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들은 이분법적으로 쌓아 올린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캐나다 전국에 기독교 교회를 포함해서 9000개(전체 27,000개)의 종교단체들이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쇄될 것이다. (https://www.cbc.ca/news/canada/losing-churches-canada-1.5046812)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과 북미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소위 대형교회들도 파산직전에 있으며 대부분의 중소 교회들도 풍전등화의 생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류사에서 모든 유신론적 종교들 즉 유대교와 기독교와 회교도의 핵심은 부족적 사고방식에 따른 생존의 방식이었다. 유신론적 종교들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부족 종교로써 부족적 정체성을 지닌다. 부족 종교들은 자신들의 신이 유일하게 진실하며, 그 신은 자신의 부족만을 보호하고 구원한다고 믿는다. 부족 종교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폄하하고,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통제한다. 따라서 부족 종교들의 신은 부족신에 불과하며, 온 인류을 위한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참 사람 예수 즉 역사적 예수는 부족 종교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무시하는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부족주의(현대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인간의 부족적 생존기능의 다른 표현이다. 원초적으로 고대 인간들은 씨족에서 부족으로 발전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자의식이 생겨날 때, 부족주의는 생존의 지름길이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부족주의를 선택했고, 이것을 근거로해서 인간의 의미는 물론 신과 종교와 생명과 세계의 의미를 정의했다. 따라서 유신론적(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부족의 하느님이 되었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모든 부족들은 생존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보호해줄 하느님과 종교를 만들었다. 즉 유대민족의 야훼 하느님을 포함해서 주변 근동지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들에서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종교, 수메르 종교,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각자의 신들이 만들어졌다. 북아프리카의 고대 이집트와 유럽의 고대 그리스에서도 종교들와 신들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종교들과 신들은 유신론적인 부족의 신들이었다.
오늘날 부족적인 생존의 방식은 가정과 단체와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운동경기에서 학교와 도시와 국가 대항의 경기에서 참가자들의 부족적 생존방식은 관중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족주의는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 차원과 낮은 차원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남한의 보수 우파세력들이 북한을 원수로 규정하고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것과 미국의 트럼프와 우파세력이 이민정책을 반대하고 국제무역협정들과 기후변화협정을 파기하는 것은 극명한 부족적 생존방식이다. 이러한 부족감정은 항상 상대편을 원수 악마 사탄 마귀로 비인간화함으로써 양심과 상식과 이성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부족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한다. 결국 자신의 신의 이름으로 원수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한다. 좋은 예로, 십자군 원정, 세계대전 I & II, 발칸반도 전쟁, 이락침공, 아프칸 전쟁 등은 신의 전쟁이나 다를바가 없다. 인류사에서 거의 모든 분쟁들은 부족적 민족과 국가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21세기의 현대인들도 근본적으로 부족적 인간들이다.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세계 종교들은 인간의 부족적 생존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생존방식을 정당화 내지는 거짓과 은폐로 미화시키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 모든 세계종교들은 유신론적-초자연적 하느님의 이분법적 보호와 축복과 구원의 노예가 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부족적 사고방식과 생존방식에 깊이 빠질수록 비인간화되며, 삶은 증오와 분노로 가득하게 되고,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 욕심으로 항상 불안하고,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죽어간다.
부족적 생존방식은 적어도 수십만 년 동안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생존투쟁을 위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이 극복되지 않으면 보다 심오한 인간성은 존재할 가능성이 없을뿐만 아니라 인류의 밝은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들을 증오하는 한,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 참된 인간성은 항상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이라는 본성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 욕심에 대해 솔직하고, 이 문제를 용감하게 정면으로 다루기 전에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이 됨은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을 폄하하는 부족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우리의 참된 인간됨의 장애물이 될뿐이다.
다행히도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 역사적 예수는 부족적인 하느님을 거부하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비이분법적이고 우주적이고 포월적인 하느님을 선포했다. 신약성서는 전체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음으로써 참 사람 예수를 성상에 앉히고 초자연적 하느님으로 변질시켰다. 다시 말해,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참된 인간성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역사적 예수가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 부족의 하느님은 유대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의미의 우주적인 하느님을 깨달은 예수가 종교와 사회의 부족적 생존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불가피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어떻게 허물어 버렸는지 직접 보고 들음으로써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새롭게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리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물론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통해서 암흑과 절망 속에서 밝은 빛을 보았고, 새로운 삶의 용기와 희망과 기쁨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전을 가졌다.
예수가 허물어 버린 부족적 생존의 경계는 유대인 사회의 주류 가치관과 세계관이었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우리’(we)라는 울타리 안의 작은 세계와 ‘그들’(others)이라는 울타리 밖의 세속적인 세상의 이방인들로 분리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깨끗한 사람들’이었고,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지 못한 더러운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이상하게도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반대했던 이분법적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 또는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반면에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 또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로 분리하는 경계를 높이 쌓았다.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은 바울은 신약성서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를 따른다면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부족적 경계는 없다고 선언했다. (3:28)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은 유대 사람뿐만 아니라 그리스 사람에게도 이른다고 했다.(1:16)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의미는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며, 차별과 분리는 부족신의 짓거리다. 바울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이나 차별이 없다는 놀라운 선언으로 부족적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세계를 포용했다.(2:11) 또한 골로새서에서도,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즉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그리고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선포했다.(3:9-11)
부족적 생존의 본능은 인간 생물종이 등장한 이래 백만 년 이상 지속된 것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성 즉 참 사람의 인간성을 발견했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느님으로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평범한 인간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살아내면서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성을 드러냈을뿐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존의 욕구를 위해 구축한 부족적 경계를 허물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체험을 신약성서로 기록했다.
예를 들자면,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방인 로마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유대인의 부족적 생존의 정체성을 저버린 사람이었다.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과 접축한 마가는 불결했다. 그러나 예수는 경계 넘어 마가를 자신의 제자로 불렀다.(마가복음서 2:13-15) 마가는 예수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달은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복음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수는 소위 불결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을 방문하여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족적 생존의 경계 넘어 성숙하고 참된 인간성을 인식하라고 요청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다른 부족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폄하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었다. 예수가 죽는 순간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이방인 로마군인이 예수로부터 참 사람의 모습을 보고 부족적 증오심을 내려 놓았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 가장 유대적이고 따라서 부족적 생존의 경계에 대해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서에 부족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예수가 어떻게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는지에 대해 밝혔다. 마태는 인간성의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원시적이고 부족적인 생존의식에 얽메이면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고 선포했다. 좋은 예로, 이방의 박사들은 예수가 출생한 곳으로 이상한 별을 따라 공포와 위험이 따르는 여정을 시작했다. 별은 모든 인간이 볼 수 있는 우주적인 상징이다. 별은 동방박사들이 부족의 경계를 뛰어넘도록 인도했다. 물론 동방박사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할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이 복음서의 마지막에 예수가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했다.(28:19-20)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도전했다. 즉 너희의 두려움의 경계를 넘어 서라고 말했다. 또한 너희와 다른 사람들 곧 너희가 불결하다고 규정한 사람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경계 없는 포월적인 사랑을 선포하라고 요청했다. 소위 예수의 최후의 선교명령은 다른 종교인들을 나의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부족적 생존의 본능으로 쌓아 올린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참 사람의 인간성을 체험한 것처럼 이방인들도 새로운 인간성의 체험에 동참하도록 초청하라는 요청이다.
인간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넓어지고 심층적으로 성숙해지는 유일한 길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를 보호하려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밖에 없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고 살아낸 것처럼 현대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따른다면 부족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부족적 사고방식의 안전망을 벗어버리고 모든 인류를 포용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를 나사렛이라는 유대 사회의 변두리 마을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종교적인 열광자들과 부족적인 사고방식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사랑을 선포했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이방인들에게 부족적 경계 넘어 우주적인 인간성을 살아내도록 도와주라고 요청했다.(사도행전 1:8) 예수는 사람들의 참된 인간성을 위축시키는 것은 부족적 생존의식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다른 부족의 사람들은 불결하고 나의 안전을 위해 증오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편견과 두려움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부족적 생존의 장벽을 용감하게 넘어서라고 도전했다.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말하는 것이 있다. 성령 받았다, 또는 성령을 받아라 또는 성령을 체험했다는 등의 소위 성령체험에 대한 말이다. 이 말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성령체험은 모든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넘어선 체험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2:1-13) 예수가 죽은 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 생존을 위한 장벽들을 허물었고. 다시 말해,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안전하게 해 준다고 세뇌시킨 교리와 전통과 형식의 감옥을 박차고 나와 소위 안일하게 생각했던 안전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예수의 복음은 죽은 후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 놓으면 참 사람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고,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은 부족적 메시지 즉 예수 믿지 않고 교회 나오지 않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고, 교회를 떠난 소위 잃은 자를 찾고, 사람들의 불안전을 해소시키려는 부족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성을 보여주었으며,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욕심과 증오가 사라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인식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형태를 취한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닷가와 장터와 들판과 이방인들의 동네에서 경계 넘어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는 평범한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부족적 종교의 감옥에서 해방되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인간성이 두려움과 욕심으로 위축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구축한 경계 뒤에 몸을 숨길 때, 필연적으로 생존지향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심한 갈등과 절망을 겪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참 사람 예수의 인간성을 통해서 자신들의 인간성 속에 깊이 잠복하고 있는 부족적 생존본능 즉 인간성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부족적 한계성들을 극복할 수 있다.
2천 년 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을 체험하고 그것을 성서로 기록하고 교회를 세웠다. 불행하게도 오늘 인간적인 예수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성상에 앉은 가짜 예수, 하느님 예수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욕심을 채워주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종교와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릴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