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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어떤 만남 ㅣ 이민하 ㅣ 2024-07-07

by 이민하 posted Jul 07, 2024 Views 4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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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7-07

어떤 만남

(삼하 5:1-5, 9-10, 고후 12:2-10, 6:1-13)

2024.07.07. 성령강림 후 일곱째주일

 

1. 관계

안녕하세요,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우리의 생각이 닿지 않는 곳까지 있기를 빕니다.

어제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절기, ‘소서였습니다. 뜨거운 볕이 내리쬐고, 많은 비가 내리며, 때때로 폭풍까지 몰아치는 계절이 개봉박두라니 실은 조금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교육부의 들살이와 각 신도회의 모임 등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이내 두려움이 기대로 바뀝니다. 우리가 덥고 변덕스러운 이 계절을 함께 잘 지어가기를 빌어봅니다.

몇 주 전, 교육부 선생님들과 함께 성인지감수성 교육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2회차에 걸쳐 좋은 교육을 진행해 주셨지요. 그중 경계 교육이 참 흥미로웠는데요. 그 교육에서 저희는 몸의 경계, 마음의 경계 등 각자의 경계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타인의 경계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경계를 존중하는 방법은 나의 경계를 말하고, 타인의 의사를 묻는 것임을 배웠지요. 조금 낯설 수 있겠지만, 서로의 경계를 인지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안전한 관계 맺음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안전하기만 하지는 않지요. 어떤 때에는 만남이라는 것이 위험하게까지 느껴집니다. 타인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우리 또한 타인에게 불안일 테지요. 누군가와 마주하는 일에는, 상대에게 나의 경계를 어느 정도 내어주어야 하는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자본이 모든 가치를 먹어 치우고, 세계를 제패하는 종교로 우뚝 선 이때, 존재 간의 만남은 더욱이 당연하지 않은 사건이 됩니다. 이득과 손실을 철저하게 따지는 사람이 득도 없이 타인에게 자신의 경계를 내어주는 건 아주 무쓸모한 일일 테니까요. 실리를 따지고 들수록 관계중심적 삶의 가치가 평가절하됩니다. 존재와 존재 간의 연결성이 계속해서 약해지지요. 마을이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게 당연했던 때가 머나먼 예전 같습니다. 이렇듯 단절이 기본값인 때에, 만남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이웃을 어떻게 만나고 있나요?

 

2. 하나님과의 만남 (삼하 5:1-5, 9-10)

성서의 말씀을 나누기 앞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영상 매체를 즐겨봅니다. 이야기에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인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축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주인공이 등장할 때면 영상에서는 온갖 효과를 내며 그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1성서의 본문인 사무엘하에는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다윗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지요. 사무엘상 중반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에 걸쳐 여러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데요. 이 방대한 분량은 사실상 그가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부각하고 강조하기 위한 서사 쌓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윗의 주인공다운 면모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그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주인공이 등장할 때 온갖 효과를 내는 어떤 드라마처럼, 다윗은 왕위에 오르는 순간은 순전하고 흠결 없고 아름답습니다. 어떠한 인물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윗을 향한 저자의 애정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굳이 공들여 좋게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시각을 기준으로 성서를 포기해 버릴 필요도 없지요. 그저 이야기에 집중하여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묵묵히 읽어내면 됩니다.

다윗은 꽤나 독특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던 다윗이지만, 그는 전쟁터나 왕궁에 있는 보통의권력자들처럼 굴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 때문에 오랫동안 광야를 떠돌며 고생했음에도, 사울의 죽음을 전해 듣고 크게 슬퍼합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충분히 이었을 사울을 여전히 사랑했지요. 사울을 죽이고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해 이득을 취하려 했던 사람도, 다윗에게 잘 보이고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살해한 사람들도, 오히려 모두 처형당합니다. 그는 칼과 피 흘림으로 권력을 찬탈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순종은 그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갖는 태도입니다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삶의 태도가 됩니다.

물론 다윗은 굉장히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자 하나님께 자신이 유다의 성읍으로 올라가도 되는지를 묻습니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지요. 사실 저는 이 깔끔함에 감탄하기보다 약간의 얄미움을 느낍니다만, 성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을 겁니다. 힘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판단할 만한데도, 그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와 자신의 방향을 묻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한낱 양치기 소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름 부음 받고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배웁니다.

아까 다윗을 주인공이라 칭하긴 했지만, 다윗이라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안정적인 권력을 얻어서일까요? 그는 순전하고 충실한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지요. 성서는 다윗이 휘청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가치를 매 순간 살아야 함을 일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매 때에 충실해야 합니다.

 

3. 이웃과의 만남 (6:1-13)

예수의 때로 넘어오면, 관계의 초점은 하나님에서 이웃으로 넓어집니다. 오늘의 마가복음서 본문은 예수가 고향에서 푸대접받는 이야기와 그가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고향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랍니다. 이 사람이 대체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기적들을 일으켰는지 궁금해하지요. 그러나 이런 놀라움은 금세 예수를 시답잖아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들은 예수의 고향 사람이었기에 예수에 대해 안다고 지레짐작하고 그를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닙니다. 예수를 나루터 영식이네 둘째 아들이라고 가정하고 상상하면,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제법 이해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예수를 미리 알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사건을 듣고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음의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예수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를 고쳐준 것 말고는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행하지 않은 게 아니라 행할 수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곳에 기적이 있기는 어렵겠지요.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복음의 핵심은 표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내리기 어렵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듣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모습에 놀라지만, 다른 마을을 다니며 가르치는 등 계속해서 사역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며, 그들에게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지요. 믿지 않는 자들과의 만남 이후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가 곧바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길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하는 듯합니다. 제자도를 중시하는 마가가 제자됨의 길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지를 독자들에게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매우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분부합니다. 말이 가벼운 차림이지, 보잘것없기 짝이 없는 모양새입니다. 제자들은 빵이나 자루, 동전도 없이, 심지어는 여벌옷도 없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취약한 차림새와 준비입니다. 이들은 그러한 차림새로 마을을 방문하여, 예수의 사역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제가 만약 예수의 제자였다면,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나를 누가 맞이해줄까하고 염려했을 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제자들의 나그네와 같은 모습이 이 사역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낯선 이가 되어, 어느 마을의 낯선 이들을 만납니다. 이웃과의 만남입니다. 기쁜 소식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대상은 기쁜 소식을 가리기도 하지요. 나그네를 환대하고 기쁜 소식을 반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았던 고향 사람들처럼 기쁜 소식을 맞이하지 않는 마을이 있다면, 그곳에는 제자들이 떨고 간 먼지만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단절의 흔적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또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받은 능력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힘이었습니다. 취약한 상태로, 취약한 이들을 만날 용기였습니다. 제자들의 만남 요청에 상대방의 믿음이 따를 때,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내립니다. 믿음이 있을 때, 낯섦에서 오는 두려움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비단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에 서술된 제자들의 모습은 불완전하고, 불안하며, 연약합니다. 그들은 제자도를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약하고, 예수와 늘 함께하는데도 예수를 모릅니다. 예수는 이렇게 어리석고 유약한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어떤 만남을, 사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거리로 제자들을 보냅니다. 예수가 어린 제자들을 파송한 일은 오히려 우리에게 위안을 안겨 줍니다.

낯설기 짝이 없는 어떤 만남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일은 대단한 부담입니다. 그 대단하고 고된 길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흠결 없고 완전한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예수는 그런 사람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낯선 존재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서로에게 자신을 여는 용기를 내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서로를 향한 믿음과 믿음이 맞닿은 증거입니다. 연약한 이들이 모여 하나님 나라를 이룹니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쳐준 이웃과의 만남입니다.

 

4. 나와의 만남 (고후 12:2-10)

하나님과 만난 다윗, 이웃과 만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지나, 이제 우리는 바울에게 닿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신을 폄훼하는 거짓 사도들로 인해 혼란함을 알고 편지를 씁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사도로서 얼마나 자격 미달인지를 떠들었고, 능력을 내세우며 자기를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항하여 자신이 엄청난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그러한 경험을 언급한 이유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 역시 자랑거리가 있음에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를 명확히 한 바울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취약한 자기 자신을 마주합니다. 나와의 만남입니다.

약함이 약한 것 자체로 선하기에 바울이 자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약함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따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연약한 자기 자신을 바로 마주할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한 마주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약하다 일컬어지는 곳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합니다. 겸손함이 있는 곳에, 타인을 믿는 취약한 순간이 있는 곳에, 스스로의 연약함을 바로 보는 곳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합니다. 이렇듯, 어떤 만남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어갈 수 있습니다. 왕에게 붓던 기름을 병자가 바르게 되고, 한때 왕궁에 들어올 수도 없었던 눈먼 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어떤 만남들을 꾸준히 이뤄가길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알지 못하는 존재, 낯설고 불편한 존재로부터 도망하지 마십시오. 두렵고 어설프더라도,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이어가십시오. 우리의 믿음과 용기로, 어떤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고, 이웃과의 만남이 되며, 나와의 만남이 됩니다. 만남에 은혜를 부어주시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주님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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