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과학적인 지식이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됨으로써 현대인들은 교회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조로 표현된 전통적인 교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늘 위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와 예수라는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론,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속죄론과 삼위일체론 등의 삼층 세계관적 교리들은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무의미하게 들린다.
불행하게도 오늘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박탈하고,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제도와 교리와 전통 속에 감금한다. 2천 년 전 예수 당시에 성전종교가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종교적 제도와 교리와 전통은 지금까지도 교회기독교의 믿음체계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의 사회에서 이러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교회들은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한체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적 예수는 사람들을 차별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는 성전종교의 신학과 제도와 교리와 전통을 거부하고 이런 종교와 신앙과 믿음 없는 사회를 건설하자고 도전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종교체계의 속임수처럼 이 세상을 버리고 죽은 후 다른 세상으로 이주하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정의롭게 자유하게 살 수 있는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후대에 예수의 정신을 인식한 사람들은 이것을 좋은 소식 즉 복음이라고 성서에 기록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사도행전 8:26-40; 마태복음 28:16-20) 신약성서를 전체적으로 신중하게 읽으면 예수가 이렇게 요청한 것은 다른 종교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라는 명령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르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내고,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물론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기독교 세상 또는 유대교 세상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죽은 후 하늘 위로 올라가는 천국도 아니었다. 예수는 지극히 현세주의자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이 있기는 했어도, 이것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제도적인 종교체계과 정치적인 기득권자들이다. 종교와 정치에서 이미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쉽게 통제하는 수단으로 두려움과 이기심을 강압적으로 심어 준다. 그리고 종교의 제도와 교리와 전통에 순종하도록 강요한다. 오늘 우리 주변에 이러한 모습들을 정치나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하여 이 좁은 세상에 나와 다른 것들을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나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정당화한다. 다시 말해, 나/우리의 하느님과 믿음과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함으로 생존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
특히 교회기독교는 사람들을 현혹하기를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시며, 하느님을 잘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하느님을 잘 믿으면 백배 천배 만배 큰 상을 받고,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간다는 잘못된 보상심리를 이용하여 생존의 두려움을 주입시켜 왔다. 그러나 예수는 제도적이고 수동적인 종교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도적 종교란 사람들에게 이런 것 저런 것들을 반드시 믿어야 하고, 우리와 다른 모든 것들은 이단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하고, 누구는 깨끗하고 누구는 더럽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고, 누구는 상을 더 많이 받고 누구는 벌 받는 식의 이원론적인 교리들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종교를 말한다.
참 인간 예수는 차별적이고 이원론적인 제도적 종교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무조건 용서한다는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스스로 보여주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전을 통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용감하게 자율적으로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도움으로 제도적인 종교라는 중개인의 간섭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새롭게 능력있게 체험할 수 있었다.
생존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마음을 열고 생존을 위하여 높게 쌓아 올렸던 온갖 장벽들과 이기적인 욕심을 과감하게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처럼 경계 넘어 모든 만물을 전폭적으로 포용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삶의 용기와 희망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누가복음서 10:25-37)에서 “무엇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사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오늘 교회는 더 이상 내세에 대한 망상에 빠져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믿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이제부터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관념적이고 제도적인 종교의 믿음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을 뛰어 넘어서게 되면, 참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들이 열린다:
첫째, 자유하고 행복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다.
둘째: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교회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모든 비밀장치들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할 만큼 세상은 넓고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며, 부족적인
좁은 구역의식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성스러움에 대해서 더욱 새롭게 온전히 알게
된다.
신약성서의 핵심사상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따로따로 분리하고, 비기독교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산다면, 교회의 내부와 외부, 성과 속, 구원과 심판, 천국과 지옥 등의 이분법적 경계선을 긋지 않는다. 부족적인 분리는 사고의 시야가 좁은 제한적이고 타율적인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함은 우주적인 의미이며, 폐쇄되었던 마음이 활짝 열리고, 경계 넘어 우주의 모든 개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종교와 제도 넘어 즉 경계 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살라고 도전했다. 물론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제국적인 야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8:16-20). 제자들은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첫째로, 자신들의 닫혔던 마음을 개방하고, 둘째로, 다른 나라들과 부족들과 종교들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과 경계를 뛰어 넘어섬으로써,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조건 없는 포월하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예수의 복음은 기독교인만 구원받는다는 부족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좋은 소식이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경계와 장벽도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예수처럼 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계선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심지어 ‘하느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려고 교회에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존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랑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과 자연과 지구와 다른 부족들과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포용한다. 모든 사람들과 만물과 사건들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느낄 수 있고, 행복과 자유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몸이 몹시 피곤한 날, 대형 수퍼마켓의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있는 사람들로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오랫동안 지루하게 기다리면서도 내 앞에 한없이 길게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짜증스럽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미소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은 경계선 없는 사랑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방인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하느님 즉 하느님의 의미는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고 인식하면, 나라와 나라, 부족과 부족,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른 언어와 문화로 분리된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 즉 보호막들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언어로 말할 것이다. (사도행전 2:1-4).
신약성서에 필립보가 에디오피아인 내시에게 세례를 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과는 어떠한 대화나 대면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유대교 율법인 신명기(23:1)에 따르면, “[생식기]가 잘린 [남자]는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자신의 유대종교 율법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부족적인 이야기들에서 시작된 구약성서는 인간의 분리를 조장하는 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불행하게도 “금지되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은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누구에게는 “금지된 사랑”으로 제한되어서 성차별, 인종차별, 성적본능차별, 종교차별 등이 생겨났다. 오늘도 이러한 차별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사회에서는 물론 심지어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제도적 종교를 넘어선 신앙인으로써 인류 역사 속에서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세워놓은 온갖 경계선들과 장벽들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 속에서 제도적이며 교리적인 종교를 넘어서는 신앙만이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생명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했다고 말했는 데, 그의 뜻은 제도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종교를 넘어선다면 그 나라는 이미 여기에 도래했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는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부족적인 신앙을 내려놓고, 이분법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를 넘어선 신앙을 살아내야 한다. 이 우주적인 신앙이 분단과 혼란에 빠진 세상을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으로, 불신과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경계 넘어 다른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지 못하면 자신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우주의 법칙을 인식해야 한다. 이 불편한 진리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