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
2019년 5월 24일(금) 제11호
‘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은 묵자에 나오는 말로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비추어 보라는 말입니다.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자기경계인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라는 반성이기도 합니다.
(우편번호 : 02704) 서울시 성북구 보국문로35길 49-12, 희남신도회장 김종일
E-mail : jaju58@hanmail.net, 전화 : 010-9972-1110
1. 생활 나눔
2019년 희남신도회장으로 선출된 김종일입니다.
올해에도 희남회원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11번째 서신을 보냅니다.
5월 19일, 희남신도회 5월 월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5월 생일자 축하파티를 진행 하고, 정영훈 부회장으로부터 ‘촛불혁명 시민의 함성’ 2쇄 출판관련 상황을 공유 받고 격려했습니다. 점심식사 후 성평등 부서 신설을 위한 공청회에 참석했습니다.
아울러, 5월 23일 자유한국당사 앞 “광주민주화항쟁 39주년, 망언망동 자한당 해체를 기원하는 촛불기도회”에 가능한 희남회원들도 참석을 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5월 26일 전교인수련회 “만사소통”에 희남회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6월 희남 월례회는 6월 9일, 예배 후 김희헌 목사님 방에서 열립니다.
2. 성경 한 구절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5월 11-12일 정읍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제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신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당면 정세 속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현안들을 토론했습니다. 복잡하고 심란한 한반도 현실을 걱정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2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오늘의 정세 속에서 재해석하여 사발통문에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通則不通 不通則通”이 생각이 났습니다. “통하면 고통이 없고, 통하지 않으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분단의 고통이 생각이 났고, 국회를 비롯한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서로 통하지 않아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그러진 현실이 상기되었습니다.
5월 12일 광주에 들러 구 전남도청을 비롯한 금남로에 가보았습니다. 아울러 김봉준 작가의 ‘5.18 전시회’를 둘러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5월의 상처가 빛고을 광주 곳곳마다 아로새겨 있는 현실이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전두환을 비롯한 살인마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며 오리발만 내밀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진리가 여전히 귓전에 맴도는 현실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늘 깨어 실천하며 살리라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리서 4:12-13)
3. 세상만사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외교안보 의식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5월 23일, 나경원 원내대표는 강효상 의원의 외교기밀 유출을 ‘정당한 공익제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국제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3급 국가기밀을 누설한 행위를 ‘정당한 공익제보’라고 주장하는 나경원 의원은 2015년 2월부터 1년 3개월간 외교통일위원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하겠습니다.
같은 날 황교안 대표는 철원 전방 경계초소를 시찰하는 현장에서 “정부의 안보 의식이 약해져 시스템을 망가뜨려선 안 된다”며 “남북군사합의를 조속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황 대표는 이어 “군에선 양보하는 입장을 가지면 안 된다. 민간과 정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단 완벽하게 해내는 게 중요하다. 정치권에서 평화를 이야기해도 군은 먼저 (GP를) 없애자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국방 대비태세’를 강조하던 황 대표의 발언은 급기야 ‘위험 수위’를 넘습니다. “군은 정부, 국방부의 입장과도 달라야 한다”고 말해 물의를 빚은 것입니다. 이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군의 수장인 국방부장관에 맞서라는 항명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군복무도 하지 않은 황 대표의 주장이어서 더욱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황 대표의 노골적인 내란선동에 여야 정치권에서조차 “군이 문민통제를 벗어나 항명하라는 얘기냐”며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법률가이자 국무총리까지 지낸 황 대표가 물리력을 가진 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민주주의 기본을 부인하는 발언을 한 것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고언 한마디 합니다. “정치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이라는 점을 정치를 하시던 안 하시던 꼭 명심하고 사시길 당부 드립니다.
4. 옛 이야기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39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1979년 10.26 이후 저는 단과대 대표로 뽑혀 학내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직선제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어 5월초부터 반전두환 광화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민주화 시위를 이끌어가는 와중에 5.17계엄령을 맞았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새벽 4시쯤 대학교로 진입하는 계엄군을 직접 목격하고 전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서둘러 중앙도서관에 모여 있던 2천여 명의 학우들을 기숙사 등 주변시설로 대피시키고 학생회장단도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피신하는 동안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동네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청계산 기도원에 피신해 있던 중 기도원을 수색하던 군·경 수사관들에게 체포될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천 친척집에 가던 중 동인천역 앞에서 전경에 체포되어 닭장차에 실렸으나 동행한 여자 친구의 강력한 항의로 풀려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시기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라디오와 TV뉴스에 의존하며 정세동향을 살피면서 숨죽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1980년 9월 쯤 저한테 연락을 해온 대학선배를 만나서 광주항쟁 비디오 테이프를 받았습니다. 독일인 기자가 찍은 비디오를 보는 내내 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신밖에 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 졌습니다. 돌이켜보니 광주항쟁 비디오 테이프가 저를 회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시 갈피를 잃었던 삶의 방향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비겁하게 살 것인가? 투쟁에 나설 것인가?” 이러한 고민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마태 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