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김희헌 | 2019-09-22

by 김희헌 posted Sep 22, 2019 Views 48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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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8:18-9:1, 딤전2:1-7, 16:1-13)

2019.09.22 창조절 네 번째 주일

 

[신과 우상이 함께 뒹구는 시대 / 예레미야서 818-91]

계절이 변하여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많이 소란스럽습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조국 법무부장관을 둘러싼 비정상적인 대결이 격화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양 진영으로 갈라져서 한편에서는 검찰개혁을, 다른 한편에서는 조국 퇴진을 전선으로 삼고 완강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복잡하게 한 과정에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 검찰의 책임이 큽니다. 수사의 시점이나 진행방식, 유례없는 규모의 수사팀 구성이나 피의사실 유포를 통한 언론관리 등을 보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에 관한 초기의 의혹이 점점 걷히면서, 이 사태가 구체제 세력들의 총체적 반격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지는 듯합니다. 그 정점에 검찰 권력이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는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위배되는 사실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사권과 기소권과 지휘권을 동시에 갖고서 국민들의 운명을 맘대로 재단한 검찰 권력입니다. 검찰은 법무부 산하에 있는 하나의 법무행정 담당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모든 법 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습니다. 검찰은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자신들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 그 결정판을 보는 듯합니다.

현재 일고 있는 사회적 분열과 소란이 고통스럽지만, 검찰개혁이 사회적 과제로 분명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된 숙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개혁이 이번 사태를 통해서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들을 굴종시켜서 권력을 유지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 만큼 성숙한 것입니다. 이제 국민들은 검찰의 먹잇감이 되기보다는 검찰을 종복으로 삼는 길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 간의 대결전선이 뚜렷해지다 보니, 사람들은 그 대결에서 승리하는 일에 몰두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참에 일고 있는 조국 사태에는 보다 깊은 문제의식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정의로운 결과라는 진보적 가치를 주장해온 세력들 역시 기득권적 질서 위에서 움직여왔다는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입니다. 그 문제의식이 촛불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해줄 단초는 강남좌파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조국 사태가 커지면서 점차 이 말에는 위선적인 느낌이 가미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말은 매력적인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강남좌파라는 말에 담긴 두 가지 사회학적 의미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제 좌파도 강남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좌파라고 하면 씨를 말렸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걷히고 있다는 안도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남에 거주하는 사람도 좌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진보적인 정권을 보다 쉽게 창출시킬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졌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에 담긴 신학적의미를 우리 사회가 거의 숙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부유함의 상징인 강남진보적 가치를 표현하는 좌파라는 두 단어가 결합된 이 기이한 현상에 담긴 보다 깊은 정신적-영적 의미를 돌아보지 않고, 때로는 정치공학적인 계산을 갖고, 때로는 욕망의 시선으로 강남좌파라는 사회적 아이돌 현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현상이 어쩌면 자본에 대한 욕망이 미래적 가치까지 파먹은 사회심리학적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보지는 않으시는지요? 강남좌파라는 말이 대변하는 것은 현실 기득권이 미래의 가치까지 장악한 상황으로서, 이 상황을 용인하는 것은 권력’(authority)이상’(ideal)을 모두 획득하려는 세력들의 욕망에 우리 사회가 굴복하고 만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강남좌파라는 말은 권력과 이상을 둘 다 획득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뿌리에는 맘몬과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교가 퇴락하게 되는 것은 신과 맘몬을 함께 섬기기려는 정신이 주도할 때입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사회가 도덕적 기준을 잃고 표류하는 이유맘몬이 신이 되고, 또 신이 맘몬으로 밖에 환생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것이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노동자들의 처지가 하나도 변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맘몬과 신이 함께 뒹구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생각의 규모를 잃고, 젊은이들일수록 갈라진 심장으로 인해 시달리게 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예언자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탄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19). 성서의 역사가들이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망하고 말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긴 것이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속으로는 우상을 섬긴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는 이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언자는 부르짖습니다. 길르앗의 향유(balm)가 떨어졌느냐? 그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의 병이 낫지 않느냐? (22)

우리 역시 이 시대의 병을 고칠 길르앗의 향유를 찾아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교훈 / 누가복음 161-13]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이름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은 청지기를 불러서 해고통지를 합니다. 청지기는 걱정을 하다가 꾀를 냅니다. 그것은 채무관계를 기록한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말을 감면해주고, 100섬 빚진 사람은 80섬으로 바꿔주면서, 자신에게 고맙게 여기도록 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 일은 부도덕한 행위였습니다. 주인을 배신한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빚을 감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새로운 빚을 지게 하는 조작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부자의 입을 빌려서 이 청지기가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칭찬합니다. 여러분은 이 평가에 동의하십니까?

먼저 이 비유에 관한 본문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1-8절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9절부터는 그 이야기를 토대로 교훈적인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의 권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일에서는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8b~9) 두 번째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해야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길 것이다. (10~11) 세 번째는,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듯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13)

분명히 이 비유를 통해서 주고자 하는 교훈은 세 번째의 내용,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13절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첫 번째나 두 번째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면, 이 비유는 세상살이에서 가져야 할 깨알 같은 처세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읽혀질 것입니다.

이 비유를 해석하는데 생기는 어려움은 예수님이 마치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회계조작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데에서 생깁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은,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작은 일에 충성해라, 불의한 재물에 대해서도 충실해라, 등입니다. 그것을 문자 그래도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내용과는 다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청지기처럼 회계조작을 해서는 안 되고, 친구를 사귈 때 불의한 재물로 사귀어서는 안 되며, 불의한 재물을 얻는 일에 충실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그런 논리들을 완전히 비틀어버립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바리새인은 누가복음에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청중처럼 참여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15장에도 바리새인이 등장하고, 오늘 본문이 끝난 직후 14절에도 등장해서, 마치 나레이션을 하듯이 이야기의 긴장구도 속에 참여합니다.

16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을 등장시킨 누가복음의 의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서는 바리새인을 통해서 진실과 거짓이 뒤틀린 현실, 선과 악이 뒤엉킨 현실을 들여다보도록 하면서 이야기 전체를 완성해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바리새인을 가리켜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다음,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고 말합니다. 두 얼굴을 가진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낙타는 삼키면서도 하루살이는 걸러내는것처럼 (23:24), 큰 욕심을 감추고 작은 일에 윤리적 태도를 취하면서 행세를 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이런 외식적인 모습은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태도입니다.

사회가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어긋나고, 사람들이 마치 경제동물들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은 윤리와 도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여, 돈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소유한 자가 되고, 하나님을 소유하면 돈도 갖게 된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수록 정신은 늪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이 들려준 비유 이야기와 그 가르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야기 속의 청지기는 부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실직 상황에서 매우 약삭빠르게(shrewd) 자기 앞가림을 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두둔한 것은 그 청지기의 현실, 실직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그 상황에 관한 것이지, 그의 부정직함을 닮으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닙니다.

청지기가 직책을 악용하여 회계조작을 한 것은 비난 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로마 식민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른 상상을 잠시 할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쌓은 부자의 장부를 조작한 것은 마치 로빈 훗이나 임꺽정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악덕지주를 골탕 먹인 통쾌한 사건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지나칩니다. 왜냐하면 청지기는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 진 빚을 자신에 대한 부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아들빛의 아들을 대비시키는데, 청지기는 세상의 아들을 대변할 뿐입니다. 그가 칭찬받는 것은 세상의 아들로서 그 사회에 만들어진 채무관계에서 약삭빨랐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주신 가르침은 13절에 있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은 재물의 부질없음이나, ‘경제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께서 경고한 그 말씀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속을 초탈한 도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식의 믿음은 오히려 바리새인과 같이 가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선택과 소속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품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려는 신앙의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9:23, 14:27)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는 십자가의 무게가 있습니다. 그 무게는 이 세상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무게입니다. 진지한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현실에서 이 무게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무게가 짙게 깔린 오늘의 마지막 본문을 보겠습니다.

 

[불안의 시대, 마음을 지키는 길 / 디모데전서 21-7]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목회서신 가운데 하나로서, 그 내용은 다른 편지들에 나오는 바울의 사상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 연구자 가운데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과 같은 학자들, 바울의 이름으로 써진 열세 개의 편지 가운데 세 개의 목회서신에는 반동적인’(reactionary) 바울의 모습이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바울이 죽고 난 이후에 써진 편지의 저자로 바울의 이름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쓴 것이 분명한 7개의 편지에는 본래의 혁명적 바울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바울이 썼는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는 세 개의 편지(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에는 보수적 바울이 비친다면, 나머지 세 개의 목회서신에는 반동적 바울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5)

그 예로 오늘 본문은 권력자들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입니다.이런 체제순응적인 목소리가 바울의 사상일 리 없고, 후대에 생존해야 할 교회의 불가피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디모데전서 본문을 단지 바울의 이름을 위조한 문서로 여기고 내던지는 것이 옳을까요?

돈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현실을 살아갔던 신앙공동체에게는 더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에 있는 신앙공동체를 배경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1:3) 그 지역은 로마제국의 문화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신앙공동체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럽히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그 사회의 질서와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진공상태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종교가 가진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운동은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변모해갑니다. 초창기의 운동적 열정은 교리로 해석되어 전달되고, 예언자적 지도력은 성직체계로 제도화되며, 공동체의 열정은 직분의 역할분담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그것이 역사의 무게요, 피치못할 운명입니다.

어떻게 이 역사의 무게를 지고 신앙을 전진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목회서신에 담긴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4가지의 기도, 즉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supplication)와 기도(prayer)와 중보기도(intercession)와 감사기도(thanksgiving)를 말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진리의 관계, 다시 말해서 기도를 통해서 획득되는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4).

로마제국이 통치하는 불안의 시대에, 황제에 대한 복종을 신에 대한 찬양으로 여기던 우상의 시대신앙공동체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겨서는 안 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갈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현실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과 이웃을 깊이 살피며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여러 모양의 기도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믿음의 목표는 우리를 위기에 빠뜨리거나 위선에 물들게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도록 이끌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토록 신앙적인 문화 풍토에서 우리를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게 만드는지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토록 기독교적인 지적 풍토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진리를 향한 바람이 우리 마음에서 일도록 하는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적인 오늘의 교회풍토에서 우리를 여전히 신앙공동체를 세워가도록 이끄는지를 깊이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우상과 신이 함께 뒹굴며, 생각의 규모도 양심의 모서리도 닳아 없어지고 마는 시대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이 말씀이 살아있도록, 우리 모두의 삶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