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지어지는 자리 | 김희헌| 2019-09-01

by 김희헌 posted Sep 01, 2019 Views 23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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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지어지는 자리 (2:4-13, 13:1-8, 15-16, 14:1,7-14)

2019.09.01 창조절 첫번째 주일

 

[사회적 소란이 일어날 때]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이번 주부터 교회력으로는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창조절 첫째 주일 말씀 제목을 역사가 지어지는 자리로 잡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역사는 개인적인 차원의 역사일 수도 있고, 한 사회의 역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조국 법무부 장관후보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과 대립에 휩싸여있습니다. 과연 이런 소란을 거치고 난 다음에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지만,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느낌은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 사회가 대결구도를 조장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에 휘둘리며 비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열어 후보자의 자질을 정당하게 검증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진실과 배려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국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회적 혼란을 조장하는 일이 습관이 된 이들의 책임은 분명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혼란이 염려가 되는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높은 갈등지수 때문입니다. 의혹이 일자 조국 후보자는 자신의 딸 문제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하지만 논란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에서 빚어진 시민들의 분노와 박탈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신문의 칼럼은 조국 후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열린 것은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말합니다. 장관 임명이야 청문회를 거치면 되는 것이지만, 그의 거취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계급문제를 정직하게 풀어갈 용기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일정 수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왔지만, 여전히 경제적 민주주의는 풀어내지 못하면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자괴감으로 물든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로 인해 마치 낡은 신분제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힘찬 꿈을 우리 사회가 지어낼 수 있을까요? 정의와 평화를 단지 외치는 구호로써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고, 너를 향해서 요구하기보다는 나로부터 지어낼 수 있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정치와 살아있는 종교라면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해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탄식과 저주 / 예레미야서 24-13]

예언자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해가던 위태로운 시기를 살았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어두운 사회상황은 하나님의 탄식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왜 나를 떠나서 헛된 우상을 좇고, 자신들마저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왜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메마른 땅에서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묻지도 않느냐? 이것은 비탄에 잠긴 예언자의 심정이요, 그가 느낀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이 탄식하는 그 사회의 풍경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8절에 나온 것처럼, ‘제사장들은 주님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며, 통치자들은 하나님에게 맞서서 범죄를 저지르고, 예언자들마저 풍요의 신을 쫓아 헛된 예언을 하는 사회로 묘사됩니다.

이런 사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9절을 보면, 하나님은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은총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시작부터 다시 하겠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위태로운 광야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따랐던 (2) 사람들이 풍요 속에서 도리어 길을 잃어버렸으니, 하나님은 탄식하면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당시의 사회는 실패했습니다. 예언자가 꿈꾸던 사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이끄는 사회입니다.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천대를 받거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사회, 정의가 역동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서 율법의 조항에 묶이지 않고 율법의 정신을 살려내는 사회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가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율법조차도 지켜지지 않아서, 약자들에게는 그 사회의 질서가 도리어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총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기는커녕, 권력자와 기득권 세력이 공모하여 사회를 약탈하고 정치와 종교는 타락하여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신의 목소리를 빌어서, 그렇다면 법대로라도 하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민주주의를 향한 긴 항쟁 끝에 절차적 민주주의 정도는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했었고, 그뿐만 아니라 지난 촛불혁명 이후에는 힘없는 사람들의 소망까지도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어쩌면 순진한 바람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법치주의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사회라는 증거들을 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다시 철탑을 올라 고공농성과 단식투쟁을 벌이고, 삼성과 현대와 같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기업들은 법을 어기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관행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있는가요?

예레미야는 당시의 사회가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샘으로 삼은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표현된 이 두 가지의 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민중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회가 썩어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물은 중요했습니다. 성경에는 물과 관련된 상징들이 많습니다. 물로 뒤덮인 혼돈으로부터 천지창조가 이뤄지고, 죄악으로 물든 세계에 대한 심판은 큰물로 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들의 해방은 물을 건넘으로써 이뤄졌고, 시련과 연단의 광야생활에 필요한 물은 바위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시대에 생수는 더 이상 흘러넘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생수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적시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 히브리서 131-8, 15-16]

히브리서 본문을 보면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는 여섯 가지의 길입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요, 셋째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요, 넷째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음행을 피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삶이 돈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때 6절과 같은 담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종교적 고백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종교를 삽니다. 그것은 왜곡된 종교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의미를 잃고 결국 자기 신념만 남은 껍데기 종교를 살게 됩니다. 그것은 죽은 종교입니다. 살아 있는 종교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믿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윤리이지만, 성서가 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윤리입니다.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 이 순박한 윤리에는 역사를 깊이 꿰뚫어본 치열한 믿음의 경험이 배어있습니다. 안병무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이 강조한 내용이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12-13절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안병무 선생님이 언젠가 이 구절을 본문으로 삼고 현존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325-30) 안 선생님은 그 설교의 맨 처음에 성서에서 줄기차게 이어온 물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예수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는 물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히브리서 212-13절을 제시하면서, ‘성문 밖 버림받은 현장에예수가 있으니,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그 치열한 신앙이 갈고 닦은 믿음의 윤리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세월호광장의 촛불기도회에서는 <4.16합창단>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합창단은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생존자 부모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분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큰 감동을 얻습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역사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외침과도 같습니다.

이들은 권력자도 아니고 돈이 많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식을 잃고도 조롱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마치 하늘에 바치는 역사의 함성처럼 느껴집니다.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신음을 토해내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는 길을 잃은 우리 사회를 불러일으켜 깨웠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명료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으로써, 사람을 새롭게 짓고 역사를 새롭게 짓자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로 / 누가복음 141, 7-14]

우리 사회는 돈이 주인이 된 세상을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재는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게를 회복하는 길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에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과 식사할 때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하여 주신 두 가지 교훈이 나옵니다. 하나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잔치를 베풀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권고는 오만에 대한 경고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낮은 자리요, 자신이 가야할 길을 분별하는 자리도 낮은 자리입니다. 낮은 자리는 삶을 새롭게 지어내는 자리요, 하나님나라를 추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두 번째의 권고는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는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하늘의 은총을 심는 일이요, 하나님나라를 지어가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 털어서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의 핵심을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먼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삶을 새롭게 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가 지어지는 자리는 낮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면서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향린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이끕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자신이 이룬 성취도 스스로를 걸리게 하는 덫이 되고 말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무언가를 지어갈 수 있는 자리는 낮은 곳입니다.

자신이 큰 바퀴를 굴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작은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가꾸어온 지혜가 때로는 작은 그물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지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새 삶을 위해서는 모두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창조절을 맞으면서 다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신앙이 가질 태도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낮은 자리로 내려가면서 하나님나라를 지어가는 믿음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치열한 신앙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역사가 지어지는 자리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나라를 삶에서 맛보는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