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공동체
창 2:5-19 행5:12-27 요1:1-5
임승계 (섬돌향린교회 / 평신도 강단교류)
반갑습니다. 임 승계입니다. 응원 팀과 함께 친정집에 왔습니다.
이따금씩 뵌 분도 있지만 향린을 떠난 후 12년 만에 존경하는 교우님들 앞에 섰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저도 교우님들도 변하고, 섬돌교회와 향린교회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다른 공간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각기 다른 여정으로 몸도 마음도 변한 것 같습니다. 교우님들의 성숙한 나이 듦의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오늘 교우님들과 나눌 하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입니다. 함께 봉독해주셨으면 합니다.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제가 지방 소도시에서 병원 일을 하면서 교회를 다녔는데 그 때 성경 암송대회에서 요한복음 1장 전체를 암송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습니다. 그것도 진료를 하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사회활동하고, 애기 받느라 하루 두 세시시간 자면서 틈틈이 암기했습니다.
저는 제 1성서 창세기 1장을 읽고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개운치 않은 여운을 느꼈습니다. 6일 만에 세상을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물론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큼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과학이야기가 아니라 우주를 하느님의 피조물로 관조하는 상징적인 산문시라 하지만 전자전능하신 분의 마술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요한복음을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말씀이 계셨다고 합니다.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본인 안에 계신 말씀과 끝없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고뇌하시면서 가장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우주와 생명들을 만들기 위해 저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동안 일하셨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년 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구는 수많은 별과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존재합니다. 우주를 이루는 행성과 별의 수는 끝이 없습니다. 끝없이 별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집니다. 생명체도 끊임없이 창조되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모든 창조과정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끝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이 간과하여 우주의 창조를 단 6일 만에 시작과 끝맺음으로 그린 것은 뭔가 찐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우주의 창조를 너무 쉽게 완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처럼 허전한 공허감을 채우려고 요한복음 1장을
되새기고 되짚어 보곤 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창조를 위해 수십억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진지하게 말씀과 이야기를 이어나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동안 하느님의 무한한 고뇌와 사랑으로 우주와 사람을 만드셨다고 감히 상상합니다.
하느님 모습과 닮은 피조물인 우리끼리도 마주보며 진정성 있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고 다스리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건강한 공동체는 이야기 하면서 성장합니다.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우연의 만남에 제가 친정에 와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하고 고민도 했습니다.
지방교회에서 상경하여 향린교회에 등록하여 19년 동안 향린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엿 세 동안 주일을 그리면서 생활다가 교회로 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엔 제겐 다닐만한 교회였습니다. 선교도, 봉사도, 교육도 활기찼고 교회비전이 있었습니다.
향린교회는 저를 붙들고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사랑을 받은 만큼 보답은 못했지만 선교하고 일하다보니 일찍 장로가 되어 정신없이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두 번째 장로임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분가교회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는 분가는 꼭 해야 하다는 믿음을 갖고 준비하고 참여했습니다. 교인수도 많았고, 오랫동안 향린의 꿈이었고, 여러 번 시도했다가 이루지 못했습니다. 안 병무 선생님은 모든 교우가 부여받은 은사를 발휘하기 위해 분가 필요성을 역설하셨고, 부임하신 조 헌정 목사님이 분가의 필요성을 주장하셨고, 고 임보라 목사님을 중심으로 분가를 위한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교회를 꿈꾸는 팀이 있었습니다. 분가를 통해 양쪽 교회가 새롭게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분가 후 문화소수자를 위한 섬돌교회와 새 시대를 대비한 미래를 위한 향린교회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 후 12년째 우리는 어떤 모습 입니까?
하느님은 우리들의 각자 다른 여정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따돌림 당하고,
편견과 혐오를 받으며 무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섬돌교회는 힘들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섬돌교회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무게와 맞먹는 무거운 슬픔도 겪었습니다.
분가로 생긴 뻥 뚫린 공간에 공명을 일으켜 드높은 교회를 꿈꾸었던 향린교회는 어떤 여정을 걸어왔습니까? 하느님에 감정도 변화무쌍한 대한 몇 번의 격량을 헤치고 여기까지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분가 후 회상해보면 두 교회는 지난한 세월을 경험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론 항상 환하고 은은한 과거보다 가끔은 어두운 과거가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과거를 곱씹고 마음을 다잡으면 모든 가능성이 커져갑니다. 다시 요한복음 오늘의 성서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우주가 태어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하느님은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끝없는 사랑으로 말씀과 이야기 하십니다. 천체가 만들어지고, 하등 동식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사람이 태어납니다. 세상을 질서 있게 하시고, 인간을 선의 공동체로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이야기처럼 사람도 진정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생각하고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교회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원만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잠시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도둑이 된 사람” 이야기입니다.
신사 한 분과 젊은이가 우연히 같은 열차에 탔습니다. 신사는 사회적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바쁘게 살아갔습니다. 가끔은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은 평범하게 살아갔습니다. 둘은 테이블 앞에 나란히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신시는 자신의 감자 칩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고 생각하고 한 개씩 집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청년이 신사 분을 따라서 감자 칩을 꺼내 먹었습니다. 신사 분이 하나 꺼내 먹으면 청년도 하나씩 꺼내 먹었습니다. 신사는 처음 보는 청년의 무례함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습니다. 꾹꾹 참고 감자 칩이 거의 떨어질 때까지 번갈아가면서 칩을 먹었습니다,
어느덧 목적지에서 내리려고 신사 분이 일어서자 청년도 일어서서 선반위에 있는 신사 분의 가방을 내려주었습니다. 청년은 남은 감자 칩 봉지를 뭉쳐서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열차 밖으로 나오자 신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코트 주머니 안에서 손끝에 감자칩 봉지가 만져지는 걸 느꼈습니다. 신사는 아차하고 청년의 감자칩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먹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끓어올랐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신사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오해를 받는 청년은 주변적 인물 즉 사회적 약자 일 수 있습니다. 본인도 모르게 도둑이 된 신사는 멀쩡한 청년을 도둑으로 오해하는 위협적인 사람입니다.
도둑으로 몰리면서도 인내하며 침착함을 보이는 청년의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신사는 비록 상대를 함부로 보고 오해는 했으나 울분을 억압하고 함께 감자칩을 먹도록 한 것은 그래도 칭찬받아야합니다. 신사나 청년은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도 모르게 도둑이 된 사람들이 태연히 행세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바람직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예를 든 이야기처럼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 인내심 기르기, 자기생각 들여다보기, 자아 발달 등이 필요합니다.
이해를 구하기 위해 제가 경험한 몇 기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특히 교회 안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섬돌을 세우고 얼마 후 어느 날 갑자기 옥상에 무지개 깃발이 걸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교회는 강단에 십자가가 있으면 되지 무슨 무지개 깃발이야 하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십자가 안에 모든 하늘의 뜻이 녹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제 의견을 건의 했으나 묵살되었습니다. 속이 자글자글 끓어올랐습니다. 한 참 시간이 흐른 후 무지개 깃발을 세우든 말든 그것은 코끼리 다리가 3개냐 4개냐 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음 예는 교회 어르신이 남북대치 상황을 빗대 문자로 한반도는 불구라고 표현했습니다. 즉각적으로 “불구”라는 부적합한 언어를 썼다고 교우 한 분이 지적했습니다, 교회 초창기라 젊은 퀴어 교우 분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 교우 분들과 나이 든 교인들 간에 문화적 감수성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로 거리를 좁혀가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서로 닮아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적응기간을 거치면서 갈등을 넘어 안전한 공간에서 가벼운 농담까지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퀴어 감수성이 떨어져 저들을 이해하고 다가서는데 쾌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분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수자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같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감수성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이해하려면 이론은 물론 같은 공간에서 일정기간 부딪쳐야 합니다. 모든 것은 무지에서 오는 편견이었습니다.
다음 예는 섬돌에는 장로, 집사 등 직분이 없으며, 교인을 호칭할 때는 이름자에 님 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교인들은 목사도 이름에 님 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향린교회에서 장로님으로 불리면서 교회생활을 하다가 섬돌에서 하루아침에 계급장을 떼인 듯 했습니다. 섬돌교회를 준비하면서 교회 구조나 교회운영에 대한 모든 규범을 만들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인데도 막상 실행을 해보니 만사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사방에서 승계님으로 불리고, 며칠 전 교회에 발을 디딘 청년교인도 승계님하고 부릅니다. 님으로 불리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때는 내 안에서 무언가 강렬하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괜히 사서 고생한다는 말처럼 그토록 좋은 향린교회를 왜 나왔나 했으며 가장 멋진 선택이면서 최악의 선택 같기도 했습니다. 시간과 이야기가 모든 것을 바뀌게 해주었습니다.
한 번에 풀지 못하면 시간을 벌면서 매듭을 풀면 됩니다.
마지막 예로 섬돌에서도 분가 준비를 했던 장로 셋이서 고임보라목사님과 함께 목회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교회 구성과 운영을 만들어놓고 그런 꿈을 까졌던 건 착각이었습니다. 직분 없는 교회는 모두가 하느님 앞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길에 들어섰습니다. 교회는 모둠과 목회운영위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임기도 1년으로 모든 교우가 교회 주변에 머물지 않고 중심에서 맡겨진 은사를 맘껏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소수의 특정인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제도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도둑 이야기의 청년처럼 참고 또 참아 냈습니다. 하나씩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교회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 생각과 내 주장만이 옳다는 고집, 내가 아니면 교회 일이 안 된다는 망상, 내가 꼭 이겨야 한다는 어리석음,
과거의 아름다운 영광 등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차츰 교인들의 등 뒤에서 교회를 보고 이야기를 끈질기게 이어갔습니다. 특별한 순간을 제외하면 어느새 마음이 평안해지고 부담감이 확 줄었습니다. 교회는 그런대로 돌아갔고 어른들은 일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섬돌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 자유의 경계가 모호해져 좀 산만해 보이기는 합니다. 자유분방하다도 할까요. 주일도 편의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있어서 봉사활동이나 선교활동이 여의치 않습니다.
특별한 압박수단도 없습니다. 이야기도 잘 통하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앞으로 섬돌이 풀어가야 할 난제입니다.
어지러운 난세에 향린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개혁교회의 마지막 보루인 향린이 흔들리면 향린공동체도 흔들립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찾아오실 교회가 없습니다. 오늘 광화문일대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투쟁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성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막기 위한 위장집회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수는 만들어진 예수이며 이 예수는 성차별, 성적본능 차별, 신분차별 등으로 권력층과 부유층을 대변합니다. 향린은 교회의 한계와 두려움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여명기를 열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장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진실로 말씀과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향린 교우님들도 진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항상 변하는 교회공동체를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이야기를 계속하여 교회가 건강해야합니다.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사회선교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히 채워진 후 행하여야합니다. 교회가 갈등의 늪에 빠지면 개인적인 영성도 검어지고 사회구원 활동도 의미를 잃어갑니다. 향린은 몇 년간 교회가 흔들리는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란 얽혀 살고 있어서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가까이에 마주선다는 것은 서로의 눈빛에서 빛나는 영혼을 볼 수도 있지만 흐릿한 영혼도 볼 수 있습니다.
마음 아팠던 과거란 먼지 쓴 유령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시작됨을 통해 현재에 반복할 수 있습니다. 뼈아픈 과거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결코 두 번 다시 같은 길을 가면 안 됩니다.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자신을 내려놓으면서 진정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거의 아픔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가장 달콤하고 훌륭한 하모니는 각 파트나 악기가 제각기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융합이라고 했습니다. 국악과 찬양예배도 각각의 악기와 찬양이 융합되니 얼마나 듣기에 좋습니까? 하나같이 엘리트들인 교우님들은 제각각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융합해서 앞만 보고 가야합니다.
융합된 교회공동체를 위해서는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화해있는 교회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