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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 김희헌 | 2019-10-13

by 김희헌 posted Oct 13, 2019 Views 22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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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0-13

그리스도를 기억 하십시오 (29:1, 4-7, 딤후 2:8-15, 17:11-19)

2019.10.13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시대에 주는 교훈 / 예레미야서 291, 4-7]

요즘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생겨난 사회적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갈등을 풀어야 할 정치는 실종되었고, 시민들이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되는 주장을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양비론을 펼치며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는 정당한 추수를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 외형이 드세다 해도 수구적 흐름은 결국 내침을 당하게 될 것이고, 진취적 흐름은 허울 좋은 명분은 벗겨내면서 민중들의 고통을 씻어내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정치평론이나 역사비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우들은 아실 것입니다. 이토록 갈라진 세계도 결국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고통당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알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교회력으로 창조절 일곱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변해가는 세계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에는 시름을 덜어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이 격랑의 역사 틈바구니에는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도 그 일을 통해서 지금 무엇이 지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듯, 한 발 물러서서 창조절의 묵상을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으로 1차포로가 끌려간 기원전 597년입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열왕기하서 24장을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 가족들과 고관들, 기술자들과 용사들 수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하 24:10-16)

사람들은 물었겠지요. 자기 백성을 포로로 끌려가게 한 신은 도대체 역사를 어떻게 지어가는 거냐고요.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 상황에 잘 대처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가서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사람들에게 예언자가 전한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일찍 돌아올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295-7절에서 예레미야는 여러 가지를 권고합니다.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는 열매를 먹어라. 혼인을 하여 자손들을 낳고 번성해라.’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그 성읍의 평안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해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무슨 심보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디서든지 성실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미래를 위해 힘을 길러라. 세 번째는 고통 속에서 지혜를 찾아라. 여러분은 어떤 것이 예레미야의 심정이라고 보십니까?

말기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의 신학교 동기 목사가 지난주에 맹자의 말씀 한 구절을 보내왔습니다. ‘사람이 지닌 덕과 슬기는 질병 안에 있다.’ 따뜻한 마음씨와 지혜를 배우는 때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가 없는 고통입니다. 의미를 가진 고통은 이겨낼 만한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하는 고통이 무의미하다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아픔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이 혼란 속에서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향해 가는가?

하지만 고통의 현실을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균형감을 잃고 거칠어지면 강도들이 먼저 설치고, 성찰과 사색은 사라지는 반면, 근본주의의 열풍이 불어 닥칩니다. 멀리 보는 진리는 외면당하고, 대신 손쉬운 방편이 추구됩니다.

포로기의 상황이 그랬을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무슨 예언을 듣고자 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포함된 예레미야서 27-31장의 내용은 거짓 예언과 참된 예언의 대결에 관한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 하나냐는 듣기 좋은 소리를 합니다. 머지않아 귀환하게 될 것이니 염려 말아라. 하나님이 준비하고 있으니 2년만 참아라. (28:3)

이 말들은 입에 발린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나온 거짓 예언일 뿐이요, 포로생활은 금방 끝나지 않고 칠십 년은 채워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9:9-10)

결과적으로 예레미야의 말대로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포로생활은 끝났습니다. 거짓예언과 참 예언의 시비가 밝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포로기 예언자들이 정작 풀어야 할 문제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고통과 폐허 속에도 하나님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종교철학은 이 물음을 오랫동안 물어왔습니다. 왜 이 세계에는 고통이 존재하는가, 만일 신이 있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해 종교는 두 방향의 서로 다른 답변을 제공해왔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을 믿으면 고통을 피하고 축복을 얻게 된다. 만일 그대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삶에 신이 없다는 증거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고통 속에 있다. 만일 신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그대 고통 속으로 가라.

여러분은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대체로 전자는 하등종교의 가르침이고, 후자는 고등종교의 가르침이라고 말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을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성서 안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신앙공동체의 고투가 나옵니다. 그 싸움을 통해서 신앙인들은 고통을 피하는 종교에서 고통에 맞서는 종교로 점차 옮아갑니다. 성서 안에서 벌어지는 이 진리투쟁의 분기점은 기원전 6세기 포로기의 경험이고, 성서적 가르침의 꽃봉오리는 예수의 민중적 삶과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이전의 종교는 신()의 의미를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축복을 주는 신을 좇아 살아갔고, 승리를 안겨주는 전능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포로기의 경험을 통해서 그 이전의 종교가 만들어놓은 관념들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포로기 이전 신학이 가르쳐온 축복에 대한 관념, ()에 대한 믿음, 구원의 성격, 창조에 대한 이해, 율법준수의 방식 등이 변경됩니다. 그리고 포로기의 경험을 반영한 포로기 이후의 신학에서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관념들, 예를 들어 유일신 신앙, 창조신앙,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개념 등이 태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포로기 이후 신학이 준 가르침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안병무 선생님 23주기 추모강연이 있습니다. 그분의 민중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신학입니다. 한국교회에 퍼져있는 번영신학과는 달리, 민중신학은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증언하고,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고자하며, 민중과 함께 한 예수를 고통의 자리에 피어난 역사의 연꽃으로 이해합니다.

종교가 오염되고 사회가 길을 잃는 까닭은 거짓예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인 데서 비롯됩니다. 한국 사회는 그 동안 분단 이데올로기가 온 사회체제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교회마저도 기독교 복음을 마치 한미군사동맹체제를 수호하는 하위 도구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믿음 / 누가복음 1711-19]

오늘 복음서 본문은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누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11-14)에는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다른 곳에 나오는 치유기사와 대동소이합니다. 아픈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은 그들을 각자의 삶으로 돌려보낸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본문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가진 기적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내용으로 인해,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오늘 본문이 처음부터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서 기자는 강도만난 사람을 치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병이 나은 한 사마리아 사람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것은 편견에 찬 세계를 향해서 진실을 증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명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그는 이미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봤기 때문에, 그가 예수에게 돌아온 이유는 미진한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되돌아온 이유에 대해 성서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고 (15), 다른 하나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기위해서입니다. (16)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태도를 보고,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선언을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을 듣게 된 그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열 명 모두 병으로부터 치료되었는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에 더해서 구원까지 받았다는 말인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은 많은 오해를 낳은 구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해석할 때, 마치 개인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처럼 오해했고, 특히 근대 이성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그 오해는 더 깊어졌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적인 믿음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식의 유치한 형식신앙을 교회에 도입했습니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자기 신념으로 환치시키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믿음의 알맹이라는 것은 자기 신념일 뿐이라고 간주하면서, 자신의 확신이 작동하는 범위 내에서 종교적 믿음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근대 이성의 시대를 살아온 기독교는, 그것이 복음주의가 되었든 자유주의가 되었든 간에, 교리를 믿고 있는 자기와 신념을 갖고 있는 자기를 중시하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더 본질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잃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말씀에 대한 신뢰, 은총과 평화에 대한 감사, 신비와 깊이에 대한 찬양이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무엇 때문에 지탱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안에 담긴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봤습니다. (2:8)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 모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며, 하나님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은 당신을 알고 느끼고 동행할 수 있는 믿음을 담아주십니다.

믿음의 삶이란 자신의 진리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자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삶의 성취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방향에 관한 말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말입니다.

한 병자는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옵니다. 그리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디모데후서 28-15]

오늘 마지막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은 우리가 함께 읽은 구절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며,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8b-9)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기억하는 삶이란 단지 지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설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매여 있으나, 그가 매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고자 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사는 삶은 역설이요, 신비입니다. 11-13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믿을 만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참고 견디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또한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사는 삶의 특징을 말한 다음, 공동체를 위해 두 가지 사항을 권면합니다. 하나는 공동체 안의 분쟁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유익이 없고,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세워가야 할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진리의 말씀을 잘 다루는’(accurately handling) 사람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여백을 따라 너그럽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잘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이 자신과 이 세계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삶을 지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갈라진 우리 세계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서 있는 사람,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계는 다시 지어질 것입니다.

창조절이 깊어갑니다. 우리 마음속에 오늘의 말씀이 울리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낮은 곳에서, 아픔이 있는 곳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요히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토마스 머튼이 드린 기도의 일부를 읽으면서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상상해오던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저는 어둠과 거대한 침묵 속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 시간 저 자신의 등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밝음은 저의 어둠입니다.

저는 당신에 대해 모르고, 저 혼자서는 당신을 알기 위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상상한다면, 저는 잘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이해한다면, 저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안다고 의식하고 확신한다면, 저는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어둠만으로도 족합니다.

(토마스 머튼, [침묵 속에 만남], 5)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에 대해 감사 하십시오.

우리 삶에 임한 주님의 신비를 찬양하십시오.

창조절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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