 수 있었던 사실적 현상이 아니다.
예수 부활 이야기들이 생겨나기 전, 가장 먼저 예수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 제도적인 종교의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느님과는 너무나도 다른 신선하고 생기가 넘치고 우주적인 하느님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다시 말해,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참된 인간성에 대한 경이로운 인식과 체험이 있었다.
오늘날 과학이 일상생활에서 보편화되고, 과학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과학을 거부하면 망상에 빠진 삶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신화(myth)와 사실(reality)은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기독교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부활이 문자적으로 믿어야 하는 신화에 머물면 기독교는 환상에 기초한 종교일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신화적 망상에 빠진 교회들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부활 이야기를 역사로 읽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습적인 믿음체계가 주장하는대로 문자적으로 예수의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고, 걸어다니고, 먹고 마시고, 가르치고, 하늘로 승천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 처형 이후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의식의 변화 즉 놀라운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이 솟아 올랐다. 감겼던 눈이 떠지고, 닫혔던 귀와 입이 열리고, 무엇보다 닫혔던 가슴이 활짝 열렸다.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었던 참된 인간성이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되살아났다.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엄성, 참된 인간성은 유신론적 초자연적인 종교제도와 군사적인 로마제국의 통치와 탄압 아래에 억눌려 숨쉴 수도 없었고,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고, 완벽하게 무시되었었는데, 예수가 사람들의 참된 인간성을 일깨워 주었다.
예수 부활의 원초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성서 기록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의 문자적인 기록은 모순되며 혼돈스럽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평생동안 성서를 신중하게 읽지 않고, 무작정 들려지는대로 믿는다. 따라서 성서 기록이 오류투성이고, 왜곡되었다는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씨름해본 적이 없다.
신약성서의 예수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신중하게 읽으면, 최초로 신약성서를 기록한 바울과 복음서를 최초로 기록한 마가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최초의 복음서 저자 마가 보다 10-20년 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애매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와 요한이 예수의 몸의 부활을 말하기 시작했다. 또한 신조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2세기부터는 이렇게 후기에 발전한 전승이 초기의 비육체적 부활 전승을 문자적으로 압도하고 오늘과같은 유신론적 부활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시작되는 핵심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성서 기록들은 모두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실은 예수 부활에 대해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서가 기록된 목적은 그 기록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암기하기 위한 역사책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의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이라는 경이로운 체험을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은유적 내지는 시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성서가 기록된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저자의 내면적인 의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주류 대학교의 필수과목이 되고 있는 성서비평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일치하지 못한다: 바울은 게바(베드로)라고 한다(고린도전서 15:5). 마가는 첫 증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태는 동산에 있는 여인들이었다고 한다(28:9). 누가는 글로바와 그의 동행자였다고 한다(24:13-35). 요한은 막달라 마이라였다고 한다(20:11-18).
복음서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 때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마가는 갈릴리일 것이라고 한다(16:7). 마태는 갈릴리에 있는 산꼭대기였다고 한다(28:16-20). 누가는 갈릴리는 절대로 아니고 예루살렘이거나 혹은 예루살렘 지역이었다고 한다(24:36-49).
또한 현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부활, 승천, 오순절의 체험들이 발생한 순서에 대해서도 복음서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바울은 부활과 승천은 동일한 사건이었다고 한다(로마서 1:1-4). 마태는 예수가 정원에서 여인들에게 나타난 때와 산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때 사이에 승천했다고 한다(28:16-20). 누가는 50일 동안에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먼저 부활, 40일 후에 승천, 그 후 10일이 지나 오순절이 있었다고 한다(누가 24장, 사도행전 1, 2장). 요한은 예수가 새벽에 부활했고 그가 막달라에게만 나타난 다음에 부활절 낮에 승천했으며, 오순절은 부활절 저녁이었다고 한다(요한 20:1, 17:23).
주목해야 할 것은, 부활절에 대해 최초로 마가 복음서가 기록된 후에 나중의 이야기들은 마가의 이야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마가의 이야기에서 부활의 예수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가복음서에서 여자 제자들이 무덤 속을 살펴보는 데 그쳤다. 약 30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서에 이르러 도마가 예수의 못자국을 만지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이것은 원초적인 이야기가 많이 발전한 것이다. 성서저자들이 처음에는 “죽음이 그를 삼킬 수 없다”라고 기록한 것이 시간이 흘러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하여 “나는 주님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예수를 보았다는 것은 반드시 육체를 느끼고 만져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정신, 예수의 참된 인간성, 예수의 의미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예수를 지배할 수 없고, 나는 주님을 보았다는 통찰력의 깨달음, 제2의 눈, 마음의 눈이 열렸다는 고백으로 발전한 것이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결정적이고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한 순간들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하기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부활절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역사책으로 읽는 것은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이며 원초적인 예수의 정신과 참된 인간성을 폄하하는 결정적인 오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수 이야기를 왜곡하고 변질시킨 문자주의의 유신론적 예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상실하고 효력도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런 예수와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 교회동창회가 증가하고 있다. 예수는 지극히 자연적이고 인간적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순결한 동정녀의 성상(聖像)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요셉은 문학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예수에게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열두 명의 남자 제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 중에는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었다. 예수는 우주의 법칙을 깨트리면서 자연을 굴복시키는 초자연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는 문자적으로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중풍에 걸린 사람을 정상적으로 걷게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상징화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에서 빵을 떼는 것이 십자가 처형에서 그의 몸이 찢어지는 것과 포도주가 그의 흘린 피와 동일시되는 최후 만찬은 없었다. 제자의 배신도 없었으며, 조롱하는 무리도, 가시 면류관도, 십자가상의 말도, 강도들도, 갈증과 비명과 정오의 암흑도 없었다.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육체도, 예수의 상처를 손으로 만진 일도, 그가 성서의 비밀을 밝혀준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하늘 위의 천국으로 승천한 일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문자적인 기록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 동안에 느끼고 깨닫고 인식한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자신들의 삶 속에 다시 회복되는 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빈 무덤의 전설은 유대인들과 헬라문화에서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고대의 영웅전들에서 영웅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신들의 세계인 하늘 위로 올라갔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마가복음서 사본의 빈 무덤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며, 원초적으로 마가의 생각이 아니다. (참고: 오늘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마가복음서는 원본이 아니라 필사가에 의해 편집되고 변개한 사본이다. 모든 신구약 성서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며, 성서는 사본들의 모음집이다.)
2천 년 전, 첫 번째 부활절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체 사람답지 못하게 살던 사람들이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깨닫고, 삶의 용기와 희망과 기쁨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아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즉
부활절 이야기는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다.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반복해서 들어오던 비상식적인 이야기보다는 21세기에 적절한 부활의 새로운 의미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부활이란 말의 의미는 숨이 끊어져서 죽었던 몸이 얼마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은 빈 무덤과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활은 과거에 예수에게만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영원히 일어난다. 오직 기독교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은 후 하늘 위에 내세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세에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느님을 인식하는 순간이 부활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의 긍정적인 변화의 부활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생태계적으로 일어난다.
문자적으로 믿어야 하는 유신론적 예수와 함께 유신론적 부활절은 죽었다. 초자연적 하느님 예수의 부활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무신론적 부활의 의미는 우리 각 사람이 따로따로 분리되어서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어 한 몸으로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무신론적 부활절의 의미는 부족적 생존의 경계와 부족적 종교의 경계 넘어 모든 공포와 욕심을 떠나 보내고 자유하게 의미있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부활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람답게 온전하게 사는 것이다.
138억 년 우주진화 이야기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인간의 자아의식도 진화되고 성숙해진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며 사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과 외로움을 넘어 설 수 있는 길이다.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의 자아의식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참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다 죽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으며 그들은 새로운 인간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수의 부활절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늘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이고 의무이고 책임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