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문맹퇴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이다!

by 최성철 posted Dec 19, 2019 Views 181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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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전 예수의 정신을 깊이 깨닫고, 예수가 산 것처럼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그들은 이야기들 속에 각각 독특하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았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는 신성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려는 삶의 희망과 용기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들이다. 특히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했다는 이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질병과 전쟁과 테러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긴급한 상황에서 예수의 정신이 탄생해야 한다는 매우 도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성전종교하느님을 거부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탄생시켰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란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즉 하느님은 세속적인 세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각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출산되어야 하는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마리아의 예수 출산 이야기의 심층적인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지혜의 말들이 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것이 나도 나의 때와 나의 문화 속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마이스터 에카르트) “사랑과 순결하고 신실한 양심으로 마음과 몸 안에 그리스도를 품고 다닐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그리고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낳는다.”(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하느님은 아버지 만은 아니다.  사랑스런 아기를 바닥에서 올려 안는 어머니다. 삼위일체는 어머니 치마폭 같다. 그 안에서 아기는 집을 발견하고 어머니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막데부륵의 메헤틸드) “하느님은 자연의 참 아버지요 어머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다.” (노리치의 줄리안) “창조 과정은 여성적 성격이 있고, 창조 작업은 무의식적인 깊은 곳에서 솟아난다. 말하자면, 어머니들의 영역에서.”(칼 융) “생명을 못 낳을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깨달음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그것은 신비스럽게 숨어 있다. 어떤 사람 안에서는 그 씨앗이 자라고 어떤 사람 안에서는 썩는다. 더러는 생명을 낳고 더러는 유산한다. 더러는 깨달음을 낳아 양육할 줄 알고 더러는 그렇지 못하다.”(랍비 헤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의도되어 있다. 하느님은 항상 태어날 필요가 있다.”(마이스터 에카르트) “하나님은 영원하다는 말은 하느님은 영원히 젊다는 뜻이다.”(마이스터 에카르트)

 

일찌기 창세기 저자는 태초로부터 이 우주에는 창조성(Creativity)이 있었다고 깨달았다.  그리고 이 창조성하느님이라고 불렀으며, 인간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지니고 탄생했다고 기록했다. 참 사람 예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있고,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가르쳤다. (참고: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In the beginning...Creativity); ‘예수와 창조성’, 고든 카우프만) 사도바울은 하느님의 정신이 있는 사람의 몸이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 류영모 선생은 인간은 태초로부터 하느님의 정신 즉 하느님의 얼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탐욕과 욕정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얼나, 참나, 진실한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짐승과 같은 몸나, 제나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얼나, 참나를 되찾는 것이 삶의 의미와 목적이고, 이것을 위해 자신의 내면 속에 얼나를 잉태하여 출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참고: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박영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조상들은 인간의 내면에는 태초로부터 신성이 있고 그 신성은 몸과 마음을 통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고 흘러 나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하느님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탄생은 하느님의 형상의 탄생이며, 하느님의 신성함의 탄생이며, 하느님의 창조성의 탄생이다. 하느님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과 자율성이라는 창조성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내면에서 신성을 잉태하고 신성을 외부적으로 출산하려고 태어났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성스럽고, 사는 것이 성스럽고, 죽는 것이 성스럽다. 하나님을 지니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며 책임이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기독교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하느님을 탄생시킬 권리와 책임을 거부하고, 우주의 창조성을 무시한채 엉뚱하게도 초자연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 징벌하는 이분법적 하나님, 제국적인 하나님, 준엄한 가부장적 하느님의 외형적인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우상숭배하는 예배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정치적으로 창작한 죄와 용서와 구원의 공식인 대속론의 노예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론예수의 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잔인하고 추악한 교리이다. 이것은 예수가 가르친대로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을 잉태하고 외부적으로 하느님을 출산해야하는 어머님됨의 의미와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과거의 패러다임가부장적 전통 교리는 하느님의 모성의 특성과 여자와 남자, 기혼자와 독신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경계 넘어 인간의 내면의 모성을 발전시킬 중대한 책임을 심각하게 거부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다고 선언한 14세기의 기독교 신비가 에카르트가 깨달았듯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머니로 살아가야 한다. 랍비 헤셀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어머니가 잠재한다고 확신했다. 탄생은 부모의 어느 한쪽에서 일어날 수 없고, 아버지 혼자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사람마다 하느님의 어머니 모습으로 탄생했다. 심리학자 융이 말하듯이 창조는 어머니 영역에서일어난다.

 

21세기의 현대 사회는 모성적으로 양육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특히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 교회는 어머니 하느님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성 전통은 이미 구약시대에 풍부하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도처의 전통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15세기의 기독교 신비가인 힐데가르드하느님은 바퀴, , 통짜와 같다고 말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 아래로의 수직선의 이미지보다는 둥근 이미지이며 마치 어머니의 치마폭과 같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고 깨달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이라는 조건없는 사랑에 감싸여 있다. 감싸고, 끌어안고, 경계 넘어 포용하는 포월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만인을 환영하는 어머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안에 감싸이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출산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참고: ‘원복’(原福), 메튜 폭스) 1세기에 기록된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의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은 이러한 심층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성탄절 이야기들은 교리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시대와 문화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낳은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포월적인 사랑창조성을 잉태하고 출산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기쁘고 좋은 소식(복음)이 될 수 있다.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낳는 것은 하는님을 낳는 것이다. 오늘 전쟁과 빈곤과 질병과 생태계의 파괴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인간의 집 지구는 하느님의 출산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타자로써 외부에 존재하는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잉태하고 느끼고 외부로 출산하는 하느님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태어날때부터 품었던 내면의 하느님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즉 예술 작품으로 드러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주 안에서 하느님을 출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기독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름받은 소명과 책임을 망각하고 심지어는 반대하여 교리와 형식에 얽매여서 무의미하고 관념적인 믿음을 강요해 왔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잉태하고, 이 하느님이 밖으로 출산하는 창조성자율성이 없다면, 개인적으로 두렵고 슬프게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배타적으로 살게 된다. 그러나 자연적인 모성을 회복하게 되면 지혜와 조건없는 연민의 사랑이 풍성한 삶을 출산하게 되고, 이것은 하느님을 출산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예수는 산상수훈(마태복음서 5:1-10)에서 이 길을 가르쳤으며 이 출산에서 모든 축복을 발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오늘날 우리의 지구촌에는 하느님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다. 함께 아파하는 사심없는 사랑과 창조성과 자율성이 없는 곳마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와 희망과 기쁨이 없는 곳마다, 하느님이 없거나 죽은 것이다. 하느님의 특성은 순결함과 어린이같음과 어머니같음이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가부장적인 신앙과 신학에서는 귀여운 아기 예수일시적이고 표층적이고 감상적인 기분에 머물고 만다. 하느님이 어린이같다는 말은 인간들과 사회구조 속에서 하느님이 태어나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는 하느님을 낳고 양육할 책임이 있다. 우주세계는 여전히 출산 중이고, 진화 중이고, 확장중이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출산과 확장을 요청하고 있다.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가장 경이로운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이 출산과정에서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리는 의식의 전환으로 부름받고 있다. 이 시대는 하느님과 인간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에게서 잃었던 하느님의 모성과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어머니 역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아름답게 가꿀수 있는 예술가들이고 끊임없이 생명을 출산하는 산모들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인종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서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놓고, 지혜와 사랑과 희망과 기쁨을 낳을 수 있고,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심층적인 메시지이고,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이 메시지를 잉태하고 출산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