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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16] 유신론자 기독교인들의 공포와 폭력적인 분노

by 최성철 posted May 17, 2019 Views 1684 Replies 0

 

오늘날 죽어가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21세기에 주류 사회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유신론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며, 믿는다고 우겨대면 그것은 망상이다. 오늘날 유신론이 죽어가고 있는 징표는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이미 지난 수세기 전부터 시작됬다. 예를 들자면,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하늘 위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지구상에 사악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쓰나미, 태풍, 홍수, 폭염, 산불 등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질병과 사고와 불행한 일들을 하느님의 진노로 해석하지 않으며, 전쟁에서 하느님이 기독교인들 편에 서서 원수들을 멸망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운동경기에서 기독교인들이 승리하게 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바람직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내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이미지와 언어가 예배와 설교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부족적이고 유신론적인 생존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또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새로운 예수와 새로운 인간을 탐구하는 것에 완강히 반대하고 저항한다. 그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달리 말할 수 있는 대안이 없으며, 유신론이 붕괴되면 지옥만 남는다는 공포와 불안에 빠져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이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무신론에 대한 공포를 용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유신론적 하느님 언어와 이미지들을 믿는 척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138억 년의 우주 역사 속에서 살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초자연적 하느님의 유신론을 떠나 보내고 무신론적 하느님 즉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현실적인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 낼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초자연적 하느님 없는 무신적(godless) 세계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삶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와 유신론을 확실하게 분리해야 한다. 예수는 무신론자였다. 예수는 유신론적이고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종교를 철저하게 반대했다. 예수가 반대한 유신론적 하느님은 사람들의 참된 인간성을 폄하하고 박탈하며,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무절제하고 폭력적인 종교적 분노를 일으켜 가정과 사회를 증오와 분단과 혼란에 빠트린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요한복음서 10:10). 따라서 기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증진시키는 참된 인간성이다. 325년에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진 이래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는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성적본능차별이라는 편견과 오만 속에서 안일하게 생존해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북미의 유신론적 기독교는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제도적 기독교가 오랜 세월 누렸던 권력은 새롭게 등장한 세속적인 인도주의(humanism)로 이동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도주의는 기독교의 편견들을 말살시킨 주역이 되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인간의 권리,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재발견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위대한 과업이다. 물론 20세기 이후 기독교의 편견들 즉 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공포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견들은 지난 세기에 이미 퇴출되었고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한체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오늘처럼 편견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었다. 논란이 되는 편견들이란 항상 소멸되어 간다.

 

오늘처럼 유신론적이고 제도적인 기독교가 쇠퇴하고 인도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시점에 교회들에게 중대한 질문들을 던진다. 왜 제도적 기독교가 힘이 막강했던 시절에 비인간화시키는 차별적인 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도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못본체했는가? 수많은 교회들과 교단들은 오늘의 세상이 삼층 세계관의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급변하는 현실에 대해 왜 그토록 맹렬하게 저항하는가? 왜 제도적인 기독교는 아직도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완전한 평등에 그토록 반대하고 있는가? 왜 교회는 동성애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왜 유신론적 하느님을 신봉하는 교회는 여성과 동성애자를 교회의 권위와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희생물로 삼고 있나?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편견의 희생자들,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폭력적인 분노를 일으키기 전에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는 예수의 목적에 부합한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유신론적 하느님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의 풍성한 생명과 참된 인간성에 대해 눈이 멀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유신론적 종교 살인적인 분노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거나 모른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가까운 주변에서 종교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때 분노가 순식간에 표출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대화는 급속도로 극단적인 무례함으로 치닫는다. 몰상식하고 무식한 말들로 협박하고 모독한다. 종교적 대화는 전쟁을 방불케하며 오히려 장터와 길거리에서 싸우는 언쟁이 더 교양 있어 보일 정도다. 필자는 20년의 전문목회 동안과 은퇴 후 지난 7년간 증오에 찬 이메일과 욕설과 협박을 퍼부어 대는 전화를 받았다.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몰상식한 무례함이 일어나는 곳이 있는가? 서글프고 한심스러운 일은 모욕적 행태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협박은 무신론자, 불교신자, 회교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진정한 신자라고 자칭하고 하느님을 보호하거나,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면서 성서구절을 인용하는 기독교인들이 협박을 일삼는다. 그들은 착각하기를 하느님은 그들의 폭력적 분노와 공공연한 증오를 정당화해 준다고 믿는다. 참된 종교와 신앙이라면 분노와 증오와 폭력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이며, 예수의 풍성한 생명과 조건없는 사랑과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오늘날 유신론의 붕괴에 대한 공포가 폭력적인 분노와 살인적인 증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역사 가운데 종교적 분노는 잔인무도했다. 예를 들자면, 십자군 원정은 교회가 허락한 살인과 고문과 테러 행위였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단순히 이교도들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이 살인적인 증오는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오늘날 갈릴레오와 코페루니쿠스와 다윈에 대한 교회의 분노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적 분노는 교회 밖의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신자들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소위 원죄론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벌레만도 못한 죄인으로 폄하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거절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인간성을 폄하함으로서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이 드높아 진다고 착각한다.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죄의식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구걸하는 잘못된 예배의 의미를 낳았다. 기독교 예배가 타자인 하느님에게 자비를 간구하는 것으로 가득할 때에 인간의 의미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끊임없이 자비를 구걸하는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으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걸할 때에 내면적으로 두려움과 분노가 생긴다. 내재화된 분노는 예수가 가르친 풍성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절망적이고 비참하고 악하다는 믿음이 온전한 인간됨에 도움은 커녕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또한 예수가 가르친 조건없는 사랑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을 베풀 수도 없다.

 

또한 다른 인종과 종교와 동료 인간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을 일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무섭고 징벌하는 아버지로 이해한 가부장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느님 개념에서 직접 유래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아 보혈을 흘림으로써 하느님의 진노와 징벌이 우리에게서 떠났다는 고백은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덮어 씌어졌을 뿐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수동적인 고백은 기독교인들의 참된 인간성에 전혀 도움이 안될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 해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는 메시지들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해 죄의식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본질적인 요소가 된 것은 큰 잘못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정하기 위해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운영방식은 신도들에게 그들의 실수와 실패, 무능함과 나약함을 각인시키고 인간은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규정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자율적인 삶은 철저히 박탈당한채 만성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로 낙인찍혔다. 교회가 신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유신론적 이해의 원죄론과 대속론은 오직 하느님과 교회 만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용서할 수 있고, 인간은 다만 자비를 구걸하고 굴종할 뿐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징벌하는 심판자이고, 예수는 희생자이고, 신도들은 의심하지 말고 영원히 감사해야만하는 전통적인 믿음의 방식은 기독교인들이 의존적인 성난 인간으로 변해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기쁜 소식의 복음이 되기는 커녕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일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인간성을 박탈당하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항상 비틀거리는 삶 속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전통적으로 정의한 원죄론과 대속론은 폭력적인 분노와 살인적인 증오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자신이 폄하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폄하한다. 학대받은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더 심하게 학대한다. 처벌받은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더 가혹하게 처벌한다.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분노는 유신론적 하느님 개념과 유신론적 예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제시한 유신론적 하느님은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불신자에 대한 저주와 여성차별과 십자군의 처참한 대량학살과 최후심판에 대한 공포와 동성애자들에 대한 증오와 노예제도와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만든 신조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부족적인 신으로써 이분법적인 축복과 이분법적인 징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옹졸한 신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죽었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불안은 고조되고, 방어벽을 더 높이 쌓을 수밖에 없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의 현실은 유신론적 하느님이 죽었거나 죽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유신론적 하느님이 하늘 위에서 장부책을 기록하면서 사람들의 공과를 근거로 상벌을 주려고 한다면 그것을 오늘 누가 믿겠는가?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오직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으며,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불치병이 낫기 위한 신자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서 유신론적 하느님이 하늘 위에서 땅 아래로 개입한다는 것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기적과 마술은 우주진화 세계에서 모두 사라졌다.

 

다윈이 발표한 진화론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회의 인간에 대한 유신론적 정의를 180도로 뒤집어 엎고 새로운 인간의 정의를 내렸다. 다시 말해 원죄론과 대속론은 비상식적이며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공포와 분노를 조장했을뿐이다. 인간 생물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개체들 중에 하나이다. 인간과 모든 생물체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체들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체들 보다 가장 우월하다는 편견과 오만이 필요없다. 다만 인간의 자아의식은 자신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우주의 모든 개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할 책임의식을 갖는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친 참된 인간성이며, 이것을 인식할 때에 기독교인들은 공포와 분노와 증오에서 자유하게 해방될 수 있다.       

 

예수는 종교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소위 절망적인 죄인들이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회복하도록 격려하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인식하면 무신론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종교적인 분노와 증오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낼 필요가 없다. 오늘날 유신론은 거룩하고 무신론은 세속적이고, 유신론은 축복이고 무신론은 징벌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인습적인 믿음은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망상이다. 거룩한 것은 세속적인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참 사람 예수는 성과 속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21세기에 유신론의 소멸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떠나 보내는 것이 두려움과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성과 새로운 성숙함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오늘 교회는 권위의 보호, 성서의 문자주의, 여성과 동성애 차별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내부적으로 무신론에 대한 공포로 인한 분노와 증오로 인해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을 상실했다. 따라서 유신론적 교회는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은 유신론의 붕괴를 수용하고, 무신론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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