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공동체
(삼하 1:1, 17-27, 고후 8:7-15, 막 5:21-43)
240630. 성령강림절 여섯째 주일
[인사와 회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고별설교의 자리에 서니,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이별을 앞둔 아쉬움이 교차합니다. 교우들을 만나면 무슨 말씀을 드릴지 생각했는데요. 심각한 얘기보다는 따뜻한 인사를 전하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 안에 있는 두 가지 마음입니다. 하나는 부족한 저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관한 고마움입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동고동락해 주셨고, 지난 한 해 안식년을 허락해 주셔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학교에서 다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재정적인 도움을 주신 점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교우들에게 받은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함의 이면에는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지난 7년은 향린교회의 큰 전환기였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짓고 지역을 옮긴 것도 그러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위기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가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 열정과 헌신만큼 긴장과 대립도 있었는데, 그 모든 과정에 담임목사로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재임을 둘러싼 논란이 교우들의 상처로 남았기에 자책감도 듭니다. 저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다시 신앙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모두 마음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제 안에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순탄치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을 지키는 일마저도 쉽지 않았지만, 골짜기가 깊은 만큼 언덕을 교우들과 함께 오르며 나눈 기쁨과 보람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지키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회자정리라고 하지만, 여러 이유로 우리 교회를 떠난 교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연로하셔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신 분들이나 병환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우들을 자주 찾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입니다. 목회하는 동안, 장례도 많았는데요. 80여 차례의 이별 속에서, 특히 홍대극 집사님, 김낙중 선생님, 김성빈 권사님, 임보라 목사님, 황성규 목사님의 자취가 제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이 우리 교회에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저의 마음에 남는 상념은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끄러움에 가깝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고, 신앙공동체의 길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사랑을 하는 일에도, 믿음을 키우는 일에도, 소망을 지키는 일에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하늘뜻펴기는 어떤 비전에 대한 제시보다도 제가 그간 무엇을 배웠는지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예배 성서 본문을 3년 주기로 구성된 ‘성서일과’(RCL)를 따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3년 전과 6년 전에도 읽었습니다. 같은 성서 본문도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줍니다.
6년 전은 제가 교회에 부임한 지 1년이 된 해였지요. 당시 깊은 내홍을 앓고 있던 우리 교회는, 시무장로 권고사직을 안건으로 삼은 공동의회를 한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회의는 정의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고 사랑을 실현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렸고, 지나가는 어둠을 탄식하면서 하늘뜻펴기를 했습니다.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3년 전 오늘 성서 본문을 읽던 상황은 명동 옛 예배당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던 시기였습니다. 긴 광야 생활과 예배당 신축을 앞두고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한마음이 되어 많은 어려움을 헤쳐왔습니다.
이제는 그 시기의 과제를 거의 마쳤으니, 같은 본문이지만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기의 짐을 벗고 오늘의 자리를 새롭게 분별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지어주시기를 바라며, 성서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분별, 어디를 향하는가 / 사무엘기하 1장 1, 17~27절]
제1성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환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본문 내용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기리며 다윗이 부른 조가(弔歌)입니다. 이 사람들의 관계를 떠올려 보면, 이 노래를 지은 다윗의 심경이 복잡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신뢰와 기대를 안고 출발했지만, 점차 상대방의 목숨을 노리는 관계로 변했던 사울, 아버지의 적대감 속에서도 변치 않은 우정을 나눈 요나단, 이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의 노래에는 연민과 비탄이, 그리움과 사랑이 교차합니다.
이 노래는 단지 개인적 감회만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도 담고 있습니다. 왕권 전환기에 다윗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이 노래를 사용합니다. 18절에 나오듯이, 다윗은 이 노래를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며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다윗의 선한 마음에 주목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정치적 의도에 주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 역시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한때는 중요한 ‘종국적 사실’(final fact)이지만, 또한 ‘지나가는 그림자’(passing shadow)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노래는 그들의 역사책(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전해졌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읽으며 과거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갈 길을 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와 미래를 안고 살아갑니다. 저마다 과거의 뿌리가 있고, 자신을 밀고 갈 미래의 방향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중요한 것은 미래의 방향입니다.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사람 가운데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분이 있습니다. 원래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철학 교수였는데, 나치의 표적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해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망명길에 오른 이유는 그의 책을 나치가 금서로 삼아 불태웠기 때문인데, 그 책이 표방한 시대사상은 바로 성서의 정신입니다. 틸리히는 성서의 정신이 기원(origin)에 대한 집착에 있지 않고 다가오는 나라를 향해 가는 예언 정신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정신은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한 물음에 관한 해답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분별에서 찾는 진취적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The Socialist Decision, 22)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물음은 단지 방향에 관한 물음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질곡으로 빠뜨리는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요, 고통의 세계에 대한 애정 어린 돌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예수의 이야기에서 보게 됩니다.
[돌봄, 예수의 정의 / 마가복음 5장 21~43절]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여인의 병을 고치는 이야기를 포개서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한 회당장의 부탁을 받고 그 딸을 치료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혈루병을 오래 앓고 있던 여인을 만나 치료하고, 다시 회당장의 집으로 가서 딸의 병을 낫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함의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의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두 가지 단서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를 찾아와서 딸의 질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한 회당장의 이름이 ‘야이로’였다는 점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빛’ 또는 ‘깨달음’입니다. 빛이요 깨달음 주는 사람이라고 불리던 이가 실상은 죽음의 현실에 깊이 묶여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딸이 죽어가는데, 그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두 번째 단서는 두 이야기에 공통으로 나오는 숫자 ‘열둘’입니다. 예수의 무리를 헤집고 들어온 여인은 혈루증을 열두 해 앓고 있었고, 회당장의 딸은 열두 살의 나이에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성서에서 12가 완전 숫자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삶 전체가 죽음에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이 그 체제에서 가장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는 ‘여성과 아이’에게 고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의 전모가 드러납니다. 죽음의 질서가 일종의 사회 체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빛마저도 힘을 잃고 절망이 깊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에는 그 시대의 절망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선뜻 자신의 요구를 말하지 못하는 여인의 소극적 행동, 소녀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회복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고 펼치는 치유의 손길에 쏟아지는 비웃음. 예수는 그들의 편견과 불신과 비난을 반박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사람을 돌보고, 격려하며 믿음을 북돋고, 희망의 거처를 세웁니다.
죽음의 체제를 흔들어 깨운 예수의 말씀 “달리다 굼”(일어나라!)은 한 번 외쳐진 ‘치유의 주술’이 아니라,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선언’이 됩니다. 그것은 하늘과 이어진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끈기있는 외침이 되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전승됩니다.
제가 향린에서 목회하는 동안 사귄 사람 가운데 노동자 시인이 한 분 있습니다. 생활하는 자리는 다르지만, 나이도 같고 고민하는 것도 비슷해서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시집이 나오면 선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새 시집을 받았는데, 그 제목이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입니다. 사회운동 현장에서 경험한 내용을 담은 그 시집에는 “토대”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그의 고민과 희망을 잘 말해주는 듯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회운동을 오래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 민중정치를 하는 이들 가운데 대장만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옳아도 보이콧하는 종파주의적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묻지요. “(그렇게) 세세한 욕망과 편협함이 고루 챙겨지고 나서야 오는 혁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허무한 탄식이 아니라, 더 심원한 희망과 신비한 현실에 대한 주목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환멸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선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옳기면 이렇습니다. “과실이나 결과를 탐하지 않고 불의와 폭력에 맞서다 이름 없이 스러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선한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발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향린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라면 이 시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와 사회, 종교와 정치, 두 영역 모두 관심하면서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정의로운 행동과 선한 의지가 어떻게 깊이 얽혀 있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계에 악을 심는 보수 정치인의 가시적 위선을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의를 향한 진보적 신념과 열정이 길을 잃고 주변 세계를 어지럽히는 감춰진 위선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환멸과 불신으로 물들어갑니다.
하지만, 아직 겨울이라 할 때 매화꽃 피어 그 향기 날리듯이, 길가에 핀 민들레 홀씨 사뿐히 날아 저 너머로 퍼지듯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까닭없이 솟아오르는 선한 마음은 마치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가 전해주는 언어처럼 세상을 일깨웁니다. 정의와 평화를 꿈꾸며 살아온 교회는 그 소중함을 압니다.
[은총, 믿음으로 보는 세계 / 고린도후서 8장 7~15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로운 활동’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개인의 자선만이 아니라, 평등에 관한 성서의 정신을 사회적으로 이루는 것입니다(14~15절).
바울은 공동체를 이루는 삶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은총의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 생명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음을 깨달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빚진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에 담아왔고, 교회 안팎의 삶에서 ‘돌봄의 윤리’를 개발하는 실험을 해 왔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편견과 욕망에 물든 교회에나 해당하는 것이지, 돌봄의 윤리를 오랫동안 실행해 온 기독교 전통을 이어가는 교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돌봄의 공동체로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지난 7년간 전환의 시기에 목회하며 깨달은 하나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명동 시대에는 우리 교회가 정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사회적 공헌도 하고 믿음의 긍지도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경험이 축적되면서 정의의 윤리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한계 경험도 많아졌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화가 커진 탓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유사 이래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풍요에 얽힌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또한 극심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취약한 삶에 노출되어 도움이 필요하지만, 깊어진 위기 앞에서 자기 너머의 세계로 손을 내밀기 어려운 현실의 딜레마도 있습니다.
정치학자 조앤 트론토는 앞으로의 민주주의는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가 정착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정의의 윤리’만으로는 갈라진 세계의 힘의 정치를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돌봄의 윤리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광화문에서 펼쳐갈 향린의 삶이 ‘돌봄의 공동체’로서 든든히 자라나기를 기대합니다. 안으로는 갈라진 마음을 서로 보듬고 추스르며, 이웃의 아픔과 지구의 위기를 돌보는 섬세하고 우주적인 믿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저도 향린 공동체를 섬겼던 목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향린교회의 앞길을 축복하며, 교우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로우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