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 김희헌 | 2019-09-15

by 김희헌 posted Sep 15, 2019 Views 27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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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4:11-12,22-28, 딤전1:12-17, 15:1-10)

2019.09.15 창조절 세 번째 주일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산다는 것]

한가위 연휴를 잘 보내셨는지요? 요즘에는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오랜 운전을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찾아 먼 곳까지 가는 것은 단지 명절습관이 아니라, 그 안에는 자기의 뿌리를 찾아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움이 있다고 봅니다.

이주 전 저에게 두 박스의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번역한 영문판이 미국에서 출판된 것입니다. [역사와 해석]이 성서에 대한 민중신학적 설명이라면, [민중신학 이야기]는 안선생님이 자신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책입니다. 이 책은 공동노력의 산물입니다. 글을 쓰실 수 없을 정도로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지자 제자들이 먼저 질문을 만들어서 선생님에게 묻고, 그 대화를 글로 옮겨 책을 만든 것입니다.

안선생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한국사람으로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주문하기를,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한국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중신학이야기], 42) 그것은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네 안 믿네 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민중신학 이야기] 영문판이 출판된 것은 영국 버밍엄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로 계셨던 수기르싸라자 박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탈식민주의 이론과 성서해석학 분야에서 명성을 가진 이분은 한국어로만 되어있는 이 책을 영문으로 번역하자고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자신의 한국인 제자들이 민중신학에 대해서 말할 때면 꼭 이 책을 인용하곤 했는데, 그 책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재작년에 한국에 오셨을 때 번역을 제안하시고, 직접 북미주 성서학회 (SBL)의 출판편집진에게 추천사를 써서, 책이 SBL출판사를 통해서 나올 수 있도록 수고해주셨습니다. 다음 달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안병무 선생 23주기 추모강연을 해주실 것입니다.

이분의 책 가운데 하나는 <Jesus in Asia, 아시아인이 경험한 예수>입니다. 스리랑카 출신으로서 영국에서 교편을 잡은 이분은 서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예수에 대한 아시아적 이미지를 아홉 가지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결론부에서, 아시아 신학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 신학이 예수 사건을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관심을 가진 반면, 아시아 신학은 예수 사건이 자기 내면에서 다시 재현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에 관심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물음에서도, 서양 신학은 예수 사건의 알리바이 즉, 그 역사적 흐름에 초점을 둔 반면, 동양의 물음은 그 사건이 자신들의 문화와 시대 속에서 어떻게 다시 꽃을 피우게 할 것인지에 관심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이 바로 그런 관심을 가진 신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문화와 심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싹이 트고 자라나서 마침내 전체 삶을 물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 신학에 경도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이 과정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살려내는 것보다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교리와 신조를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서구 신학에서 만들어진 교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천한 것으로 여기는 신학적 식민주의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인들이 존경합네 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거나 교회의 규모를 크게 키운 종교경영인들이지,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살아낸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연덕스럽게도 교회에서는 신학과 신앙이 분리되고,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기형적인 종교심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안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이 속한 시대 상황에서 책임있는 삶을 살고,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서 지혜를 길어 올려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 누가복음 151-10]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잃은 양과 잃어버린 동전에 관한 두 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의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설명은 하나님의 따뜻한 성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비유의 메시지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누가복음 본문과는 달리 특별한 상황묘사가 없기 때문에, 마치 삶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을 주는 것처럼 읽힙니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18:10) 이런 해석은 너무나도 따뜻한 나머지 그 의미가 불분명해서, 해석의 혼동과 아전인수식의 주장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석의 혼동은 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이 비유를 대입을 하는 데서 생기는 형식상의 혼동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받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잃은 양과 같은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데 힘쓰지 않는다면 과연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식의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주장에는 고상한 신앙의 미덕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빠져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착각입니다. 제한된 상황에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논리로 본다면, 이미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굳이 마지막 한 마리까지 찾아나서는 것은 잘못된 열정일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둔 채 돌보지 않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혼동이 생기는 이유는 규모의 논리로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비유 속의 양 주인이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일에 마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 아흔아홉에 해당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가르침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 속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첫 번째 해석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아흔아홉의 양으로 보는 경우입니다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비유를 시작하면서 먼저 뚜렷한 대립구도를 설정합니다. 한편에는 세리와 죄인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그 사회에서 잃어버린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언제나 스스로 옳은 사람들, 즉 잃어버림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해구도에서 잃은 양과 같은 세리와 죄인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한 예수님은 도리어 비난의 표적이 됩니다. 2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비난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때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의도는 분명합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는 주로 위선적인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려준 비유의 메시지는, 위선의 무리보다도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죄인이 더 소중한 것이라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대해서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이렇게 이해한다면, 잃은 양에 관한 비유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에 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으로 인해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방식의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에 대한 고발보다도, ‘잃은 양의 삶 자체에 대해서 깊이 주목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잃어버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들의 고뇌와 좌절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잃은 양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선택이 비로소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을 위해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삶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은 사람들 , ‘제자의 길세상의 길사이에서 삶의 참된 길을 묻고 있는 민중(오클로스)들로 보는 것이 좋습니. 이들은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오늘 본문이 위치한 더 큰 맥락을 보면, 이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을 가리켜 1425절은 많은 무리’(multitude)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리로 번역된 헬라어 오클로스(χλος)가난한 민중들을 의미합니다이들의 삶은 너무도 위태로웠기 때문에,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서 언제라도 죄인이라고 낙인찍힐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은 율법과 관습과 이해관계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이미 세리처럼 비난받는 죄인의 자리로 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위태로운 삶에 놓인 갈릴리의 민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본문에서 잃은 양에 해당되는 사람은 분명히 세리와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다.”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그것을 해제해 줄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찾지 않고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들의 한()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이는 율법의 올가미를 피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죄인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기득권의 율법에 저항하며 죄인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들은 모두 율법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 시대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시대를 향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이것은 잃어버린 양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극진한 사랑에 관한 말입니다. 좌절한 아웃사이더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단지 양 한 마리만의 구원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잃어버림을 당한 모든 양들의 운명을 가르는 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라고 단호한 표현을 합니다. 광야에서 잃어버린 양을 목자들이 발견할 때까지 찾아다니듯이,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시대를 살아가며 믿음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믿음을 회복할 때까지당신의 은총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유의 피날레는 잃은 양을 찾은 것에 있지 않고, 모두와 함께 기뻐하는 것에 있습니다. 잃은 양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다시 찾은 그를 두고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것에 이 비유의 진정한 가르침이 있습니다그것은 아흔아홉 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물량적 세계에 대한 반론입니다. 인사이더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외치는 불안한 율법적 세계에 대한 조롱입니다. 낡은 율법의 시대가 폐기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될 수 없다고 외치는 갈망과 믿음이 바로 이 잃은 양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서도 / 예레미야 411-12, 22-28]

오늘 제2성서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하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이 본문은 예언활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젊은 예레미야가 외치는 야성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분노와 좌절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메타포는 11절에 나오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를 묘사하는 표현들과 대비를 이루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바람’(ruah elohim)생명과 창조의 바람이었다면, 예레미야서 본문에 나오는 뜨거운 바람(ruah sah)은 심판과 고통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좌절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바람이 불게 된 이유가 22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지혜로운 반면, 선한 일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23절에 묘사된 그 세계는 혼돈하고(tohu) 공허한(bohu)’ 세계로서,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 혼돈하고 공허한세계와 똑같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옥토가 황무지로 변하였으며, 성읍들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예레미야가 본 이 환상은 선한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리석은 문명의 결말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 땅이 애곡하고 하늘이 어두워지는파국 앞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활동을 펼치지 않습니다. (28) 만일 역사가 이런 파국을 향하고 있을 때, 일구어가는 문명이 신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이집트 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사람들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뜻을 세우고, 수백 년에 걸친 사회적 실험 끝에 이르게 된 종착점겨우 혼돈과 공허의 세계일 뿐이라면, 그곳에서 예언자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예레미야가 본 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좌절이 담긴 뜨거운 바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혼돈과 공허의 세계를 휩쓸고 갈 심판의 바람이지만, 아직 그 세계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바람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만든 파멸적인 상황에서 왜 신이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왜 나의 적을 멸망시키지 않느냐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답을 얻기 힘듭니다. 자기 스스로 커져서 하늘의 새 약속을 그 마음에 담지 않고서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앞으로 전해 줄 교훈도 그것입니다. 어둠의 시절이 지난 뒤에, 눈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를 비록 잃었다할지라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넣음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1:33) 그것이 지금 혼돈과 공허의 땅에서도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예언자의 심정입니다.

 

[신뢰와 믿음에 기초한 삶 / 디모데전서 112-17]

디모데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전의 삶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가 예전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도를 핍박하며, 오만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극적인 생의 변화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자비넘치게 부어진 주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의 인생 변곡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한 때였습니다. 과거에 죄인의 우두머리와 같았던 삶이,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이런 절대적인 신뢰 고백과 실제로 그런 신뢰를 갖고 살아간 자신의 삶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경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있는 삶에서도 변함없는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합니다. 아마 그것이 명절에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귀성행렬에 담긴 마음일 것입니다. 종교적 삶에는 특히 그런 원초적인 그리움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진 여러 모양의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경험과 그것에 대한 계속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삶을 구성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12절의 말씀은 저에게는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묘비에 기록된 성경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인생을 마칠 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힘든 반면, 미래는 늘 불확실합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안의 시대를 믿음으로 안고, 하늘의 뜻을 품고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삶이 우리들의 삶에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율법이 생명을 지배하는 시대는 바리새적 위선의 시대요, 모든 행위가 혼돈과 공허에 묻히고 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자비와 은총을 베푸는 일을 멈추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창조절의 지혜를 안고,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