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
2019년 6월 7일(금) 제12호
‘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은 묵자에 나오는 말로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비추어 보라는 말입니다.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자기경계인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라는 반성이기도 합니다.
(우편번호 : 02704) 서울시 성북구 보국문로35길 49-12, 희남신도회장 김종일
E-mail : jaju58@hanmail.net, 전화 : 010-9972-1110
1. 생활 나눔
2019년 희남신도회장으로 선출된 김종일입니다.
희남회원님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12번째 서신을 보냅니다.
5월 26일, 전교인수련회에서 향린비젼 논의와 함께 소통과 공감을 위한 교우들의 단합이 이루어졌습니다. 6월 2일, 향린교회 정기제직회를 개최하여 제직회 정식부서로 (가칭)성평등부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월 5일,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수요 거리기도회’를 향린교회 청남, 희남, 장남이 공동 주최하고 미국에 6.12 싱가폴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미 대사관 주변을 따라 항의 행진했습니다.
6월 9일, 희남 월례회가 예배 후 김희헌 목사님 방에서 열립니다.
2. 성경 한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 11:1)
한 달 전부터 북한강변에 있는 농장에서 주 3일 정도 기거하며 농사일도 하고 천연 엑기스를 만드는 작업도 합니다. 언젠가 ‘자연인’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심신이 편안합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찰하는 귀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저의 성찰에 도움이 되었던 시 한편 올립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 될 생각 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 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살아 있는 것
여린 싹으로 토해내어
마침내 열매 맺히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이현주 목사님 시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3. 세상만사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중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말이 많습니다. 압권은 세월호 망언으로 징계를 받은 차명진 전 의원의 “문재인은 빨갱이”, 자유한국당의 “역사 왜곡하는 막말”이라고 한 망언입니다. 문 대통령 추념사 발언의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당리당략을 앞세워 이념갈등을 부추기는 수구정치세력의 망언과 망동을 이제는 민중이 심판할 때가 되었다 싶습니다.
‘약산 김원봉’ 그는 누구인가?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1918년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선임되었습니다. 중국 황푸[黃浦]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30년경 베이징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했으며,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설립·운영하며 항일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고,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결성했습니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으며, 김원봉은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44년에 임시정부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습니다.
8·15해방 후 귀국,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습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공동의장을 맡았습니다. 1946년 발생한 대구 10월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된 이래, 1947년까지 노덕술 등 일제강점기 형사출신 경찰에게 모진 고문과 수모를 겪었습니다. 계속되는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 실망과 좌절을 느껴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습니다. 1952년 북한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정책에 반기를 들어 1958년 10월 해임되었고, 그 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4. 옛 이야기
2002년 6월 13일 미군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효순, 미선이는 지금 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진관스님과 홍근수 목사님으로부터 사건소식을 전해 듣고 저는 부랴부랴 평통사 실무자들과 현장에 달려갔습니다. 사건현장은 너무 처참했습니다. 우리는 경찰들이 확보하고 있던 시신현장사진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했습니다. 현장 아스팔트에는 54톤의 궤도차량 바퀴자국이 갓길로 급히 꺾인 스키드마크가 선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은 단순교통사고라고 우겼고, 우리 정부에 형사재판관할권 이양을 거부했으며, 미군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들을 내세운 군사법정에서 관제병과 운전병을 상반된 이유를 근거로 무죄판결 했습니다. 심지어 저희에게 재판방청을 약속했으나 미 대사관 측에서 재판당일 아침 거부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때 “꿈은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에 열광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군과 한국 군·경은 유족들을 압박하여 이틀 만에 시신을 화장하게 했습니다. 그래야만 미2사단장이 면담한다고 회유하면서. 그러나 끝내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족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는 의정부 미 야전군사령부 앞에서 효순, 미선이 언니가 다니던 의정부여고 여고생들과 함께 촛불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촛불시위는 광화문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전역으로, 세계 곳곳으로 거대한 들불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이 탄생했고, 반미 촛불시위에 놀란 미국정부 관계자는 노무현 당선자를 찾아와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적극 검토할 테니 촛불시위를 멈추게 해달라”고 사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미국에게 당당한 주권국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