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좌표 (렘 31:27-34, 딤후 3:14-4:5, 눅 18:1-8)
2019.10.20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
[존재의 좌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 / 딤후 3:14-4:5]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오후에 교회에서 있을 학술제를 염두에 두고 잡았습니다. 청년신도회와 희년청년회가 함께 만든 대화의 장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존재의 좌표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배가 대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하고, 인간의 삶 또한 좌표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그 모습과 성격이 달라집니다. 오후 행사에 많이 참석하셔서, 이 교회의 젊은 영혼이 우리 사회와 교회의 존재좌표를 어떻게 찍는지를 듣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 학술행사가 있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 추모일을 맞은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가진 강연회를 비롯하여, 외국에서 초대되신 분들이 한 주간 동안 여러 곳에서 민중신학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눠주었습니다. 특히 월요일에는 경동교회에서 해외에서 오신 두 분의 신학자(Sugirtharajah 교수와 T. Jennings 교수)를 모시고 안병무의 신학사상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들에 참석하면서 저는 그동안 익숙했던 해석과는 다른 관점으로 평가되는 민중신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정리한 몇 가지 내용을 교우들과 나누면서, 민중신학을 중시하는 우리 신앙공동체의 현실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영국 버밍험 대학의 수기 교수는 안병무 신학사상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예수에 주목하며 교리로 박제화 된 예수를 살려내고자 했다는 점, 둘째는 예수를 한 명의 영웅적 구세주로 이해하기보다는 민중들과의 집단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는 점, 셋째는 사회역사적 차원의 민중사건을 통해서 예수를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은 당시의 학문적 풍토와는 다른 혁신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안병무의 열정은 당시 독일신학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비판의식의 표출이라는 주장은 흥미로웠습니다. 그 설명은 이렇습니다. 나치즘이 발흥한 1930/40년대의 독일은 아리안족의 혈통을 중시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쳐갔습니다. 이런 정치적 광풍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기독교 신학은 유대인 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관심을 교리화 된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병무가 교리로 채색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갈릴리 민중과 함께 한 역사적 예수를 강조했던 데에는, 당시에 기독교신학을 이끌고 있던 독일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안병무의 학문적 업적으로 여겨지던 ‘오클로스’에 대한 연구는, 오늘의 연구결과에 비춰보면 보다 엄격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안병무에 따르면, 복음서에서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인 오클로스는 그 시대의 ‘민중들’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수기 교수는 오클로스가 단지 “희생자와 가난한 자들로 이뤄진 단일 집단이라기보다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혹당하기 쉬운 억업자와 피억압자 양쪽으로 구성된 보다 광범위한 집단”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Stories of Minjung Theology, xvi)
만일 그렇다면, 예수의 활동이 단지 오클로스에 대한 일방적인 연민과 사랑만이 아니라, 자기 시대를 향한 보다 역동적인 가르침과 연대를 함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기 교수가 안병무의 신학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졌다면, 시카고신학대학의 테드 제닝스 교수는 안병무의 바울연구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안병무가 바울을 예수운동의 계승자가 아니라 교회의 설립자로 보면서, 그가 예수에 관한 케리그마의 신학을 진행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왜곡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훨씬 더 진취적인 운동가로 볼 수 있으며, 또 민중들의 눈으로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제닝스 교수는 안병무가 중시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기획 자체가 독일 신학적 방법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 결과를 학자들이 모여서 투표로 결정하는데 대한 문제의식과도 결부되어 있다고 봅니다.
제닝스 교수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경우도 마가가 본 예수일 뿐이지 역사적 예수 자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런 주장이 저에게는 오늘 우리들이 당연시하고 있는 진리판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청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안병무 선생님이 남긴 민중신학적 가르침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민중신학적 열정은 새로운 시대환경 속에서 더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 교회와 교류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더욱 중요합니다.
인류의 양심을 타고 흐른 거대한 기독교 역사에 비춰볼 때, 우리 공동체가 걸어온 역사는 미미하고, 또 인간의 정신사와 우주의 진화사에 비춰본다면 어쩌면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존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겸허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적 모험을 이끌어주시기를 빌 뿐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3장 본문은 디모데를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워온 진리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본문은 두 개의 단락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요 (3:15-17), 다른 하나는 혼돈과 고난 속에서도 ‘전도자의 직무’를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4:1-5).
성경의 교훈에 대한 가르침을 말하는 3장 16절 말씀은 오해와 논란이 많은 구절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이 성경구절에 대한 오해로 인해 기독교는 문자주의(literalism)라는 미몽에 빠지고, 한국교회는 지독한 교단분열까지 겪었습니다.
성경(graphē)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로 ‘테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God-breathed)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이 불러준 대로 받아 적었기 때문에 문자 하나하나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본문 15절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sophisai eis sōtērian, to make wise unto salvation) 것이지,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문자적 도그마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한 일’에서 유능하고 잘 준비되어있도록 이끌어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17절)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좌표를 자기 욕심에 두지 않습니다. 시대가 혼탁한 것은 저마다 존재의 좌표를 자기 욕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4:3-4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또한 이런 세태를 견뎌야 하는 신앙 공동체의 여정은 고달픈 일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디모데를 향해 권면합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2절),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신앙의 과제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신앙의 분투를 거친 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물음을 안고 누가복음의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 누가복음 18장 1-8절]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누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어떤 구절에 주목하는가에 따라서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해석은 과부의 ‘집요한 요청’에 주목하며, 이 비유를 끈질긴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 1절에서, 이 비유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이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을 돌려세운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4-5절에 나오는 재판관의 고백에 주목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어떤 때는 이런 끈질긴 간청이 필요합니다. 과부처럼 약자의 고난을 해결해야 할 때 집요한 간청은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불의한 재판관을 향해서라면 그 행동은 장려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상황은 그렇게 선과 악이 뚜렷한 이분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주장만 막무가내로 하는 종교가 얼마나 세상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 대한 다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의 해석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주목한 대목이 어디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5절까지 비유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후, 6절을 보면 장면이 바뀌면서 이 비유의 교훈에 대해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것은 ‘과부의 집요한 간청’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관심은 과부에서 재판관으로 옮겨갑니다. 그것은 ‘재판관의 불의’와는 대비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과부의 간청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성서의 비유를 풀이한 책에서 이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일의 성취는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하늘에서 떨어뜨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투쟁으로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 144).
그리고 이 본문으로 하늘뜻펴기를 할 때, 제목을 ‘기도의 사건화’로 잡습니다. 그 내용은 간절한 기도가 역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건을 촉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건적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실존적 측면도 있습니다. 안병무는 이렇게 은총의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을 가리켜 ‘미래의 나로 돌아서는 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177).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사건화’는 땅의 간청과 하늘의 응답이 마주쳐 생긴 창조적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 머물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 자체가 어떤 신학적 결론을 맺고 끝내지 않고, 열린 질문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비유의 내용과 해석을 모두 한 다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물으면서 본문을 마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그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그러나’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플렌’(πλὴν)은, 그 앞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보다 그 뒤에 나오는 질문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이 질문은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이 주목하는 것은 불의한 재판관을 승복시킨 과부의 끈질긴 간청도,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총도 아닙니다. 그 모든 땅과 하늘이 마주쳐 울린 사건이 지나간 후에, 이 세상에 예수가 찾고자 하는 믿음이 남아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롭게 하는 싸움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집요한 투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싸움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싸움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싸움을 마친 후에 무엇을 남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최종적으로 묻는 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찾는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신앙적 성찰을 요청하는 물음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존재좌표를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믿음의 자리에 두라’는 말일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 렘 31:27-34]
예레미야서 본문은 <위로의 책, 30-31장>이라고 불리는 대목 가운데 있습니다. 본문은 히브리어 세 단어로 시작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hinnêh yāmîm bā’îm) <위로의 책>에서 이 확신의 문장은 4번 반복됩니다. (30:3, 31:27, 31, 38) 포로생활의 어둠을 떨치게 되는 날, 이전 세대의 업보로 인해 당하던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 주님이 직접 사람도 가축도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평화롭게 자라게 할 날,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날은 포로기 어둠의 질서가 지배하는 때가 아니요, 낡은 율법이 삶을 지배하는 때가 아닙니다. 새로운 약속과 믿음이 일어서는 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때에 필요한 것은 ‘새 언약’(berîṯ ḥăḏāšāh)이라고 말합니다. 관습과 제도가 된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삶을 새롭게 할 ‘새 언약’이 필요하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4장 4절에서 ‘주님이 원하는 할례’는 ‘네 마음의 포피’(foreskin of your heart)를 자르는 것이라고 하며, 7장 22-23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의 율법을 따른 희생제물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to obey my voice)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언약은 ‘가슴에 새겨진 율법’(torah qereb)이라고 오늘 본문 33절은 말합니다.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야말로 결코 파기되지 않을 ‘영원한 언약’(berîṯ ‘ōwlām)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2:40, 50:5)
새 언약에서 ‘새로움’이란 단지 다시 주어진 언약이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삶/마음을 새롭게 하는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가슴에 새긴 율법으로서, 성찰을 통해 희망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제도나 관습의 언약이 아니라 동경과 믿음의 언약입니다. 모세의 율법인 옛 언약은 규칙과 제도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을 지킬수록 과거의 체제가 강화되는 반면, 새 언약은 자신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 한계를 넘어서 타자를 수용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이 예언을 듣는 이들은 여전히 포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전과 고향이 파괴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 포로가 된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어진 ‘새로운 언약’은 어둔 밤에 비친 한 줄기 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 언약이란 고난에서 피어난 정신이기 때문에 모든 고난의 시대를 견디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언약’에 관한 예레미야의 사상은 신약성경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눅 22:20) 이 새 언약은 성전종교 안에 갇히지 않고, 십자가라는 새로운 원리에 기초한 언약이 됩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후 3:6)
예레미야는 가장 어두운 시절에 가장 미래적인 정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과거를 답습하는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양심과 믿음에 기초하여 새로운 부름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입니다. 과거의 질곡에 매이지 않고, 존재의 좌표를 앞에 두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새로 주어진 약속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약속 자체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 모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새 언약이 필요합니다.
익어가는 가을,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에 하늘의 새 언약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포로가 된 절망의 사람들에게 새 언약이 주어졌듯이,
고난을 딛고 일어난 마음에 깃든 하늘 말씀은 언제나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존재의 좌표로 삼고 나아가는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
혼돈의 시대를 헤치고 나아갈 지혜와 힘이 부어지기를 기원합니다.