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천체학, 컴퓨터 공학, 지질학, 생물학, 뇌과학 그리고 진화과학 등의 현대과학은 급성장하고, 더 이상 전문적인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상식이 되었다. 따라서 과학은 삶의 모든 영역들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종교와 철학은 과학을 무시한체 홀로 설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과학이 밝히는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를 공개적 계시(Public Revelation)로 인식하며, 우리의 우주는 오직 하나의 세계 즉 이 현세적인 세계, 우리의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우주세계 (또는 지구) 외부에 있는 어떤 독립적인 중심, 곧 그 중심을 향해 우리의 중력이 쏠리고, 그 중심으로부터 우리의 삶이 통제되는 외부의 독립적 중심을 기대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런 중심 바깥의 교외지역에 살고 있지도 않다. 가까운 것과 지금 여기가 궁극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또한 우리에게 최종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계 현실 그 자체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우주세계 안에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고, 각 은하계 안에 수천억 개의 별이 있다. 우주의 크기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빛의 속도로 수백만 년에서 수십억 년이 걸리는 것으로 보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하다. 또한 우리의 우주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더욱이 우리의 우주 이외에 또다른 우주들이 있다. 이러한 우주세계에서 중앙은 없으며, 안과 밖도 없으며, 상층과 하층도 없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광활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는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어떤 형태의 죽음 이후의 삶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숨겨진 초자연적인 힘이 어느 때든지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고, 그 존재가 우리에게 계시하거나 우리를 도우면서,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감각 대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구별되고 변하지 않는 사고 대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플라톤주의자들이 아니다. 한편 자연과학이란 외부에 미리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초자연적 세계질서를 복사하거나 추적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우주론적 실재론자들이 있지만, 우주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자연적이며 그리고 만물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간을 통해서 전달된다. 전체와 개체들이 한 몸을 이루는 우리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최선의 이미지이다. 우리는 언어 사용에 의하여 우리의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삼으며 구조화하고 우리의 세계 곧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로 만든다. 일상생활의 업무는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언어를 통해 상징적 의사소통의 매우 특수화된 형태들로 처리되며, 이처럼 언어를 주고받음이 날마다의 삶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다양한 지식 분야의 특수화된 어휘들이 계속 일상적 언어에 덧붙여지고, 필요할 때 사용된다.
만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을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보다 더 큰 다른 어떤 세계관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우리의 언어 이 외에 어떤 다른 매개체를 이용할 수도 없다. 인간중심주의 즉 우리의 자아를 만물의 중심에 두는 것은 더 이상 주제넘어 보이지 않으며, 불신앙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어떤 대안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는 당연해 보인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통하여 이 세계가 세계로 인식하는 바로 그런 생물종이다. 즉 바로 우리의 뇌의 언어 작용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삼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며, 이 세계를 구조화하고, 선명하게 만들며, 이 세계를 우리들 공동의 공적인 세계, 알려진 세계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급진적인 인도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우리를 통한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들 안에서만 이 세계 그 자체를 선명하고 완결되고, 알려진 세상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 세계가 인식되고 온전히 그 자체가 된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통해서다. 자연과학에 관해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미 세계 구조 속에 주어진 다양한 정보들을 단순히 그럭저럭 복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통해 우리의 소통적 행위들을 통해, 이 세계가 조직화돠었고, 선명하게 되었으며, 세계로서 알여졌다. 이 세계를 우리 세계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이 세계를 완성했다.
우리 인간은 타고난 세계 건설자들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 인간을 통해 만들어진다. 현대과학 시대에 고대의 신학적 사상들을 실재론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읽었을 때는 기괴한 것이었지만, 비실재론적 즉 은유적인 방식으로 읽게 되면 그 의미가 선명하게 심층적으로 이해된다. 주류 사회의 과학계와 철학계와 종교계에서 우리 인간이 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칸트는 그렇게 말한 최초의 근대 철학자였다. 이 세계는 초자연적인 창조자를 필요로 한다는 낡은 형이상학적 신념은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현대적인 사상에 의해 바꾸어져야 한다.
세계, 언어,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림은 20세기의 두 철학적 거장들, 곧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과 하이데거(Heidegger)에 의해 밝혀졌다. 그 그림으로부터 우리는 오직 하나의 큰 세계,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만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만물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된다. 우주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한 개체로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개체들은 언어로 전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는 우리의 언어를 통해 그려진다.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으로 상호의존관계의 전체라는 한 몸을 이룬다. 개체들은 전체이며, 전체는 개체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만 우리의 언어를 통해 의식한다. 따라서 모든 개체들은 전적으로 이 세계의 것이며, 지금 여기에 속해 있다. 또한 만물은 최종적이다. 만물은 지나가며, 지나감 속에 있는 만물은 최종적으로 사라진다. 만물은 우연이며, 모든 우연은 어느덧 지나가는 마지막 기회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이것을 138억 년 전 우주탄생의 자연성과 우연성 그리고 우주미래의 불확실성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흘러가는 순간은 또한 종교적으로 최종적인 지금 순간이라는 것은 종교의 역사에서 잘 알려진 주제로서 불교의 용수(Nagarjuna)로부터 도겐(Dogen)에 이르는 불교 저술 속에서도 잘 알려졌으며, 서구에서는 예수로부터 에크하르트와 블레이크를 통해 잘 알려진 주제이다. 즉 지금 순간이 무엇보다도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에서도 지금, 오늘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라고 선포한다(여호수아24:15; 고린도후서 6:2). 이러한 도전이 큰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삶의 목표 혹은 삶의 의미를 이 세계 너머의 또다른 더 나은 세계로 미루려는 모든 생각을 이제는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안과 밖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바깥에나 안에 별개의 다른 세계는 없으며, 물론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다. 철학자 니체가 명료하게 깨달았듯이, 우리는 지금, 곧 현재의 시간 외에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확증해야만 한다. 고대의 현자들은 지금 순간에 호소함으로써 결정을 내릴 시간을 놓치지 않고 선택하도록 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내세적인 형이상학적 신학에서 예수의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 신학에로 전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현세와 내세의 삶 사이의 중간기도 아니며 오직 최종적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와 의미를 죽음 후에 그리고 세상의 종말 후로 연기시키는 교회의 낡고 진부한 믿음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그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열정적으로, 우리의 삶의 덧없음 속에서 우리의 삶에 투신함으로써, 그 각각의 순간을 가장 고귀한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무작정 믿으면서 꼭두각시처럼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는 우리의 삶을 포도송이와 비교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버팀목을 세워줌으로써 포도송이가 아래로 메달리게 한다. 그리고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포도를 먹는다. 따라서 다음 번에 먹게 되는 것은 남아 있는 것 중의 최선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제한된 수량만이 남아 있으며,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기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질질 끌지 말아야 한다. 현재를 충만하게 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현재에 쏟아 부어야 한다.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쇠퇴하여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내세적이고 교조적인 믿음을 버리고, 현재의 삶을 포기한체 죽음 후의 삶으로 연기시키는 집행유예적인 믿음을 페기처분해야 한다. 교회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은 멸망해야 할 더러운 것이며 오직 죽음 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이고 추악한 믿음을 제공했는데, 그것들은 참된 종교가 아니라 그 참된 종교를 채색된 베일에 은폐하는 상업적인 대용물일뿐이다. 이제 그 베일과 대용물은 신뢰를 잃었으며, 우리는 자율적으로 참된 행복과 심층적인 삶의 의미를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