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과학시대에 참된 종교와 신앙은 머리가 이해하는 것을 가슴이 스스로 예배하는 삶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참된 종교와 신앙은 고대인들이 만든 유신론적 하느님과 경전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는 암송하는 역사책도 과학 교과서도 백과사전도 아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대로 만일 성서의 저자인 하느님과 한 점의 오류도 없다는 성서는 현대인들의 복잡한 모든 문제들에 상식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 하느님과 성서는 가정과 사회와 종교와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혼돈에 빠트리고 더욱이 전쟁과 테러와 생태계 파괴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을 불러 일으킨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니라, 우주적인 통합, 통합적인 현실,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는 전체, 궁극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성서의 무오설과 절대적인 권위를 맹신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하느님은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조건부적이고 편협하고 진노하는 옹졸한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은 인간과 분리되어 저 멀리 하늘 위에 존재한다는 유신론적 망상의 하느님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비상식적인 변명으로 자신들이 지금까지 안일하게 지켜왔던 부족적인 믿음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아낌없이 포기해야 한다.
현대인들의 광범위한 지식에 비하면 고대 성서 저자들의 경험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인간의 경험은 경험자 자신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며, 무엇이 진실인가를 탐구하려는 사람 그 자신의 이해의 틀 속에서 항상 해석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지식이 확장함에 따라 과거의 패러다임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명되면 그 경험들은 지난날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된다. 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시대의 견해에 대해 객관적인 진실성을 고집하는 것은 편견에 치우치는 것이다. 성서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기를, 고대 성서는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으로 역사와 과학 등은 물론 인류사회의 모든 문제들에 완전무결한 답을 제공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런 비상식적인 주장은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와 광활한 우주와 은하계와 태양계는 물론 현대인들에게 상식에 속하는 다양한 지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개인적이고 부족적이고 사적인 의견일 뿐이다.
성서 저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했는데 고공에서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 우주선에서 보내온 관찰에 의하면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아름다운 공 모양의 별이다. 성서가 상상하고 있는 삼층 세계관이 오늘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부적절한지 알 수 있다. 또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우주에 상중하 층이 없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구분이 없다. 하늘이나 땅에 대하여 성서 저자들이 기록한 모든 것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상상한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엄청나게 거대한 우주 속에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닌 외로운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들과 기독교 신조들에는 과학시대 이전의 명백히 잘못된 세계관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고대 성서의 세계관을 계속해서 보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반지성적으로 되거나 새로운 지식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두려워한다. 즉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가슴으로 예배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교리적 믿음의 안전장치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 놓은 것과 같다. 결국은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폭력적인 분노로 드러나며 가정과 사회를 분리시킨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두 개의 다른 창조 이야기가 있는 사실을 모른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기 1:1 – 2:3)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기 2:4-25) 보다 약 500년 후에 쓰여졌다. 두 이야기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당연히 서로 다른 동기로 기록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없는 삼층 세계관을 묘사하고 있다. 지구는 마치 현대 원형지붕 경기장과 같으며 태양과 별들과 달은 천정에 붙어 있으며, 천정에 문들이 달려 있어 이것들이 열리면 비와 눈이 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은 원형지붕 밖에 존재하며 천정의 문을 열고 닫으면서 인간들에게 축복과 징벌을 내린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매우 심각한 가부장적 형태로 쓰여졌다. 남자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남자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창조 이야기들은 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21세기의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에 창조 이야기들에 이어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있다. 성서의 문자적 표현에 따르면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려 홍수가 나서 온 땅을 뒤덮었다고 한다. 물은 크게 불어나서 높은 산들을 잠그고도 약 7-8m나 더 불어났다(창세기 7:19-20).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의 산들은 에베레스트의 8,884m 높이까지 솟아 있는데, 홍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면 지구 상의 땅에는 약8Km 깊이의 물이 덮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질학적으로나 인류사에서 그런 홍수는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고대인들의 신화 속에나 있는 이야기이다.
신약성서에 예수의 육체적 승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우주시대인 현대에 이 땅에서 들려 올려 높은 하늘 위 천국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천국이 하늘 위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아니면 막연히 저 하늘 위에 어딘지 분명하지 않다. 승천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는 광대한 우주의 크기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천체과학자 카알 세이건(Carl Sagan) 덕분에 예수 승천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예수가 그대로 승천했다면 비록 광속의 빠르기(1초에 30만km)로 올라간다해도 아직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은하계에는 약2천 억개의 별이 있다. 또한 우리의 은하계는 우주의 수천 억개의 은하계들 중에 하나일뿐이다. 따라서 우주의 공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우주가 한 두개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우주는 어디가 끝이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인간의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단지 고대 신화들의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오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하느님, 예수, 그리고 구원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성서의 문자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이 과학이전의 삼층 세계관을 떠나 보내지 못하거나, 21세기의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새롭게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고대 올림푸스 산의 종교들 즉 그리스 신화들처럼 고대 신화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설적으로 오늘 보수적인 교회들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듯하지만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죽음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성서문자주의는 기독교 교회의 죽음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21세기에 기독교인이 되려면 최소한 현대과학이 발견한 정보들을 이해해야 한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쯤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현대 호모사피엔스 인간이 20-30만 년 전 최초로 등장하기 훨씬 전에 지구의 역사의 99%가 진행되었다. 지구가 창조된 목표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면, 인간이 출현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구는 인간을 포함해서 포유동물 시대 이전에 이미 수십 억 년 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의 유일하고 주된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표층적인 발상이다. 현대인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커녕 광활한 우주 전체로 볼 때에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행성에 불과함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지구의 운명은 언젠가 폭발해서 사라질 태양계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창조에 대한 고대 신화는 낡은 세계관을 가정한 성서의 이야기들과 더불어 졸지에 지질학적인 그리고 천문학적인 의미를 잃어 버리게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와 더불어 산책하던 그 하느님도 이제는 비인격적인 하느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지진과 쓰나미와 태풍과 홍수와 가뭄 등의 천연재해도 하느님의 간섭과 관계없이 설명되고 이해된다. 하늘 위에 존재하면서 이 세계의 인간사에 간섭하여 병을 치료하고 나라를 구원하며 혹은 사람을 재난에서 구해내는 그런 하느님은 21세기의 지식인들에게 더 이상 신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기독교 교회가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인식할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났으며 떠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교회동창회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는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에서 적용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근본주의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제한적인 하느님을 되살릴 수 없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은 초등학교 수준에서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천문학과 진화과학과 첨단과학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은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고대 성서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이제는 과거의 골동품이 되었다. 성서는 고대인들이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보다 궁극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의미를 생각해보던 방식을 기록한 책이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백과사전이나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고대 성서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경험과 지식과 상상력에서 자신의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문자적으로 암송하고 되풀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심지어 몰상식한 일이다. 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21세기의 현대인들도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로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적 하느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인간성의 깊은 차원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이란 인간이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가는 수단과 방식일뿐이지 믿어야하는 상대적 객체는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분리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과 관계에서 느끼고 깨닫는 통합적인 실제(實際)이다. [참고: 실제(實際)'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는 의미로, 어떤 '사실'에 초점을 둔 말로 쓰거나, 본인이 보거나 듣거나 하는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직접 하거나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의 의미는 개인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관계론이다. 성서를 읽는 것은 역사적인 정확성과 과학적인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탐구했던 공동체적 삶의 의미와 이와 관련된 하느님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성서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일뿐이며, 성서 자체가 문자적으로 진리 또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것은 그릇에 담겨있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에게 고대 성서는 재해석이 필수적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의 생명은 6천 년 전에 완성된 인간 즉 과학에서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인간)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고대 성서는 현대 인류학과 지질학과 천문학과 진화과학이 밝히는대로 인간과 비인간, 아류인간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던 약 150만 년의 세월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부터 인간성이 나타나서 인간에게 신성하고 영원한 영혼을 부어넣어 주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했다. 150만 년 전 최초로 두 발로 걸어다닌 호모 에렉투스(직립인간)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면, 인간의 정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적용해야 하나? 30만 년 전 이성적인 인간 원시 호모 싸피엔스가 등장했고, 진화는 계속되어 4만 년 전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 호모 싸피엔스가 등장했다. 생물학자들이 호모 에렉투스가 호모 싸피엔스로 진화된 시점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대략 150만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고만 말한다면 과연 신학자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근거로 창조는 계획한대로 선하게 이루어졌고 또 인간이 죄악에 떨어졌는지를 말할 수 있는가? 그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단순히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가? 성서는 인간의 본성이 파충류적 본능에서 포유류적 본능으로 어떻게 진화되었으며, 아직도 동물적인 본성이 남아있는지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인간의 유혹과 타락은 장구한 인간진화 과정에서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수없이 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해왔는데 인간 생물종이 멸종하지 않고 오늘까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중심이라는 본성이 유혹과 죄악에 타락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충동에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성서는 과학 교과서와 역사책이 아니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문자적으로 주장하는대로 인간의 타락이 원초적으로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왔다는 타락설과 이로인해 인간이 죄악에 빠졌다는 원죄론은 무의미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부적절하고 비상식적인 설명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된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라는 구속론도 무의미하다. 적어도 인간 생물종의 150만 년의 장구한 진화과정을 거쳐 발전되어온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을 문자적인 성서 이야기에 감금하는 것은 언어도단의 비상식적인 일이다.
만일 신학과 신앙의 기본적인 이해에 대해 다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는 21세기의 현실과 아무 상관없는 상징과 언어 속에 고립되어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교회가 계속해서 과거 속에서 산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은 없다. 교회가 과거의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내세의 축복과 구원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과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는 그저 맹목적이며 무의미한 확실성만 팔고 있다. 이 교회들은 사람들의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믿게하며 무릎꿇고 순종하도록 위협한다. 교회들은 스스로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우겨댈지 모르지만 대체로 진정한 메세지가 전무한 상태이다. 그들은 달콤한 말장난이나 늘어놓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구차하게 방어벽을 쌓는 일에 열중한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의미를 상실한 형상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유신론과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은 시체 위에 얼굴 성형 수술을 하면서 설득력과 효력이 없는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지만 잘 안되고 있다.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 새로운 인간, 새로운 하느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사람들이 행복하게 의미있게 자유하게 살 수 있는 길이며,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다.
기독교인들은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가슴이 억지로 예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 이전 시대에 기록된 고대 성서를 과학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