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바꾸는 평화’
김종일 (희남 신도회)
오늘 평화통일주일을 맞았습니다. 정전협정 다음 날인 7월 28일 예배 때 “우리는 분단된 겨레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며, 활동한다.”고 ‘생활실천 다짐’을 했습니다.
저는 평신도 하늘 뜻 펴기 준비를 하면서 저 자신에게 여러 번 반문 했습니다. 분단된 겨레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있는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가? 돌아보니 많이 부족했구나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 뜻 펴기 준비를 하던 중에 제 가슴을 울리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 1:15)
이 말씀이 저에게 평화통일의 때(Kairos)가 가까이 왔으니, 전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회개(Metanoia)하고, 평화통일의 복음(Euaggelion)을 믿으라고 촉구합니다.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고 세상의 중심은 울부짖는 곳’이라는 말처럼,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폭염이 계속되는 지금도 강남역 사거리 철탑에 올라간 김용희님이 60일 넘게 목숨을 담보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일관계는 마주보며 달려오는 열차처럼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배상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승소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아베 내각은 화이트 리스트에서 대한민국 제외를 전격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한일관계는 총성 없는 무역전쟁으로 비화될 것입니다.
지난 6월 30일, 트럼프–김정은 판문점 회동 이후 40일이 지났음에도 북미 간 실무협상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한미 간 군 당국은 중단되었던 한미연합 군사연습 재개를 공식화했습니다. 대화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북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면서 한미 당국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1953년 7.27 정전협정 체결 이후, 단 한 순간도 우리는 평시를 경험하지 못하고 불안에 떠는 준전시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는 미 국무성의 한반도 정책인 ‘분할지배정책’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45년 7월초 한반도 4개국 분할방안을 마련하고 소련, 중국, 영국에 제안했으나 거부되었습니다. 8월초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출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미국은 8월 11일 새벽 일방적으로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분할했습니다. 8.15 광복 이전에 미국에 의해서 한반도의 분단이 강제된 것입니다.
미 국무성의 ‘한반도 분할지배정책’은 3가지 방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첫째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할 것, 둘째 식민지 통치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군대, 경찰, 공무원 조직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 셋째 남과 북의 민족적 분열을 최대한 활용할 것 등입니다. 그로 인해 남과 북은 지금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분단의 질곡은 저의 삶의 궤적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유아기를 미군기지 주변에서 보냈습니다. 만취한 미군이 양색시라 불리는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미군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제가 즐겨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동무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라는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음악책에서 사라지는 동심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하루 만에 국민교육헌장을 다 암기해서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연단에 올라가 암송하고 옥수수 빵 10개를 받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분단을 이용한 장기집권을 위해서 어린 동심마저 파괴했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기구에 실려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북의 삐라를 주워 동생들의 학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 옥상에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 학년마다 열리는 반공웅변대회에 나가기 싫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피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교련선생님의 무자비한 폭행에 분노하여 폭력교사 퇴출 데모에 주동자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교장과 폭력교사의 사과,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지만, 학교로부터 요주의학생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을 진학했는데 입학한 지 20여일 만에 학교까지 중앙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교회 청년회 회지를 내보이며 “‘기독청년이 바라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특집기사를 누가 썼느냐, 배후가 누구냐?”라고 닦달과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키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저는 직선제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데모대를 이끌었고, 5.17 계엄령 이후 수배령이 떨어져 6개월 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수배기간 중 대학선배로부터 광주항쟁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아 보면서 분노와 좌절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저에게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수배 해제 후 10월초 학교에 가니 학과장은 문교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며 ‘사회부적응학생 기록카드’ 작성을 저에게 강요하는 한편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대학 시절은 데모와 수배, 기관원의 감시 속에 암울하게 보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대학졸업 후 학사장교로 군복무 중이던 1985년 2·12 총선을 맞았습니다. 저는 105 야전병원 후송중대장이었고, 사병 전체를 정부여당인 민정당 후보에 투표하도록 부재자 부정투표를 강요받았습니다. 이를 거부하여 지휘관으로부터 폭언과 폭행을 당하고 부재자 투표가 끝나는 기간까지 중대장 직무정지와 사실상 구금과 다를 바 없는 영내대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군 제대 후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12월 대선에서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사건이 터지자 저는 한 걸음에 달려가 밤샘규탄투쟁에 참가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진압과정에서 백골단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해 허리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 서른이었고 “왜, 대한민국은 불의한 역사가 계속 반복되는가?” 깊은 고민과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고 세상의 중심은 울부짖는 곳’이라 했는데,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어디가 아프십니까? 한반도 곳곳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겨레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단의 질곡이 저의 삶의 궤적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우리 민족의 운명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소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마음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개인의 삶과 운명의 주인은 당사자이듯, 민족의 운명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순리입니다.
반역과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아직도 치욕스럽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의 복음은 ‘평화통일’이라고 믿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처럼 “벽을 문으로 알고 걷어차”면서 “통일은 됐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 한 곡 부르겠습니다.
“버려진 사선 철길을 따라
민중의 가슴 차표를 쥐고
그대 오르네 철책 면류관 쓰고
저 언덕을 오르네
가시쇠줄로 찢겨진 하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압록강 줄기 그리움 일렁이며
흐느끼는 당신의 노래
우리지친 어깨 일으켜
떨리는 손을 마주 잡는다
갈라진 조국 메마른 이 땅 위에
그대 맑은 샘물줄기여
죽음을 넘어 부활 하는 산
피투성이 십자가 메고
그대 오르는 부활의 언덕위로
우리 함께 오르리” (‘그대 오르는 언덕’, 류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