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종교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간섭 없는 상식적이고 우주적인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과거에 이분법적 믿음체계의 하느님이 인간의 윤리관에 개입하고 간섭하여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은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온갖 차별들과 분단과 혼돈으로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만일 성서와 십계명의 저자가 유신론적 하느님이라면, 이 하느님은 진화과학이 발견한 인간의 뇌의 진화와 인간의 본성과 이에따르는 21세기 현대인들의 생활의 복잡성을 예견하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이 하느님은 낙태를 죄라고 하지만, 낙태가 살인인가? 보수적인 성서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은 삶의 현실을 무시한체 낙태는 무조건 살인이라고 우겨댄다. 그러나 만일 임신의 어느 시점에서든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도 낙태가 살인인가? 또한 그 임신이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의 폭력의 결과인 경우에도 살인인가? 출산이 산모의 정신 건강을 해치거나 그 가족의 경제적 안전을 위험하게 할 경우에도 살인인가? 임신의 검사 결과에서 태아가 기형아로 판명되었고 출산 후에 태아와 산모의 삶이 절망과 고통 속에 빠질 것이 분명한대도 살인인가? 폐경기의 노인 부부에게 생긴 우연한 경우에도 살인인가? 적절한 피임법을 통해 임신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도 살인인가? 오늘날의 현대 의학과 의학적 기술은 십계명이 만들어진 고대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윤리 규범은 분명히 그 시대의 부족적 생존의 산물이며, 21세기에 적용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실효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유신론적 하느님을 윤리의 원천이라고 억지주장한다면, 그들은 하느님이 현대 의학기술의 혁명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과학기술이 하느님의 법률들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고대의 종교적 규범은 현대의 복잡한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없다. 산아제한과 가족계획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가톨릭 교회)이 있다. 그러나 인구과잉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대규모 굶주림과 아사를 초래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산아제한을 금지시키는 것이 이 시대의 도덕적 선택사항인가? 빈곤한 나라에서 산아제한과 가족계획을 금지하고 단지 인도주의적 구제활동으로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은 일시적인 눈가림에 불과하며, 인구증가를 방지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위 하느님의 명령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했는지 몰라도 21세기에는 인류의 종말을 가져오는 끔찍한 말로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성 윤리에 대해 뜨겁게 논쟁하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과거의 성 규정과 전형에 대해 도전하는 동성애(Homosexuality)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마치 백과사전으로 맹신하면서 현대의학의 발견과 지식을 무시한체 구차한 변명으로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원시적인 호소에 매달린다. 사실상 그들은 성서를 신중하게 읽지도 않고, 성서 66권에서 겨우 몇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인용하기 때문에 성서 전체의 사상과 핵심을 모르는 무지함에 빠져 있다. 또한 성서의 성 문제에 대한 구절들이 일관되지 않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 교회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면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여성의 성직자 안수를 반대하고, 여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했다.
미국의 신학자 월터 윙크는 인간의 성 문제에 대한 성서의 일관성 없는 것에 대해 분석했다[참고: Walter Wink, Homosexuality and Christian Faith, 1999] 그는 성서가 정죄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인들도 정죄하고 있는 것은 근친상간, 강간, 간음, 수간 등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성서가 정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허용하거나 보편적으로 정죄하지 않는 행위들은 월경 중에 성 관계, 독신, 비유대인과의 혼인, 성적 기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특정한 상황에서 나체가 되는 것, 자위행위, 산아제한 등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성서가 정죄하는 행위들에 대해 논쟁이 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성서의 하느님의 음성이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성서는 정액과 월경을 불결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오늘날 교회 안밖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적인 태도에 대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놀랍게 변화되었으며, 이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는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했다.
끝으로 월터 윙크는 성서가 허용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정죄하는 행위들로 성매매, 일부다처제, 수혼(嫂婚, 죽은 사람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혼인하는 풍습), 노예와의 성관계, 축첩, 여자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태도, 매우 일찍(여자의 나이 열 한 살 내지 열 세 살에) 혼인시키는 관습 등을 지적했다. 또한 구약성서는 이혼을 받아들였지만, 예수는 이혼을 금지시켰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언급된 성적 관습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단지 네 가지만 성서에 동의하고 열 여섯 가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서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모순과 혼돈을 드러낼뿐만아니라, 성서 이외에 다른 진실과 권위 즉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인 계시(Public Revelation)가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는 특정한 성적 관습에 대해 애매한 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3천 년 전에서 2천 년 전 사이에 기록된 성서가 어떤 시대적 상황에서 누가 왜 어떻게 어디에서 기록했는지에 대한 성서비평을 통해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성서는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주류 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이 필수과목이지만 교회의 설교와 교육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로마서 1장)에서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동성애로 징벌할 것이라는 괴상한 말을 한다. 이 구절은 아무리 사도바울 또는 예수가 말했다 하더라도 오늘 현대인들이 허용할 수 없는 몰상식한 말이다. 물론 이 구절은 진짜 바울의 말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 바울이 한 말이 삽입된 것이다. 이런 가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조용해야 하며, 단지 밤에 남편에게만 말해야 하고,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 마커스 보그-도미닉 크로산 공저,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010년. 13개의 바울 서신들 속에서 적어도 세 가지의 바울이 있다 – 진짜 바울, 가짜 바울, 보수적인 바울]
오늘날 하느님이 법률을 돌판에 직접 썼다는 믿음과 성서가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실효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들은 그런 법률에 근거하여 하느님이 궁극적인 재판장으로써 규칙을 지킨 사람들은 상을 주고, 어긴 사람은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체계는 인간의 행동에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여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철저하게 박탈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자적이고 직역적인 믿음은 유신론의 죽음과 함께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또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으로 ‘십계명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또는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변명하고 억지주장하는 성서근본주의적 윤리 체계는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다. 고대 성서에 기록된 외부의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은 없다. 더 이상 하늘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규칙들을 제정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영원한 법은 하늘에든 돌판에든 간에 기록된 적이 없다. 과거에 이런 원시적인 생각들을 뒷받침하던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사라졌으며 죽었다.
21세기의 인류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새로운 윤리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 윤리의 원천은 인간의 삶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의 핵심이다. 우리의 윤리에 대한 질문들은 하느님에 관한 질문들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질문들이어야 한다. 즉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온전한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온전한 삶이 되나? 인간의 한계성은 무엇이며, 그 한계를 넘어 초월성에 다가갈 수 있는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하늘 위에서 방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의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깊이를 탐구해야 한다. 이러한 탐구는 우리를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과 희망과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성을 폄하하고 억압하는 것은 결코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덕성은 위협과 억압을 통해 성취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전통적인 윤리 체계에서는 성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윤리라고 강요했지만, 생명의 충만함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성적 에너지의 반발을 초래하여 원초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했다. 즉 인간의 성의 가치가 억압될 때, 그것은 포르노그라피로 되돌아 온다. 성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때, 단지 성으로부터 사랑을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윤리와 도덕은 이처럼 잘못된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윤리의 근거를 우리의 인간성에서 찾게 되면, 충만한 삶은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개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온전하고 충만한 삶과 행복은 상호의존적인 공동체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개체들은 각자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전체에 묶여 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나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윤리적 규범이 이런 인도주의적 탐구를 통해 윤리적 객관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초래하거나 증가시키는 것은 객관적인 잘못이며, 나를 죽이는 자살 행위와 같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공평하게 존중되고 사랑받고 상호의존관계의 통합을 이룰 때 각 개체들은 온전해지며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다원주의 상호복합문화 사회에서 나의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도 소중하다. 또한 나 자신이 온전하게 되기 위한 자유는 다른 개체들을 고양시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개체의 자유는 홀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전체의 자유로부터 가능하다. 이러한 미덕과 가치관은 외부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성의 핵심 즉 인간적인 깊이로부터 등장한다. 따라서 궁극적이며 인간적인 가치는 이러한 참된 자유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지식의 객관적인 가치이다. 즉 완전히 인간적인 사람은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피부색이란 사람들이 태양광선에 노출된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적응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성이 밝혀 주었을 때, 피부색에 근거한 편견은 무식의 소치이다. 따라서 그런 무식함을 사회적 및 경제적 차별의 기초로 사용하는 것은 무자비하며, 또한 계속해서 그런 차별을 하는 것은 객관적 지식을 거스르는 일이다. 왼손잡이가 일부 사람들의 뇌의 구조 방식의 결과임이 밝혀질 때, 왼손잡이를 오른잡이로 바꾸려는 것은 몰상식한 태도가 된다. 그것 역시 무지함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서 이런 무식함으로 동료 인간들을 멸시하고 억압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가 뇌와 그 신경작용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의 성적 입장의 정상적인 태도로 밝혀져, 선택한 생활방식이 아니라 주어진 생활방식임이 밝혀질 때, 그의 성적인 입장을 토대로 편견을 갖는 것은 몰상식하고 잔인한 것이 된다.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라고 미국의학협회는 공식적으로 밝혔다. 동성애는 치유할 필요가 없으며, 동성애자의 가치와 안녕을 해치는 판단과 그에게 기회를 제한시키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무식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감소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은 궁극적인 인간의 가치를 파괴하는 잘못된 행동이다.
따라서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초래하거나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지식과 이성을 추구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다. 자신의 무지함에 근거하여 행동하거나 계속해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도 객관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미덕은 개방된 지식과 이성과 인간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가치들은 새로운 윤리의 기초를 찾기 위해 삶의 깊이를 탐색할 때 분별할 수 있는 가치들이다. 무식함을 부추기는 하느님의 법은 인간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기 때문에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만일 자유, 지식, 이성을 객관적 가치로 인정한다면, 이런 가치들을 확장시키는 것은 궁극적인 명령에 가까운 윤리적 명령이 된다. 그러므로 유신론적 윤리에 근거한 인종 차별과 종교 차별과 성 차별과 성적본능 차별과 빈부 차별과 계급 차별 등의 제한적이고 탄압적인 부족주의의 모든 형태들은 우리의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증오심을 높이려는 모든 시도들과 의식이 확장되는 것을 제한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은 명백한 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최고의 가치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존언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의 존재를 고양시키고 그 삶을 깊이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인간적인 미덕들은 삶 자체로부터 우러난다. 즉 이런 미덕들은 삶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삶의 외부에 있는 권위와 외부적이고 타자인 유신론적 하느님에 속한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 없는 윤리가 가정과 사회와 종교를 밝은 미래로 인도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