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모를 위한 부탁 | 김희헌 | 2019-09-08

by 김희헌 posted Sep 08, 2019 Views 18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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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를 위한 부탁 (18:1-11, 1-21,14:25-33)

2019.09.08 창조절 두 번째 주일, 한가위감사주일

 

[푸른 꿈을 짓는 믿음의 역량]

어제 태풍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수확을 앞둔 농작물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슬픔과 시름에 잠긴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이웃의 사랑이 있기를 빕니다. 오늘은 한가위 감사주일입니다. 한가위는 한 해의 결실에 감사하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오래된 명절입니다. 땀 흘려 거둔 첫 결실을 조상들에게 바치고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제가 교회에 부임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무슨 결실을 거두었는지를 말하기 이른 시간이지만, 제 맘속에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향린교회에 어떤 결실이 맺히기를 바라며 일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피상적인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는 한반도와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보다 책임 있는 태도로 임할 수 있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 교우 한 분이 글을 쓰셨는데 읽어보신 분들도 있을 줄로 압니다. “가난한 좌파인 나의 걱정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 글, 법무부장관 후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집회에 참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가난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 글에 담긴 가난에 대한 진지한 고백은,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정의와 진리에 대해서 소란하지만, 정작 필요한 근본 문제는 다루지도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늘뜻펴기를 마치고 나면 원고를 교회홈페이지에 게시합니다. 가끔 댓글이 달리기도 하는데, 연초에 달린 댓글 가운데 하나는 은혜로운 말씀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받아들이기에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위험요소라는 것은 설교가 시장경제를 부인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이 없는 곳에는 독재와 억압이 지배하게 된다는 주장을 덧붙여놓았습니다.

이런 주장은 미국교회와 그 아류처럼 번성한 한국교회에서 익숙합니다. 교회가 마치 자본주의의 대변인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시장경제사적소유니 하는 관념들은 일종의 교리에 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초대교회의 삶에 비추어보면, 그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비기독교적인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의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도리어 퇴화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종교를 크게 보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까지도 동원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궁극적인 뜻을 물으며 그것을 향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이 둘의 간격은 대화를 통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영혼의 감각이 변화를 겪어야 그 종교정신이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자본주의와 깊이 결부되면서 정신지체를 겪어왔습니다. 사적소유와 시장경제 등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름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개신교는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자체를 기독교 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칼빈주의가 대표적입니다.

이번 주에 토마 피케티라고 하는 프랑스 경제학자의 책이 번역출간 된다고 하지요?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정치는 인류 공동체에게 이토록 큰 해악을 끼치는 불평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이유를 사유재산이라는 금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찾습니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요즘 대안으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을 넘어서, ‘기본자산을 청년들에게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프랑스의 국민 일인당 평균 자산이 20만 유로인데, 그것의 60%12만 유로(한화로 약 16천만 원)25세가 되는 모든 청년들에게 기본자산으로 지급하여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류를 병들게 하는 가난과 억압, 그 배후에 있는 불평등과 대립이 어쩔 수 없는 만고불변의 사안이 아니라, 극복해 갈 수 있다는 꿈을 함께 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라면 자신들이 꿈꾸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내용의 믿음과 소망을 안고 향린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걸까요?

금년 초에 소천하신 교우 한 분은 아흔 가까운 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이 참 맑고 열린 분이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의 꿈을 크게 갖기를 원하셨고, 당신이 먼저 꿈을 크게 지어가면서 교우들에게 그 꿈을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저에게는 자조적인 말씀도 하셨습니다. ‘향린교회는 다니기 참 편한 교회이다. 부담 없이 다니면서도 폼 나는 교회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어갈 일꾼들은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무슨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어제의 태풍에도 교회 벽에 붙은 현수막이 찢기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가 분단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걷어내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래전 홍근수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평통사를 세우고 일구는데 헌신해왔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꿈꾸기 원합니다. 그것은 작년부터 도래한 평화의 물결을 타고 힘차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미래를 정부나 기업에 맡기지 않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해서 남과 북의 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은 아래로부터 열려야 한다는 것이 안병무를 비롯한 신앙인들의 생각이었고, 그것이 향린교회가 교회창립 40주년을 맞은 1993년에 <통일공화국 헌법> 초안까지 만든 이유라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사회선교를 벌여갈 때, 저항의 시대에 만들어진 옷만 입지 않고, 평화체제를 짓는 창조의 시대에 필요한 옷도 지어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꿈을 크게 꾸면서, 분단시대의 편견들을 걷어치우고, 남한 민중이 키워온 민주적 역량북한 인민이 지켜온 선한 가치를 함께 엮어서, 한반도에 생명과 평화의 그물망을 짜는 일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함께 품은 꿈이 없으면 작은 차이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슴 벅찬 꿈이 있다면 서로의 차이는 공동체를 세우는 힘과 지혜가 됩니다. 작은 차이로 인한 소모적인 싸움지혜를 소진하고 힘을 탕진해서는 안 됩니다. 꿈꾸는 일에서, 그리고 그 꿈을 실행하는 일에서 믿음의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신앙공동체와 사회변혁 / 빌레몬서 1-21]

빌레몬서는 짧은 문서이지만 기독교적 인간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서입니다. 신뢰에 기초한 이 편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부탁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기획을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입니다. 둘째는 이 편지의 수신자인 빌레몬입니다. 그는 노예 오네시모의 주인으로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준 사람입니다. 셋째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입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내용 밖의 다른 사항들은 정확히 알기 힘듭니다. 바울이 갇힌 감옥이 에베소인지 로마인지 가이사랴인지, 편지를 쓴 시기가 56년인지 62년인지, 오네시모가 어떤 경로로 바울과 함께 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편지 내용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편지에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한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입니다. 바울의 부탁은 17-18절에 나오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동지로

생각하고 나를 맞아주었듯이, 오네시모를 동지(koinōnon)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요, 둘째는 오네시모가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자신 앞으로 달아놓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부탁은, 한편으로는 빌레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받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 부탁이 가진 파격성으로 인해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합니다. 한편으로는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호소하고 (4-7), 다른 한편으로는 빌레몬이 자신에게 빚진 것을 기억시키면서 명령’(command)순종’(obedience)을 언급합니다. (8, 21)

바울이 빌레몬을 만난 곳은 아마도 골로새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17절에서 언급한 아킵보가 빌레몬서 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아킵보를 가리켜 우리의 전우’(fellow soldier)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빌레몬도 그런 관계로 보입니다. ‘전우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를 향한 강한 신뢰, 다른 하나는 연대를 통한 굳센 결속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결속이 없이, 자신들이 가진 정의 관념의 차이에 굴복했다면 이 편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서로에게 차이를 비난의 표적으로 삼기보다는 믿음과 연대로써 메워가야 한다는 점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꿈, 하나님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의 꿈을 함께 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작은 편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친교의 따뜻함과 결속력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편지 겉으로는 다 드러나지 않은 바울과 빌레몬의 꿈에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변혁 프로그램에 관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민감한 주인과 노예의 신분문제를 다룬 이 편지는 명확한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가르친 그리스 철학자들도 상상 못한 원초적인 검푸른 꿈이 바울의 또 다른 편지에 담겨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대표적인데 그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3:26/28)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표방된 이 꿈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가진 진정한 생명력이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회가 가진 근본문제는 강자들의 기준으로 세상의 질서가 짜여 움직이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역사의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불평등한 질서를 고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그러진 정치와 종교의 대표적인 범죄는 이 역사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정의롭지 못한 특권적 질서를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에 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종교는 낡은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지어가는 신을 직시합니다. 기만적인 세계를 주물러서 새롭게 지어내겠다고 외치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시대의 예언자들입니다.

 

[토기장이 하나님 / 예레미야서 181-11]

나라가 파국으로 빠질 때 예언활동을 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토기장이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에 가보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는 토기장이가 무엇을 하는지를 봅니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것을 주물러서 다른 그릇을 빚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6)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와 심판입니다.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갖고 빚어냈다하더라도 죄악에 물들어서 잘못 만들어졌다면, 주물러서 심판하고 다시 지어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에 관한 이 가르침은 나중에 기독교 신학에서는 가장 앞선 교리가 되었습니다. ‘창조론으로 알려진 이 사상이 정립되지 않으면, 그 위에 신앙의 집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지어 가신다는 말씀은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전에 만든 그릇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주로 심판의 하나님을 가르쳐 왔습니다. 심판하는 일에 몰두하는 신은 공포의 신이요, 공포의 신은 질서의 신입니다. 그런 신은 결국 기득권의 신으로서, 인간혁명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멸하고 맙니다.

살아있는 신은 심판에 머물지 않고 그릇을 새로 지어내는 신입니다. 죄악으로 물든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혁명을 벌이는 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신을 믿으려거든 인간혁명에도 죽지 않는 신을 찾아야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에 혁명의 불씨를 심는 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역사의 궁극적인 혁명가라는 믿음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 누가복음 1425-33]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자기 가족은 물론이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μισέω, hate) 것이요 (26),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요 (27), 마지막으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33)

이 말씀 앞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반문하는 거지요. 정말로 그러한가? 도대체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데, 그렇게까지 요청하시는가?

그러나 이 절대적인 요청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의 방식을 말해 줍니다. 이 세 가지 요청을 안고 씨름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믿음의 세계가 동터옵니다. 새롭게 지어가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자기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새롭게 지어가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을 빌레몬에게 하였듯이, 오늘 우리에게 이 시대의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을 하시면서 역사를 지어가십니다. 그 요청이 있을 때,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심지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내가 너를 다시 지어주겠다. 힘을 내라!’ 하고 말씀하시면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새로 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을 새로 지어주실 분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과 지혜를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새로 지어낼 분을 향해 맘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한 바울과 같이 (고후 4:16),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계속해서 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여물고 익은 열매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지어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에 힘입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알곡으로 자라나는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역사의 푸른 꿈을 간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의 제자로서 동터오는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십시오.

우리 시대의 오네시모를 위한 주님의 부탁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역사의 알곡이 되고 하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