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

죽음의 일상성 그리고 일상의 진부함

by 얼치기 posted Sep 25, 2019 Views 38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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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일상성 그리고 일상의 진부함

 

 

                                                     

 

 

 

 

하나의 삶이 통째로 우리 곁을 떠나가는 , 그것은 ‘죽음이라는 의례이다.  후에 남는 것은 여기저기에 단편적인 모습으로 남은 흔적일 뿐이고, 우리에겐 도무지 그의 삶을 돌이킬 방법이 없다.

 

 

살면서 아니, 나이 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부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무뎌있구나 느끼게 된다.  삶이 통째로 우리 곁을 떠나갔는데도 기껏  마디의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을 디지털 화면에 던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달리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무시로 전해지는 부음을 듣고 이재무 시인의  「빈자리가 가렵다 읽으면서, 일상이 되어버린 죽음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진부한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새해 벽두 누군가 전하는

 선배 시인의 암선고 소식 앞에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돌아왔지만

타인의  슬픔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있는 시간 혜량하게  것이지만

몸에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빈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이룬다

 

 

                           「빈자리가 가렵다전문
                           『저녁 6에서

 

 

 

죽음은 사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장례절차가 공적 영역에 속하고 슬픔의 공유가 공동체적일 수는 있지만,

죽음은  개인의 돌아감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슬픔도 사적 영역에서의 질량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고 일상의 이벤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슬픔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일상이고,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 일상에 작은 액센트로 찍히는 이벤트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슬픔을 유보하지는 않는다.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차오르는 서글픔을 삭이는 것이며,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이기적이게도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임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전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할지라도, 우리는  언저리에 고리를 걸고 가느다란 줄을 연결하는 것으로 연대할  안다. 비록  연대가 진부하게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어이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또한 가끔은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면서 애써 세상에 남겨진 흔적을 찾아보는 수고도  것이다.

 

 

삶은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도반道伴이지만,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깊어지는 욕망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미세한 음성으로 알려주는 신호를 듣지 못할 뿐이다.

 

 

하나의 삶이 통째로 우리의 곁을 떠나고도 일상의 엄청난 폭력 앞에 맥없이 돌아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할지라도, 쓸쓸한 밤이면  깊은 흔적으로 남은 어떤 죽음을 반추하기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