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사람, 다 주는 사람(마 5:1-11, 26:26-30)
2019.10.06 창조절 여섯 번째 주일, 세계성만찬주일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유연희 목사(감리교신학대학교 외래교수)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 세계성만찬주일에 예배드리는 향린 가족과 세계의 크리스천 가족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늘 향린 교회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이렇게 향린 공동체가 모여 예배하는 소중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되어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목사님들과 모든 성도님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반갑습니다.
작년인가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이 ‘00은 처음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던데요. 여러분은 요새 무엇이 처음인가요? 최근에 ‘처음이라’는 주제로 동네 주민이 이런 시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시입니다.
“딸이 처음이라서 늘 떼쓰고, 아내가 처음이라서 늘 투정부리고, 며느리가 처음이라서 늘 서운하고, 엄마가 처음이라서 늘 당황하고, 할머니가 처음일 때는 많이 사랑해야지.”
이 아침에 우리 모두가 ‘오늘은 처음이라’는 말을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이라는 시간을 처음 살게 되었습니다. 어제 만난 사람도,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도, 매일 보는 가족도 오늘 처음 만나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긴장하고, 존중하고, 잘 보이려고 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그래서 스스로가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을 오늘 처음 만나고, 성도 여러분도 오늘 처음 만나니, 서로 친절하게 마음을 열고 은혜를 나눌 수 있겠습니다. 사실 오늘이라는 시간이야말로 인생의 전부입니다. 어제까지의 내 삶이 잘났든 못났든 끝난 것이고, 내일은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이 곧 인생이고, 그래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와 ‘오늘은 처음이라’가 다른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매일이 새로운 인생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번 생에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크리스천 인간으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친절하고 촘촘한 지침이 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시작이고 마지막 만찬이 가르침의 끝으로서 수미상관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두 본문의 의미와 더불어 성 정의(Gender Justice)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세계 모든 크리스천이 함께 지키는 세계성만찬주일입니다. 이 주일의 의미는, 이 성만찬으로 세계 모든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문화와 전통의 차이, 교단의 차이, 강조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크리스천은 이 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한 교회 안에서의 연합조차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의 잔과 떡을 나누지만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향린 공동체처럼 진보 교회로 알려진 회중 안에서도 급급진보부터 급진, 급진 중도, 대략 진보, 보수진보 등 진보의 결이 다를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연령 및 사안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족도 목사와 장로가 여럿인데, 장로교 합동, 감리교, 성결교에 정치 성향도 촛불부터 태극기까지 다양합니다. 가족이나 교회 밖의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성과 차이는 상당합니다. 지난 주간 동안에 서초동과 광화문에서의 집회는 각각 주장하는 내용도, 참석자 숫자도, 시위 방식도 매우 달랐습니다. 이렇게 다름의 골이 너무 깊은데, 정말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있을까요, 한 몸인 걸까요?
특히 요즘에 한 몸이어야 할 주님의 교회를 나누는 이슈는 성 정의입니다. 해외 주요 개신교단들의 성 정의 정책을 보면 주로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배려를 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서구사회를 포함한 이 세계에서 성차별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섹슈얼리티를 포용하는 정책이 총회에서 통과되지 않은 주요 교단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이래 세계는 다양한 종류의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권리와 해방을 주장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인류의 다수나 절반인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이 주장을 했고, 그 후에는 장애인, 소수 인종, 이주민, 성 소수자가 권리와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권력을 더 가진 사람들은, ‘이해는 하지만 시기상조이다’라는 식을 말을 했습니다. 시기상조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말 때문에 어떤 한 명 한 명의 삶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제가 속한 여성단체가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죽 썼는데 제가 성평등이라는 말을 쓰자고 했더니, 시기상조라고 했습니다. 그 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양성평등이란 남자와 여자의 평등이고, 성평등이란 모든 성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평등을 포괄합니다. 그 시기상조라는 말이 제가 점점 그 단체에 가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1980년대에는 민주화가 우선이라 여성운동은 시기상조라고 했었습니다. 영국 교회의 연구 결과, 여성이 교회에서 전통적인 역할을 하면, 그 교회는 여성이 감소한다고 했습니다. 즉, 여성은 리더십을 포함한 모든 역할을 하고 싶은데, 부엌일과 청소 같은 것만 하게 하면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성 부문은 한국에서도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여성 안수도 안되는 교단도 있으니 영국의 연구 결과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성은 어떨까요? 가톨릭과 일반 국민은 절반이 지지하고, 개신교는 30프로만 지지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평균이고, 20대, 30대의 젊은이들은 개신교에서도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젊은 크리스천은 지금 미래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각이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면 지금 삼천년기의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중심주의 문화에서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개념입니다. 양성평등을 이룬 다음에 성평등으로 가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인류문화학자들(캐롤 딜레니, et al.)은 고대 이스라엘과 성서 세계와 아나톨리아, 중동을 포함하는 고대 지중해 연안의 문화를 연구하며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 문화라고 규정했는데요, 이 문화는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위계질서적으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시민 남자는 위계질서의 맨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여자가 있고, 그 아래에 환관, 처녀, 자웅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젠더/섹슈얼리티 체제는 다른 위계질서들과 겹치므로, 외국인 남자와 노예는 내국인 남자와 주인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남자는 성적인 의무가 주인의 요구에 종속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민 남자 아래에 다른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가 배경으로 깔고 있는 그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위계질서를 오늘날에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통해 특권과 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결혼에 대하여 말하면서 ‘고자들’을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쉽게 아내를 버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예수께서 엄한 기준을 제시하자, 제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답했습니다. “모태로부터 태어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또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마 19:12). 우리는 이 중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아마도 강제로 고자가 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란 무슨 뜻일까요? 아마 나면서부터 지배적인 범주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인정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이 누굴지 더 찾아보았는데, 아나톨리아 지역(현재의 터키)에서 땅의 어머니 여신(*키벨레 Cybele)의 사제들(*갈리 Galli)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Wilson 1995: 128-9; Jennings 2003: 148-50). 그런데 막스니스라는 신학자는 고자라는 말이, 집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다닌 젊은이들을 사람들이 비방하며 부른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예수와 그 일행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당시 전형적인 남성의 삶을 살지 않아서, 비방하려고 쓴 말이었는데 “예수께서 이 말을 골라 썼다”는 것입니다(Moxnes 2003: 75). 예수님의 말씀에는 숨은 뜻이 있는 말이 많은데, 이 표현도 그런 숨은 뜻이 있어서 예수님도 이 말씀의 바로 앞과 뒤에서 후렴구처럼 “누구나 다 이 말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다만, 타고난 사람들만이 받아들인다.”는 말과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고 조심스레 반복하셨습니다(마 19:11-12).
예수님은 혈연 가족을 떠났고, 남자로서의 가부장적인 특권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는 말은 자신과 일행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양한 고자,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이나 젠더 규범을 떠날 수도 있다고 대응하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퀴어를 지지하는 이성애자를 앨라이(ally)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퀴어학자들은 앨라이들도 퀴어라고 부릅니다. 퀴어라는 말이 ‘이상한,’ ‘특이한’이라는 뜻이고, 이성애자인데 퀴어를 지지하는 앨라이들이 이상하니까 퀴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 정의를 원하는 모든 이성애자는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래, 우리가 고자다’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래, 우리가 퀴어다’고 모두들 커밍아웃해야 합니다.
섹슈얼리티 이슈로 분열된 현대 교회에서 이 세계성만찬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가 어떻게 나뉘지 않고,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을 수미상관으로 감싸는 산상수훈과 성만찬 가르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오는데, 111절로 되어 있어서 예수님의 가장 긴 담화입니다. 예수님은 법, 분노, 정욕, 이혼, 맹세, 복수, 원수 사랑,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 금식, 물질주의, 불안, 기도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한번 원불교대사전에(^^) 산상수훈의 정의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정의했는데,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로서의 진복팔단(眞福八端, 팔복)을 기본으로 하여 참된 구원과 하늘나라를 밝히고, 사랑이 모든 덕의 결론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침의 실행을 명했다. (산상수훈은) 기독교윤리의 대헌장으로서 내적이며 도덕적인 종교를 가르친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잘 정리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은 유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상태의 사람들, -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이 복이 있다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뒷부분 후렴은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땅을 차지하고, 배부를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매우 가깝고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엎은 말씀입니다. 청중을 화들짝 놀라게 한 것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친히 자녀라고 부르시고 자비롭게 대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율법을 수호하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좋은 일 많이 한 사람이 아니고, 성공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전복적인지는 팔복의 결론 부분에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모욕, 박해, 비난을 불러올 것이라고 알고 게십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형으로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기, 명예, 돈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실 보상은 하늘에서의 상이고, 옛날에도 하늘의 길을 제시한, 예언자 같은 사람들이 다 겪은 일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에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무슨 말과 행동을 하고 살고, 그에 따른 결과를 감내할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부터 폭탄을 터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그렇게 살기로 하셨고, 자신을 다 내어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팔복은 우리를 점검하게 합니다. ‘나는 어떤 상태일까?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나는 사랑으로 존재하는가? 나는 나를 다 내어주고 있는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와 무리에게 새로운 윤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의 오류를 드러내고 청중의 율법주의적 태도를 일깨우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요성이나 율법과 전통을 수호하는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율법의 문자를 고집하는 것에 반대하고, 율법의 진정한 내적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의 법은 당시 필요하고 좋은 뜻에서 나왔겠지만,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 통용될 수는 없고, 더욱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삶과 가르침으로 하늘나라를 몸소 보이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에 이르러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로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은 고대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도우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특이한 말씀과 행동으로 유월절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식사하시며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아니, 유다만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바로 다음에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체포와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 그간 동고동락을 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눈 제자들이 전부 다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구 화를 내진 않으십니다. 그냥 그렇다고 말하십니다. 그렇기에 이 마지막 식사에서 예수님이 더하신 새로운 의미가 놀랍습니다.
다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며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받아드시죠. 이것은 내 몸입니다.” 제자들은 좀 어리둥절하고 있을텐데, 예수님은 이번에는 잔을 들어서 감사 기도를 한 후, 역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드시죠.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입니다. 죄를 용서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입니다.” 바로 조금 전에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신할 거라는 대화가 있었고, 아마 다들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유다 때문에 속상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심한 말을 하시긴 했습니다. 또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다 주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처음 공생애를 시작할 때 알았던 것처럼 이제 쉬운 것은 아니지만, 아니, 겟세마네서 보여주신 것처럼 너무도 힘들고 외롭지만, 마지막을 받아들이십니다. “배신해도 괜찮아, 나는 그냥 나를 다 내어줄게.” 제자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이 너무도 먹먹해서 아무 말도 못했지만 다 기억했다가 공관복음서에 모두 실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에 초점을 두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창조의 선하심을 진정 깨달은 사람에게는 타자나 적이 없습니다. 타자가 자신의 일부임을, 바로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견은 다를지언정 진짜 원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파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해석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도발하고 도전했지만 진짜 미웠던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슈든 찬반으로 갈리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과 전쟁도 불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결국 포용적이고 재구성된 시온이라는 급진적인 예수님의 꿈 때문이었습니다(Sean Freyne 2004: 110-21).
동성애 이슈로 다투느라 갈갈이 찢겨진 교회의 모습이 부끄럽고,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성서에는 배타적인 목소리와 포용적인 목소리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린 공동체와 닫힌 공동체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 남겨져있습니다. 성서학자 프레더릭 가이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전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씀을 버려가면서라도, 영원토록 우뚝 서있을 것이다”(Frederick J. Gaiser 1994: 283, 287).
마태복음 5장의 끝 절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우리더러 하나님처럼 완전하라고, 예수님이 커다란 도전을 주십니다. 매 오늘마다 새 인생을 선물로 받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의 가르침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남김없이 다 주며 사랑하며 살라고, 하나님처럼 완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참으로 송구한 부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살아볼만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처음이라, 우리가 부족하고 버벅이지만, 이 부르심을 받잡고, 어제까지 오해했던 것을 새로 배우려고 마음을 열며, 어제까지 싫었던 사람이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며, 아낌없이 사랑하고 다 주며, 드디어는 모두 한몸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완전에 이르는, 그런 걸음을 우리 함께 걷도록, 예수님께서 힘주시고 믿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