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할 일을 잃고 실직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어쩌면 이미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억지로 부인하고, 망상의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은 이 하느님을 무작정 믿고 있다. 오늘날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을 보여주는 징조들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패러다임의 노예가 된 인습적인 기독교인들은 죽음과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종교적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현실을 솔직하게 직시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제도적인 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가르쳤던 예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마태복음 7:21-23) 기독교의 믿음체계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믿어야 그리고 교회에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바쳐야 축복과 구원이 보장된다는 거짓말을 강제로 주입시키고 세뇌시켰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이 하느님의 약효는 떨어지고 사람들은 떠나고 이제 할 일을 잃고 시들시들 죽어갔다. 오늘 죽은 하느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아까운 시간과 돈의 낭비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적 하느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맹신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하게 여긴다해도 그것이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에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사실상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즉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 들어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또한 이것을 실천하기가 말하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 북미에서 각 사람이 소비하는 물자의 양이 20세기초의 소비량의 약 100배라고 하니, 무엇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포기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무척 힘들겠지만 기독교인들은 보다 보람있게 자유하게 살려면 유신론적 하느님을 포기하고 떠나 보내야 한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한 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이 우주 밖에 존재하면서 가끔 지구에 내려와서 이런 저런 인류 역사에 개입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하느님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으면 또는 나의 믿음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 나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더욱이 교회는 열심히 나가면서도 하느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하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뿐이지, 사실상,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불안과 불신 속에서 안감 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상식적으로 또한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거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내가 자율적으로 하느님을 느끼고 깨달아 알 수 있느냐?”하는 문제다. “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도 누구를 (그것이 하느님이든 이웃이든) 못믿는듯한 불신 속에서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앵무새처럼 누가 말하는대로 또는 이미 만들어진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나? 이것이 지루하고 땨분하지도 않는가?” 또한 “왜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과 비교하면서 경쟁하고 있나? 더 큰 상을 받으려는 이기적인 욕심때문인가? 이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나? 나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더 잘되도록 도우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 아닌가?”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사람들을 수월하게 통제하기 위해 신뢰보다는 불안감과 이기심을 심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를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 위해서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하고, 그것도 나이 숫자만큼이나 읽어야 하며, 성경구절을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암송하고, 모든 교회의 모임과 예배들에 빠짐없이 출석해야하고,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하고, 헌금을 더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이 받는다는 상업적인 속임수를 세뇌시켰다.
종교(religion)[원래의 의미는 “관계”(relation)에서 유래됨]라는 말은 “나는 이렇게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의 하느님 체험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경험들이 모여서 서로 관계를 이루는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이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종교는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종교가 있다면 사이비 종교다. 요즘 이런 사이비 종교의 교회들이 많다. 각 자 다른 개체들의 경험들이 공동체적으로 살아갈 때에 자연적인 발생으로 종교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서로 다르게 체험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혹은 나)의 체험과 동일하게 체험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는가?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과 힌두교인들과 무종교인들에게 개종하여 자신들의 체험을 따라야 한다고 억지부릴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각 사람은 고유하게 하느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에 붕어빵처럼 다른 사람들의 복제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지혜의 말이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르게 고유하게 태어났다는 사고는 오늘 사랑이 메마른 이 세상에 마치 소나기처럼 새로운 생명력과 화산처럼 폭발하는 힘과 용기와 가능성과 희망과 기쁨을 쏟아 부어 준다. 이 말의 뜻은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참된 인간성을 살아내는 삶의 비전이다.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유신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무신론적이고 궁극적인 비전이며, 일상생활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하느님이란 말의 뜻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들이 서로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통합비전이다. 하느님은 믿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내는 삶의 요청이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 사이의 빈 공간을 어떻게 채워 가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이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나 다른 모든 것들에는 하느님이 없다는 말과 같다. 나와 다른 존재들 사이에 높은 경계의 벽이 쌓여져 있다면 하느님이란 말은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은 복잡하거나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하느님을 살아내는 기본 원칙은 자전거를 타는 것 보다 더 단순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의식적으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다만 생존의 두려움과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유신론적인 존재로 상상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온전한 삶의 방식과 표현으로 하느님을 우주적인 실제로 이해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는 인간에게 달렸다. 무신론적 하느님의 의미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공동체적 관계, 세계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는 상호의존관계의 통합적인 실제이다. 또한 이것은 성서가 기록한대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의 뜻이다. 인간 생물종의 기원은 138억 년 전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인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개체들 보다 훨씬 뒤늦게 등장했지만 모든 개체들과 함께 동일한 기원을 공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초로부터 우주의 모든 개체들과 분리될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자신의 고유한 관계들을 느끼지 못하거나 부인하며 참된 인간성을 상실하체 살아왔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교회가 이 단순한 관계를 무시해버리고 오랜 세월 동안 교리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미를 자율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신도들을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율적으로 자연스럽게 깨달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교리적으로 믿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며 또한 통합적인 비전이다.
자연스럽고 단순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거룩한 교회당 보다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사람들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효과적이고 심층적이다. 오늘날 제도적인 유신론적 종교의 믿음체계는 자율적인 깨달음과 창조적인 삶에 대단히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오늘 현실적인 세상에서 예수가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건설하려고 했던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종교의 경계 넘어 자유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으로 홀로 고고하게 살기 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살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산 것처럼 살아가는 삶이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두려움과 생존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을 담대하게 내려 놓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을 살아내는 첫번째 길은 자신을 비우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과 자유를 돕는 것이다. 또한 죽어가는 생태계를 다시 살리고, 자연을 보호하고,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방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내는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게 될 때까지 앞으로 5개월, 혹은 5년, 혹은 50년, 혹은 500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걸릴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러한 삶을 위해서 지금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사랑하기를 원하는 가슴을 갖고 있다. 진리와 사랑이 합해지면 참된 행복이 된다(진리 + 사랑 = 행복).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미건조 하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진리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라고 버트런드 럿셀은 말했다.
그러나 진리나 사랑에 있어서 절대성을 강요하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게 된다. 즉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원을 그려 놓고 안쪽 바깥쪽, 이쪽 저쪽으로 편을 가르는 경향이 있다. 오늘 우리의 지구촌은 하나의 원으로써 다양한 모든 사람들을 원 안으로 포용해야 한다. 만일에 우리의 비전이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구원의 원” 밖으로 몰아낸다면 이것은 잘못된 일이며 여기에는 분명히 사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느님은 하나의 원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진리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둘 다 맞는 말이다. 진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의 목표이다. 우리의 삶은 진리를 쫓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삶의 법칙이다. 한편 사랑은 우리의 삶의 여정 중에 우리가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사랑은 교리가 아니며 더욱이 보상조건이 아니며, 다만 사심없는 실천에 기초를 둔다. 교회 나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둘은 하느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이다. 사랑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되는 가장 좋은 본보기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고, 기독교인들은 그의 길을 따르는 추종자들이다. 진리의 추구와 사랑의 실천이 균형을 잘 이룰 때에 “하느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말보다 “하느님을 어떻게 살아내느냐?”는 말이 더욱 설득력과 효력이 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가식적인 말이며 허공에 떠도는 말이다. 교회의 믿음체계가 강요하는 ‘믿는다’는 말은 보상에 대한 필수조건이며,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선전문구에 불과하다. 믿는다는 말은 보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심에 가득찬 순수하고 정직하지 못한 말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말대신에 사심없이 산다는 말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믿는다는 말 때문에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실직상태에서 할 일이 없어 죽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믿는다는 말을 중단할 때가 되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대신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경계 넘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기독교인들은 진정 예수를 따른다면 그가 이 지구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꿈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온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자유하게 살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인의 참 신앙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